우리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
오랜 시간 동안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것은 무언가가 말해질 필요가 있다는 직감이었습니다.
말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아예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들.
나는 스스로 중요한, 혹은 전문적인 작가라기보다는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p10)
- 존 버거 -
이탈리아의 람페두사 섬 부근의 바다에서는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출발한 사백여 명의 이민자가 익사했다. 그들은 일자리를 찾겠다는 희망으로, 바다에서 타기에는 부실한 배에 몸을 싣고 밀항하던 중이었다. 생존에 필요한 최저 소득을 얻기 위해 일자리를 찾고 있다. 떠돌이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p36
국가의 정치가들이 하고 있는 논쟁이 더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일 혹은 해야만 하는 일과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에 보편적 참정권이라는 것도 의미 없게 되어 버렸다. 오늘날의 세계를 결정하는 근본적인 판단은 모두 투기 자본가와 그 대리인들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그들은 이름이 없고 정치적인 발언은 전혀 하지 않는다. p36
신자유주의의 독단은 전통적인 정치학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렸다. 의회 정치인들은 무력해졌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말뿐이다. 미디어도 똑같이 공허하고 텅 빈 언어를 이어받았다. 유럽, 국제적 연대, 독립 같은 용어는 쓸모없고, 내용도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국제적인 뉴스를 전할 때 약어들을 남발하는 것 역시, 이 내용 없음을 향한 큰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어떤 감각, 과거와 미래를 잇는 그 감각은 완전히 말살되었거나 있더라도 주변화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일종의 역사적 외로움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일정한 주거지가 없는. 우리는 역사적 주거지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압박 아래 살고 있다. 죽은 자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를 받아들이는 인정된 의식이 이제 더 이상 없다.
매일매일의 삶은 있지만 그걸 둘러싸고 있는 건 공백이고, 그 공백 안에서 수백만 명의 우리는 오늘을 홀로 있다. 그리고 그런 고독은 죽음을 벗 삼을 수도 있다. p61
오늘날 살아 있음, 혹은 무언가 되어 가고 있음을 산문으로 표현하거나 정리하는 일은 어렵다. 담론의 형식으로서 산문은 최소한 확립된 의미의 연속성이 있을 때 가능하다. 산문은 주변의 서로 다른 관점이나 의견들 사이의 교환이며, 공통의, 설명적인 언어를 통해 표현한다. 그리고 그런 공통의 언어는 대부분의 공적 담론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일시적이지만, 역사적이기도 한 상실이다. p88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생겨나는, 또한 점점 늘어나는 인류의 가난과 계속되고 있는 지구에 대한 착취도 유토피아의 이름으로 시행되고, 정당화되고 있다. 그 유토피아는 자유시장 방식이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작동할 때 보장되는 것이다. 그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넥타이 색깔을 놓고 투표하는 세상이다. p89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투기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세계 질서에서 미디어는 끊임없이 정보를 폭탄처럼 쏟아붓는다. 하지만 그 정보들은 대부분 계획적인 교란에 불과하며, 진실로부터, 본질적이고 다급한 것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들이다. p105
매일매일 발생하는 문제들,
채우지 못한 욕구와 좌절당한 욕망을
일컫는, 혹은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
우리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읽어 온 언어
하지만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언어.
그런 텍스트는 말 없는 어떤 언어에 속한다.
삶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는
이름이 없는데, 이는 우리의 어휘가
가난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