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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May 28. 2017

존 버거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우리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오랜 시간 동안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것은 무언가가 말해질 필요가 있다는 직감이었습니다.
말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아예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들.
나는 스스로 중요한, 혹은 전문적인 작가라기보다는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p10)
- 존 버거 -



Rosa luxemburg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 : 폴란드 출신의 독일 혁명가이자 정치이론가. 독일 공산당 '스파르타쿠스 단'을 설립하고 혁명활동을 벌이다 살해당했다


인간답게 지낸다는 것은 거대한 운명 앞에 스스로의 삶을 즐겁게 던지는 것이지요. 그래야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매일매일의 화창함과 모든 구름 조각들의 아름다움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1918년 러시아 혁명, 정부 관료들만을 위한 자유,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 전혀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는 언제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여야 합니다. 정의라는 관념에 대한 열광 때문이 아닙니다. 정치적 자유가 지니는 유익함이나 총체성 그리고 사람들을 정화시키는 힘은 모두 이 본질적인 특징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특권이 될 때 그 효용성도 사라질 것입니다.
현대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어떤 책이나 이론에서 제시한 계획에 따라 자신들의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 노동자들의 투쟁은 역사의 일부이고, 사회적 진보의 일부이며, 역사 한가운데서, 진보 한가운데서, 싸움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반드시 싸워야만 함을 배웁니다. - 로자의 말 -



이탈리아의 람페두사 섬 부근의 바다에서는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출발한 사백여 명의 이민자가 익사했다. 그들은 일자리를 찾겠다는 희망으로, 바다에서 타기에는 부실한 배에 몸을 싣고 밀항하던 중이었다. 생존에 필요한 최저 소득을 얻기 위해 일자리를 찾고 있다. 떠돌이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p36

국가의 정치가들이 하고 있는 논쟁이 더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일 혹은 해야만 하는 일과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에 보편적 참정권이라는 것도 의미 없게 되어 버렸다. 오늘날의 세계를 결정하는 근본적인 판단은 모두 투기 자본가와 그 대리인들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그들은 이름이 없고 정치적인 발언은 전혀 하지 않는다. p36
신자유주의의 독단은 전통적인 정치학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렸다. 의회 정치인들은 무력해졌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말뿐이다. 미디어도 똑같이 공허하고 텅 빈 언어를 이어받았다. 유럽, 국제적 연대, 독립 같은 용어는 쓸모없고, 내용도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국제적인 뉴스를 전할 때 약어들을 남발하는 것 역시, 이 내용 없음을 향한 큰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어떤 감각, 과거와 미래를 잇는 그 감각은 완전히 말살되었거나 있더라도 주변화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일종의 역사적 외로움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일정한 주거지가 없는. 우리는 역사적 주거지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압박 아래 살고 있다. 죽은 자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를 받아들이는 인정된 의식이 이제 더 이상 없다.

매일매일의 삶은 있지만 그걸 둘러싸고 있는 건 공백이고, 그 공백 안에서 수백만 명의 우리는 오늘을 홀로 있다. 그리고 그런 고독은 죽음을 벗 삼을 수도 있다. p61
오늘날 살아 있음, 혹은 무언가 되어 가고 있음을 산문으로 표현하거나 정리하는 일은 어렵다. 담론의 형식으로서 산문은 최소한 확립된 의미의 연속성이 있을 때 가능하다. 산문은 주변의 서로 다른 관점이나 의견들 사이의 교환이며, 공통의, 설명적인 언어를 통해 표현한다. 그리고 그런 공통의 언어는 대부분의 공적 담론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일시적이지만, 역사적이기도 한 상실이다. p88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생겨나는, 또한 점점 늘어나는 인류의 가난과 계속되고 있는 지구에 대한 착취도 유토피아의 이름으로 시행되고, 정당화되고 있다. 그 유토피아는 자유시장 방식이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작동할 때 보장되는 것이다. 그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넥타이 색깔을 놓고 투표하는 세상이다. p89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투기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세계 질서에서 미디어는 끊임없이 정보를 폭탄처럼 쏟아붓는다. 하지만 그 정보들은 대부분 계획적인 교란에 불과하며, 진실로부터, 본질적이고 다급한 것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들이다. p105


생각



정치인들의 정치적 프레임을 걷어내면 그들은 빈 껍데기일 뿐입니다. 공천 받지 못해서 탈당하고 당선돼서 다시 복당하는 일, 당을 수시로 바꿔치기하는 사람들, 그들 중에 만약 공천을 순순히 받고, 그들의 수장이 파면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들만의 리그에서 위세 등등하게 지위를 유지하면서 그들만의 정치를 했을 테죠. 그런데 상황이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 프레임을 짜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보고 정치를 잘한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 정치적 프레임을 걷어내고 실제 그들이 이루려고 했던, 이뤘던, 국민을 위한, 다수를 위한 어떤 정치를 논하고, 행동했는지를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저는 정치를 잘한다는 말이 거북합니다. 정치 9단이고, 정치 고수라는 말이 왜 이렇게 거슬릴까요. 기존의 정치가 올바르지 않았다면 그들이 말한 정치를 잘한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투표를 하려는 순간 개인은 정치를 잘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은 큰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20대 국회의원 선거가 2016년 4월 13일 실시됐습니다. 21대 선거까지 아직 3년이란 시간이 남았습니다. 무척 길죠...

다수를 모두 포용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절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으리란 걸 압니다. 그런데도 모두를 위한 정치를 하려는 것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요? 강력한 법 아래 이뤄질 수밖에 없을 테죠. 법은 안전하고 공평한가요? 저는 법을 잘 모르겠습니다. 법이 언제나 정의에 편에 선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런데도 법이란 것이 유일한 방어선 같기도 합니다. 법 꾸라지는 그 법을 너무도 잘 알아서 잘도 피한 다지만, 이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법이 법을 제대로 작동시켜서 오류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매일매일 발생하는 문제들,
채우지 못한 욕구와 좌절당한 욕망을
일컫는, 혹은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

우리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읽어 온 언어
하지만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언어.
그런 텍스트는 말 없는 어떤 언어에 속한다.

삶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는
이름이 없는데, 이는 우리의 어휘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외로운 별,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고아들끼리의 공모를 제한한다. 우리는 서로 윙크를 나누고, 위계를 거부한다. 모든 위계를.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세계를 무시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는 당돌하다. 우주의 별들 중 절반 이상이 그 어떤 성운에도 속하지 않는 외톨이 별이다. 모든 성운을 다 합친 것보다 그 별들이 내는 빛이 더 많은 셈이다. 내가 독자들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방식 역시 그럴 것이다. 마치 여러분들도 고아인 거처럼 말이다(p27)

Charlie Chaplin

채플린의 익살이 지닌 에너지는 반복적이고 점점 커진다. 매번 넘어질 때마다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일어난다. 같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인 어떤 사람.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비밀은 그 복수성이다. 그 복수성은 그의 희망이 반복적으로 산산조각 나는 일에 익숙해진 후에도 여전히 다음 희망을 놓치지 않을 수 있게 해주었다. 반복해서 굴욕을 당하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반격할 때조차도 평심을 잃지 않는다. 그런 평정심이 그를 무적의 존재로, 거의 불멸의 존재로 보이게 한다. 희망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사건들 틈에서 그 불멸성을 감지한 우리는, 웃음으로 그 '알아봄'을 인정한다.(p37)

후회 없는 삶이란, 늘 눈을 열어 놓고 예상치 못한 자연의 신비를 마주하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들이 서로 말을 걸고 있는 것, 자신의 곤경에 대해 떠드는 건 시간 낭비다. 해안선, 체리 밭,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 펼쳐진 산맥, 옹이가 진 포도나무 가지, 친구의 얼굴.... 자신의 후견인이 되어 자신의 작품 소재가 되어주었다. (p 44)
 
나는 구름을 지켜보며, 눈으로 그 넘실거리는 모양을 기록한다. 그때 풍경이 보여 주는 확신이 변한다. 변화를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그 변화는 분명해지고, 내가 받는 확신도 더 깊어진다. 하얀 새털구름의 털들이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물 위에 떠있는 한 남자를 바라본다. 이젠 내가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바라본다.(p57)

실제 하는 몸을 취하지 않는 노래는 시간과 공간 속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노래는 과거의 경험을 전한다. 하지만 그것이 불리고 있는 동안 노래는 현재를 채운다. 이야기도 같은 작용을 한다. 하지만 노래에는 노래만의 또 다른 차원이 있다. 노래는 현재를 채우는 동시에 미래의 어딘가에 있는 청자의 귀에 닿기를 희망한다. 노래는 앞으로 다가간다. 이런 끈질긴 희망이 없다면 노래는 존재할 수 없는 거라고 나는 믿는다.(p73)

시간은 선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삶은 하나의 선 위에 찍힌 점이 아니다. 우리는 선 위의 점이 아니라, 원의 중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원에는 우리들을 위해 남겨 둔 증언들이 있고,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텍스트들이 있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 우리가 목격한 것들을 보며 버텨 온 우리는 아직 상상할 수 없는 환경에 저항하고, 계속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우리는 연대 안에서 기다리는 법을 배울 것이다. p109-110




마무리


요즘 뭔가 꽉 막힌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어요. 바라던 데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물거품처럼 곧 사라질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이럴 때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되는 건지 좀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식견이 저에겐 없었습니다. 존 버거의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는 제가 듣고 싶었던 조언 집 같았어요. 그러다 보니 다 옮겨 적은 글이 많아졌어요.

잘못된 점을 말하고 싶은데 제겐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말들이 없었어요. 앞선 세대는 제가 이제야 알아챈 것들을 이미 많이 생각하고 결론을 도출했다는 점에서 정말로 눈물겹게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걸 예견이라도 했듯이 말이에요... 존 버거가 예술을 통해서.. 그림과 노래와 시 등 그것들로 전해지는 어떤 에너지, 공통된 생각들 이어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그것이 가진 힘이 어떤 것이었나 느껴봤어요...

말도 안 되는 일은 계속해서 덮쳐올 테고, 그것을 무마할 힘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선 위의 찍힌 점이 아니라 원의 중심이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어요. 언제나 선위의 점은 지워지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측면에서 볼 생각은 왜 못했을까요?

정치를 논하면서 절망하고, 굴복하면서도 계속 투쟁의 연속으로 이어가야만 한다면 괴로울것 같아요. 이번만큼 그 투쟁이 얼마나 가슴아픈일인지 알게되었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데 조금이라도 느슨해진다면 다시 독버섯같이 숨어서 자라나겠지요. 정치를 논하지도 않으면서 살아가는 자본가와 그 대리인들이 일말의 양심을 가지길 희망합니다.

                   



존버거

존버거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는 작가의 노년에 쓴 글이라 여러가지로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쓴 글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여러번 다시 화두를 되새김질하고 다시 치유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듯했다. 우리가 겪을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지켜보고 이해하고 풀어가야할지 알려주려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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