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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Sep 12. 2018

누구보다 더 파스칼 키냐르....

샹탈  라페르데메종은 프랑스 아르투아 대학의 불문학과 교수로 현대문학에 나타난 정신분석학의 영향 및 언어, 신체, 춤 등의 주제를 다룬 논문과 저작을 다수 발표하였고, 자아적 글쓰기, 픽션의 경계, 독서 행위의 시간성 및 실재성, 읽기와 쓰기의 교수법 등 현대문학의 주요 논점을 연구해왔다. 파스칼 키냐르 학회에서도 다수의 글을 발표해왔다.

<파스칼 키냐르의 말>은 2000년 겨울, 보르도 인근에서 진행된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인 <Pascal Quignard le solitaire : Rencontre avec Chantal Lapeyre-Desmaison>(Galilee, 2006)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샹탈은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은 고독의 도취와 그 순간에 대한 음미로 가득하다. 고독은 시간을 제외시켜버린 것만 같은 순간이다. 그는 뒤로 물러난다. 그것은 아마도 뛰어난 평정심과 자제심으로, 고독이 깊어가는 정원의 끝자락에서, 재회의 기쁨을 누리며, 다른 모든 것은 거부한 채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간 상태일 게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고독을 선언하고, 질의하며, 문제 삼는다. 모든 관계를 끊을 수도 있고, 스스로 고립될 수도 있다. 키냐르의 작품은 닿을 수 없는 곳에, 도달 영역 밖에 있겠다는 맹세다. '

<파스칼 키냐르의 말> 서문 중


샹탈 라페르데메종Chantal Lapeyre-Desmaison (가운데 선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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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탈  라페르데메종)
비가 퍼부어지고 나서도 남아 있는 것.
글쓰기란,
곧 써가면서 자신에게 새겨진 만물의 모든 서명을 드러내고,
그 '인상'을 재생하는 일이다.
세계가 나를 만들었다면 바로 이래서다.
내가 세계와 대면할 때 어떻게 세계가 날 소묘하는가?
세계가 날 소묘한다면 바로 이렇게다.
물론 완전히 그것을 지각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비탈과 모래에, 더 나아가 돌위에 파인 도랑은 하나의 방향을 갖는다 해도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결국 땅을 향한다 해도 도랑의 본질적 성격을 표현하면서 의미에서 주체를 캐내는 것이다.


새의 등이 날개 속에 유폐되어 있듯
인간의 영혼은 언어 속에 유폐되어 있다.


미셸 드기Michel Deguy 프랑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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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연구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텍스트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형상을 긁어 올리려는 것이다.
'드라이포인트'를 하듯 대담하게,
아주 재빨리
 '초상화'를 새기듯.

그의 다양다종의 글에서 불쑥 떠오르는 것은
하나의 중심이라기보다
하나의 얼굴인지 모른다.

- 미셸 드기 『파스칼 키냐르』 -




p.s 부드럽고 따뜻한 그것은 자유로운 그것에 온전히 갇혀있다. 영혼, 언어, 유폐.....



Pascal Quign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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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냐르는 파편적 글쓰기 형식에 매료되었다.
" 마치 바로크 음악의 조곡처럼 혹은 장조와 단조의 이질적 배합 방식처럼 서로 충돌하는 논리를 연결하면서, 질문은 늘 열려 있고 답은 전혀 없는 글을 쓰고 싶었다" 고 밝힌다. - <소론petits traites> : 1977~1980년 쓰고, 1991년 총 8권으로 펴낸 저작물 -

키냐르는 어떤 장르도 필요하지 않다.
그의 파편적인 글쓰기는 작품의 불연속성을 제안하는 것이고, 흰 여백 사이에 매혹의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이는 모든 고독한 사색과 독백에 아주 잘 어울린다.

작품, 독백의 예술이 펼쳐지는 곳, 혼자가 되기 위해 말을 한다. <침묵 서약>에서 키냐르가 제시하는 정의에 따르면, 글쓰기만이 침묵의 '말'로, 전체성 속에서도 단독성을 발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취를 그리기 때문이다.



'수다를 떨다'와 글을 쓰다' 사이의 내밀하고 현기증 나는, 근본적인 공모

- 파스칼 키냐르 <델리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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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 소설에 관한 이해

https://roh222.blog.me/220474341471


http://roh222.blog.me/220556788751





새의 등이 날개 속에 유폐되어 있듯
인간의 영혼은 언어 속에 유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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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굴루투스singlutus라는 단어의 주변을 몽상하다 단어를 굴절시킨다.
이 단어는 혼자seul라는 뜻이면서 오열sanglot이라는 뜻이다.
항상 지독히도 혼자인 데서 비롯된 절망,
혹은 절대 혼자일 수 없다는 절망.

키냐르 작품이 가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인물들이 매순간 고독을 갈망한다는 것이다. 파편적 글쓰기, 파편은 대답 없는 자의 공간이므로 곧 홀로 있는 자의 공간과 같다. (홀로 말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세계의 목소리에 전염 되는 이런 선택은 결국 역설이다.)

파편은 독백의 장소다.
독백이라는 단어를 타자를 고갈시키고 타자에 의해 스스로 고갈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결국 독자의 작품이라고 이해한다면....
고독자는 아마 다른 데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고독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고독자는 자기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책장들의 조용한 도란거림으로부터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고독을 원하는 그는 고독이라는 단어만을 발견한다.



사랑은 혼자 있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연인들은 " 영혼 대 영혼 "으로 마주할 따름이다. 사랑은 혼자가 아닌 고독의 형태다. 고독 속에 있으나 혼자는 아니다. - <로마의 테라스> 몸므 -



https://roh222.blog.me/220386770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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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냐르 작품 속에서 독자의 위상
책은 독자의 비밀스러운 공동체이자 꿈이다.
독서란 곧 금욕의 예술이다.
글쓰기는 다른 자로 향하는 긴장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은자가 되는 이중적 운동이다.

http://roh222.blog.me/220618398460




훌리아 문학방



http://blog.naver.com/roh222



파스칼 키냐르 매거진


https://brunch.co.kr/magazine/pascalquign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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