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로 1시간 넘게 달려가야 하는 성산항의 모습에 기대하고 설레었다.아침부터바람이 거셌지만 공기의 청량함에 또 한 번 매료되고 말았다. 폐 속 깊숙이 숨을 들이쉬었을 때 공기가 곱고 기분이 시원해서 편안하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어디에나 공기 좋은 곳이 있겠지만 수분을 머금은 공기 같달까..기관지가 나빠진 이후로 호흡하는데 민감해졌다. 여기서는 공기가 찼음에도 기침이 나지 않아서 신기했다. 제주에 살게 된다면 공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무심결에 들었다. 거친 날 속에서 이런 생각은 안 할 테지만 우리가 온 4박 5일만큼은 날씨가 착했다.
항구의 거센 찬바람 속에서 한 뼘 햇볕의따사로운 온기에 감사했다.꽃샘추위 정도라는 코웃음은 한낮의 몇 시간뿐. 아침나절 바닷바람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칼바람이었다. 이런겨울여행을 온전히 즐길 수 있을까? 괜한 걱정이란 듯이 이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우도로 향하고 있었다. 성산항에서 우도는 지척에 있다. 제주 동부에 위치해 있고, 15분 만에 도착하는 우도는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내가 아는 유일한 뱃길은 통영 삼척항-욕지도까지 가는 뱃길이다. 제법 배를 타고 가야 하는데 나는 항상 뱃멀미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었다. 그런 어려움 없이 배를 탔다는 즐거움만 가진채 내릴 수 있어서 좋았다.
우도에서 우도봉 정상에 오르는 게 첫 번째 목표지점이었다. 차로 우도봉 입구 한 정거장 전에 모르고 내렸다. 이것은 정말 안내방송을 잘못 듣고 내린 탓이기도 한데 우리에게 정말 행운 같다고 할까? '여기가 최곤데'라는 말을 하고 운이 좋았다고 웃었다. 내가 부산에서 쉽게 자주 가는 곳이 광안리와 이기대다. 산책 삼아 운동하러 이기대 갈맺길을 봄, 가을, 초겨울까지 가곤 하는데 그 바다를 나는 무척 좋아한다. 부산 사람으로서 가장 자랑할만한 바다라고 생각한다.
이기대에서 바라보는 그 바다는 광안 다이아몬드 브릿지와 동백섬, 달맞이 고개 등이 정면으로 보인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닷바람이 부딪혀 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 바다에 평온함, 위험함도 알고 있다. 함께 살아가는 곳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풍경이기도 하다. 언제나 거기 있다는 사실에 기쁘고,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속이 트이는 기분이랄까. 욕지도에 가면서도 여기가 제주 같은데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진짜 제주는 좀 더 스케일이 컸다. 내가 알던 제주는 조금 Small 했다면 실제로 본 제주는 Large였다.
우도봉을 향하기 전
제주에 간다면 그럼 우도에 가서
땅콩아이스크림 먹겠죠?
여기서 우도봉까지 갈 수 있는 건가 싶었지만 길이 막혀있어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우도봉을 중심으로 반대편이 검멀레 해변으로 우도봉의 또 다른 절경을 볼 수 있지만 이 쪽과는 또 다른 맛이다. 여기는 사유지인지 펜션이 도열해있다. 특별히 진입하지 않으면 지나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풍경이 좋아서였는지 오후의 한 낮 시간이 되어서인지 추운 줄 모르게 여기서 한 참을 서성이다 발걸음을 떼었다. 여기서 우도봉까지 간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며...
'제주에 간다면 그럼 우도에 가서 땅콩아이스크림 먹겠죠?'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는데... 좀 먹쩍게도 땅콩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잠시 숨 돌리고 정돈하고 다시 우도봉으로 출발했다. 우도봉 입구에서 우도 등대 정상까지 단숨에 걸어올랐다. 내려올 때 한 모녀께서 우리에게 '우도봉 갈만합니까?'라고 물었다. 힘든데 굳이 힘들여 올라갈만한 곳인지 묻는 거였다. 나는 우도에서 우도봉이 가장 좋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달랐을까? 우리는 가장 높은 우도등대 추천하고 둘러내려 오시라 추천했다.
우도봉 언덕은 갈대는 아니지만 빛이 바랜 긴 풀이 바람결대로 그림 그리듯이 눕혀져 있었다. 구름 걷힌 맑은 날이어서 고마웠다. 땀이 나고 식기를 반복했다. 싫지 않은 땀이었다. 우도등대를 찍고 둘러 내려오는 수풀 사이 샛길을 발견하고 헤쳐 걸어 내려왔다. 발길 닿은 흔적이 꼭 길이 있는 듯했다. 그렇지만 여기가 길이요~라고 또렷이 적혀있는 길은 아니었다. 걸어가면서 이게 길이 분명하겠지 조금 의심하기는 했다. 하지만 다시 탁 트인 우도봉 둘렛 길이 시야에 보이기 시작해서 안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상 복귀가 너무 빨라서 여행이 거짓말 같다고 여겨질 정도다. 여운을 느낄 시간을 내가 갖지 못한다는 게 지금 가장 많이 아쉬운 것 같다. 고작 여기 내 감정을 남기는 일이 전부가 될 텐데 싶다가도 고작이라고 하기엔 또 특별한 것도 같고 내 마음이 중요할 텐데도 내 마음이 아쉽다고 말하는 듯했다. 여운을 다 잃어버리기라도 할 듯 나는 하루하루 틈틈이 기록하고 있다. 요즘은 기억력에 자신이 없어지고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기록하고 싶어졌다.
우도봉 등대로 가는 길
노오란유채꽃을 만났다.
'너 아직도 피어 있었니?'
우도봉에서 내려와 검멀레 해변까지는 걷기로 했다.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거리라고 생각했지만 솔직하게 자신 없어하는 내가 있었다. 걷고 싶은데 걷는데 괜찮을까? 하는 의심과 의문을 달았다. 왜 자신 없어할까? 나는 5월부터 지금까지 하루 5000보 이상 걷기를 실천하고 있고, 오르막을 겸해서 걸었고, 스쿼트를 했고, 주말마다 1만보에서 2만보까지도 거뜬히 걷고 다음날 문제없었음을 확인했었다. 나름 체력에 문제없음을 자신하다가도 자신 없어지곤 했다.
우리는 제주여행 2일 차 2만 5 천보, 3일 차 3만 보를 찍었다. 나는 2일 차 종아리에 파스 2 어장을 붙였고, 3일 차에는 근육이완제를 먹고 잠들었다. 나의 다음 제주여행 목표는 한라산 백록담을 가는 것이다. 그때까지 체력을 좀 더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왕복 7-8시간을 거뜬히 걸을 수 있는 체력을 키우는 게 목표다. 아직은 왕복 4-5시간이 고작인 듯해서 부족한 것 같다. 마흔둘에서 앞으로 남은 나날들은 결코 나약해지고 싶지 않다. 더 단단해지고 싶다.
검멀레 해변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작고 노란 꽃, 아니 노오란 유채꽃을 만났다. '너 아직도 피어 있었니?' 제주에서 유채꽃을 보다니 '나는 제주를 다 보았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랗고 파란, 꽃과 하늘을 보았으니 다 이뤘다는 생각이 들었다. 풀어진 운동화 끈을 다시 고쳐 메고서 걷기 시작하다가 돌하르방을 만났다. 화산 폭발로 이뤄진 제주에 유독 많은 현무암으로 만든 '돌 할아버지'다. 제주 하면 생각나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제주를 돌아다니면서 몇 가지 눈에 띄는 기념품들이 있었다.
부산사람으로서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운대, 갈매기, 롯데 자이언츠, 돼지국밥, 동래파전만 생각나는 건 나뿐인가? 귤 모자마저도 부러웠다. 부끄럽지만 현지에서만 할 수 있는 관광객의 용기가 있는데.. 제주에서 부산으로 돌아갔을 때 그 소홀했던 작은 격차가 느껴져서 같은 바다와 관광지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에서 바가지 씌었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 그런 것부터 시정되어야 할 듯하다. 부전 시장은 동문 시장처럼 큰데 관광객 중 거길 가볼 생각을 하긴 할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아직도 피어있는 너는 유채꽃.
검멀레 해변에 도착해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차량을 타고 남은 우도를 둘러보고 우도를 떠났다. 우도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시 내려서 걷기보다는 우도를 떠나는 편을 택했다. 우도에 숙박하는 사람만 차량을 배에 싣고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자전거나 바이크를 타고 우도를 둘러볼 수 있으니 날이 좋으면 그렇게 해보는 것도 추천하고 싶다.
부산사람이 바다 보고 감흥하기란 쉽지 않다. 바다는 언제나 곁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이상하지 않고, 그래서 자주 보러 가지 않아도 우정이 변하지 않는다는 설이 있다. 내가 하는 우스갯소리다. 아무튼 바다에 설렜다기보다는 내가 여기에 온 것에 설레었고, 두 발로 걷고 있어서 좋았고, 좋은 공기 마실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 시간 자주 갖고 싶지만 왜 매번 여의치 않는지 모르겠다. 내년부터는 자주자주 특별한 시간을 갖고 싶다.
우도를 놓아두고 돌아오는 길
저 멀리 우도를 놓아두고 돌아가는 길이다. 우도에 다시 찾아올 날이 있을까? 삼척항에서 욕지도 갈 때 다시 갈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십몇 년이 지나고서 다시 가게 되었는데 정말 새로웠다. 욕지도에는 펜션이 가득 찼고, 내가 알던 욕지도가 더 이상 아니었다. 기분은 새로웠지만 다시 찾아올지는 정말 미지수가 되었다. 요즘에 드는 생각은 '다시 되찾는 날이 올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고 있어서 가속페달을 놓았는데 속절없이 내리막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기분이다. 밤이 되면 특히나 더하다. 너무 졸리고, 자고 나면 아침이고 그리고 다시 저녁이다. 이 삶이 당연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너무 중요한 내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글이라도 쓴다면 그중 나은 삶인가 보다 생각하게 된다.
나는 지금 제주를 붙잡고, 시간을 붙잡고,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나 나에게서 기억을 뽑아내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글을 계속해서 쓰이고 있어 신기한 중이다. 나는 월요일부터 이미 일상으로 복귀를 선언했고, 이틀 동안 정말 뒷골이 뻐근해진 참이었다. 그래서 제주는 점점 잊힌 건가 싶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까 싶어서 이런 무감각함에 익숙해질까 봐 다소 초조해진 참이었다.
왼쪽 사진은 우도, 오른쪽 사진은 성산일출봉이다.
제주 바람은 이렇게 크고 거세구나
성산항에 내려 올레길로 접어들어 성산일출봉까지 걸었다. 오후 2시 넘어 해가 조금씩 서편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4시 전후로 정상에서 내려오는 게 계획이었다. 한낮의 제주는 13도쯤 되었다. 아침부터 바람이 거셌는데 오후가 되어서도 여전히 바람은 거셌다. 제주 바람은 이렇게 크고 거세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부산은 바다와 근접하지 않은 곳은 오히려 낙동강 강바람이 아주 매섭다. 강바람과 바닷바람이 한 껏 성을 부리면 얄짤이 없다. 제주 바람은 일상인 바람이라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우도에서도 저 성산일출봉이 보였었다. 그 방향으로도 사진을 찍었는데 여기에 도착하고 보니 우도가 보여서 반가웠다. 아마도 이렇게 먼 곳에 우도를 보려면 또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도도 좋았고, 성산일출봉도 좋았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요금을 내고 진입해야 한다. 멀리서 보았을 땐 정상으로 가는 길 보이지 않아서 갈 수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중턱까지만 보고 내려온다면 아쉬울 텐데라고 생각하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멈춰버린 숙박시설이 보였다. 성수기에나 운영하는지 인적 하나 없는 폐가처럼 느껴졌다. 여름이면 이곳이 가득 메워졌을까. 솔직히 나는 사람이 많으면 부담스러워하는 편이다. 사람이 없는 지금이 생각하면서 걸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계절마다 제주를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산일출봉 정상에 도달하면 숨이 턱까지 밀어붙인다. 결코 쉽지 않은 정상이었다. 가파르고... 좀 많이 가팔랐다. 중간중간 쉬어가길 여러 번, 정상에서 성산일출봉을 내려다보면 커다란 분화구가 있다. 마그마가 물속에서 분출하면서 만들어졌고 바다 근처의 퇴적층이 해류에 의해 침식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제주 본토와 떨어졌었지만 도로가 생기면서 완벽하게 연결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이 장관이라고 한다. 일출은 아니지만 일몰을 기대하며 올랐다.
성산일출봉 오르는 길, 정상 분화구 모습
성산일출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찰칵
제주에 대한 환상은
어떤 거였냐면,
해가 지기 전에 모든 일정을 마치기로 했다. 성산일출봉에서 일몰이 있기 전에 하산했다. 일몰을 이동 중에 맞았다. 차에서 잠시나마 체력을 회복하고 동문 시장으로 갔다. 전날 찾지 못한 남해 횟집을 찾았고, 우리는 방어를 아주 맛있게 먹었다. 숙소에서 그날 경비를 정리하고, 다음날 일정을 살폈다. 다음날은 오늘보다 이른 시간에 출발하여야 했다.
여행이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도 되었고 기뻤다. 제주에 대한 환상은 어떤 거였냐면 실제로 제주를 본다면 이건 좀 달라하는 어떤 것이었다. 상상만으로는 이뤄지는 것이 아닌 실제여야지만 알 수 있는 것들, 아마 오늘 내가 본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사실 우도와 성산일출봉은 여행사에서도 빠지지 않는 곳이고, 제주 여행 책자에도 버젓이 나와있는 것들 중 하나다. 여행지를 고민했지만 여길 빼고 다른 곳을 둘러본다는 건 아무래도 좀 아쉬운 일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다음에 한라산 백록담을 목표로 다시 제주를 찾는 다면 서귀포시에 숙소를 잡고 서부를 돌고 한라산 정상을 가기로 했다. 이번 여행은 동부로 한정지 었다. 한 방향으로 한 곳, 한 걸음만 하는 것으로 했다. 2일 차와 3일 차로 아마 계획했던 제주 여행은 마쳤고, 4일 차는 여유 있게 돌다 기념품을 사고 숙소로 돌아와 일찍 쉬는 것이었다.
빨래는 집에 가서 하자는 건 좋지 않은 결정이었다. 부산으로 돌아오고 캐리어 정리하고 빨래하느라 너무 고역이었다. 충분히 숙소 내 WASH ROOM이 무료였고, 최신 건조기(23KG, 3대)까지 있었는데! 16KG 세탁기가 3대나 있었는데! 왜 하지 않겠다고 미뤘는지 후회했다. 다음부터는 빨래는 현지에 그때그때 하기로 했다. 그날 밤 전날 추웠던 관계로 난방은 32도로 맞췄다. 밤새 땀 흘리며 몸을 풀었다. 적당한 온도 30도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