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훌리아 Nov 20. 2019

내 마음 그 깊은 곳.. 글우물에서 다디단 그것을 뜨다

기억의 울림을 글로 옮기다.

블로그에 글을 남기다

습작시를 쓰기 시작했다

다시 시작되는 공부, 잘할 수 있을까?

나의 글을 쓰다. 나의 삶을 살아내다.




훗날 내가 쓴 글 다시 볼 때,


블로그가 생기면서 기록이란 것을 쉽게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냥 끄적끄적 써대고 누가 읽든 상관없이 포스팅했습니다. 문장은 없고 대화체뿐인 메모글, 수업시간  암기용 글, 시도 때도 없는 늘어진 감정들, 인생의 질문은 쉴 새 없고, 때때로 권태롭고, 나태하고, 흥미 없음으로 점철된 그런 허영에 가득 찬 저의 20대 중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에게도 진심이 조금 섞인 무심하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10년 하고 그 절반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말이 그냥 하는 허튼소리만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네가 바랐던 게 그거였니? 나는 참 바보구나... 지금에서야 너를(나를) 안 것 같아' 그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혼자서 웅얼댄 작은 소리가 툭툭.. 연이어 끊임없이 여기저기 흘렸나 봅니다. 저는 여전히 제 가슴 깊은 곳에서 방향 없이 제멋대로 흩어지곤 하니깐요


블로그 공개설정을 이어오다가 지난 글들을 비공개 전환을 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문학리뷰 블로그를 완성해가면서 예전 저의 글들을 찾아 읽으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저의 자격지심이었을 겁니다) 너무도 다른 저의 모습에 어떤 실망을 가지셨나봅니다. 저에 대한 판타지가 있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왠지 들키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보지 말고 제가 빠져든 작품의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고 빠져들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습작시를 쓰다.


처음 끄적여 쓴 습작시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블로그 포스팅 목록을 거슬러 다다른 곳의 제목은 '비참'이었습니다. 아.. 나는 무엇에 그토록 비참해했을까? 참 안되었단 생각을 했습니다.  여전히 제가 비참하기만 하지 않으니 그런 절 저는 잊고 살았을 테지요. 그런 끄적였던 글을 다시 읽고 기억은 일부 재생되기도 합니다만 그때의 비참은 희미해졌을 뿐이니 괜찮았습니다. 저에게 역량이란 것이 무럭무럭 자라나 있거든요.. 가슴 한 폭 판이 묵직하고 웬만큼의 충격으론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아픔이 줄어들었을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슬픔조차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무해한 상태로 접어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8년부터 어설픈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것을 습작시라고 부를 수 조차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띄엄띄엄 쓰고 처음으로 '습작시'라고 써붙였던 시기가 2014년이었습니다. 그렇게 써오길 1년 후쯤엔 습작시라고 써붙이지 않고, '나만의 시'라고 생각하고 포스팅하기 시작했습니다.


시詩가 어떻게 시가 되는지는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면 내 생각이  쑤~욱 빠져서 완성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진실하지 못한 시'이기도 했습니다. 매일 시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시詩는 어느 순간 제가 메였던 실타래를 풀어 하나의 옷을 찾아 입는 듯했습니다.


제가 쓴 습작시를 읽어봐 달라고 했을 때 한결같이 하는 말이 '너무 꾸미려 하지 마~'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것을 잘 모르겠지만, 덜 꾸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본 것이 있다면 이 글을 통해 그려질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시가 점점 자연스럽게 찾아들어가는 느낌을 느끼곤 합니다.


여전히 시의 규율이라면 모르는 시詩를 쓰고 있지만, 그런대로 저는 만족하며 습작시를 써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를 만들면 그만큼 제 속에 무언가가 해결된 느낌을 갖거든요. 하지만 더 잘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이번에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어서 두근거리고 있습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poetry






다시 시작하는 공부 잘할 수 있을까?


회사생활 16년 차, 제2의 인생을 시작해야 될 때입니다. 제2의 인생을 준비하기엔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선택이 무의미해질까 두렵기도 합니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움켜잡는 방법을 갖고 싶었습니다 아마 그중의 한 방법이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은 성공을 목표로 자기 계발을 합니다. 미래엔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해, 계속 벌어질 수 있기만 해도 다행이야. 하면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를 생각합니다. 더 계산적인걸 배워야 하는데 내가 글을 배워서 되겠어? 저는 그것을 두고 저울질을 했습니다. 현실적인 고민이었습니다.


글을 조금 더 보고, 글을 조금 더 써서 네가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야? 묻는다면 저는 대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도 모른 채 시작하고 있거든요. 특별히 뭘 해보고자 하는 것보다는 몰입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정된 구간, 정해진 틀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습니다.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겨본 적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과정이 낯설고 자신감이 결여돼 있습니다.


저만의 이야기는 드디어 한 발짝 띄었을 뿐입니다. 시간에 쫓기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여전히 시간의 추격을 받고 통제되고 제단 되곤 맙니다. 저는 주변을 돌아보는 것조차 소홀할 정도로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되곤 했습니다. 극심한 자기 학대와 우울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표 나게 드러내진 않지만 주변이  조금씩 부서진다는 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잘 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처음을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모든 게 다 그것을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숨 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루가 차곡차곡 쌓여질 좋은 토양이 깔린 나의  정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글을 쓰다.  나의 삶을 살아내다.


글은 오롯이 저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숨 쉬게 합니다. 말은 서툴지만 글은 저를 기다려 줍니다. 제가 한참을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떠돌다 불쑥 나타나더라도 기꺼이 받아네 줍니다. 독서에서 글쓰기로 오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책은 책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혼자 걷는 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책을 따라가기 바빴습니다. 함께 걷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몇 번의 산등성이를 넘고 나니 조금 더 높은 산이 조금 먼 길이 내다 보였을 뿐입니다. 혼자서 묵묵히 걷는 것만이 전부라 여겼던 생각도 그제야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도 혼자이지 않았더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책은  언제나 저의 생각이 의 생각으로 나올 수 있도록 보조적으로 발을 맞춰서 동행해 주었습니다.


이제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함께 풍경을 보고 걷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저의 조급한 마음으로 잠시 접어두고 있지만 다시금 한 호흡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이제는 어떤 동행이 가능한지 가늠할 제간이 생겨나 독서계획에 여유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빨리 걷고 싶을 땐 잠시 책을 내려놓고 본업에 충실하기도 하고, 집중하지 못할 땐 책을 들어 정신을 가다듬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 내가 다 알 수 없으므로....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찾아서 읽되 성급히 읽어나가지 않고 되새김질하면서 내 것으로... 내 길로... 이끌어 오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집을 집는 것과 같고 집을 짓는 것은 살아갈 곳이고 곧 삶 그 자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발자취, 글 자취를 남길지 저에 대해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의 기대를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한때라도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던 이라면 꼭 다시금 사랑할 수 있는 때가 돌아오길 바랍니다. 저도 조금씩 찾고 있고, 사랑하는 마음을 아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이 모든 과정을 받아들이고 나아가려 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