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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Oct 02. 2015

무의미의 축제-밀란 쿤데라의 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무의미를 들이마셔 봐요...

                                                                                                

밀란 쿤데라_무의미의 축제 La fete de l'insignifiance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를 읽다 보면 생각의 흐름, 의식하고 집중하고 서로 부딪히고 흩어진다. 처음 몇십 페이지를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었다. 그리고 중반까지 읽고 나니 두꺼운 책을 펼쳐 읽은 기분이 들었다. 몇 장 읽고 덮은 후 눈을 감았다. 바다를 내려다 보다 아찔한 기분에 눈을 떴다. 이 책은 겉으로 얇지만 그 속은 한없이 깊은 책이었다.    


친절한 설명 없이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알랭, 라몽, 샤를, 칼리방 이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 생김새는 어떤지 그것들은 읽다 보면 차차 느낄 뿐이다. 그들의 의식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그들이 맞닥드린 상황 속에서 또는 자신의 상상 속에서 집중하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알랭이 여성의 배꼽을 의식하고 어머니를 떠올리고 그녀와 나누는(상상)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재독 해야 할 책, 아니 밀란 쿤데라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알아가야 할 것 같다....


                                                                                                  

[알랭은 친구들에게]
"스탈린이 왜 그 유명한 칸드의 도시에가 칼리닌이란 이름을 붙였는가, (중간 생략) 칼리닌에게 특별한 정이 있었다는 것. 스탈린의 평판에 어울리지 않지, 세기의 악마야, 알아, 그의 삶은 온통 음모와 배신과 전쟁, 투옥, 암살, 학살로 가득했어. (중간 생략) 그는  고통받는 자신의 동지를 바라보면서  자기 속에서 희미하고 겸허한, 거의 알지 못했던, 하여간 다 잊어버린 어떤 감정, 그러니깐  고통받는 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좀 놀랐지. 그의 거친 삶에서 그 순간은 휴식과 같았어. 칼라닌의 방광에서 소변의 압력이 높아지는 것과 같은 템포로 스탈린의 마음속에서 애정이 점점 커져 갔어." [p41-42]


[알랭]
그는 늘 육십 년쯤 일찍 태어났다면 예술가가 되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중간 생략)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런데 자신이 무슨 일을 좋아하는지 알기는 하는 걸까?) 밥벌이를 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는 학업을 마친 후, 자신의 독창성이나 생각, 재능이 아니라 다만 지능, 즉 산술적을 측량 가능한 능력, 각 개인들에게서 오로지 양적으로만 구분되는, 어떤 이는 더 있고 어떤 이는 덜 있는, 알랭은 더 가지고 있는 편인 그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직업을 선택했고, 그리하여 월급을 많이 받았으며 때때로 아르마냐크 브랜디를 살 수 있었다. [p82]


[라몽]
"샤를하고 너는, 사교계 칵테일 파티에서 불쌍하게 속물들 시중이나 드는 동안 좀 재미있게 해 보려고 웃기는 파키스탄 말을 만들어 냈어. 뭔가 신비하게 만드는 즐거움이 너희에게 보호막이 돼 주었을 거야. 하긴 그게 우리 모두의 작전이기도 했지.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하지만 내 눈에는 우리 장난이 힘을 잃었다는 게 보인다. 너는 기를 쓰고 파키스탄어를 해서 흥을 돋우려 하고 있어. 그래 봐야 안돼. 너는 피곤하고 지겹기만 할 뿐이야."[p96]


[알랭, 어머니 목소리]
"네가 해 준 이야기, 네가 지어낸 이야기가 나는 다 좋고, 더 덧붙일 게 없구나.

배꼽이 없는 여자의 전형이 너에게는 천사지. 나한테는 하와, 최초의 여자란다. 하와는 배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한순간의 기분, 창조자의 기분에서 태어났어. 최초의 탯줄은 바로 그녀의 음부, 배꼽 없는 여자의 음부에서 나온 거야. 성경에 나온 말대로라면 거기서 다른 줄들도 나왔어, 줄 끄트머리마다 작은 남자나 여자를 매달고서. 남자들의 몸은 연속성을 지니지 못한 채 전혀 소용이 없었는데, 여자들의 성기에서는 저마다 끄트머리에 다른 여자나 남자가 달린 다른 줄이 나왔고, 이 모든 게 수백 번 수천 번 반복돼서 거대한 나무, 무한히 많은 몸들로 이루어진 나무, 가지가 하늘에 닿는 나무로 변했단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나무가 자그마한 여자 하나, 최초의 여자, 배꼽 없는 저 가여운 하와의 음부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렴."[p103-104]

"솔직히 말할게. 누군가를, 태어나게 해 달라고 하지도 않은 누군가를 세상에 내보낸다는 게 나한테는 늘 끔찍해 보였다 (중간 생략) 네 주위를 둘러보렴. 저기 보이는 사람들 중에 그 누구도 자기 의지로 여기 있는 건 아니란다. 물론 지금 내가 한 말은 진리 중에 제일 진부한 진리야. 너무 진부하고 기본적인 거여서 이제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귀 기울이지도 않을 정도지."[p132]


[알랭, 배꼽 그리고 사랑]
"예전에 사랑은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였고, 유일한 것, 그 어떤 반복도 허용하지 않는 것의 영예였어. 그런데 배꼽은 단지 반복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반복을 불러.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천년 안에서, 배꼽의 징후 아래 살아갈 거야. 이 징후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 배 가운데, 단 하나의 의미, 단 하나의 목표, 모든 에로틱한 욕망의 유일한 미래만을 나타내는 배 가운데 조그맣게 난 똑같은 구멍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섹스의 전사들인 거라고."[p138-139]


[라몽, 무의미의 축제]
"다르델로,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죠. (중간 생략)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바로 당신 입으로, 완벽한, 그리고 전혀 쓸모없는 공연..... 이유도 모른 채 까르르 웃는 아이들...... 아름답지 않나요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들이마셔 봐요. 다르델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무의미를 들이마셔 봐요, 그것은 지혜의 열쇠이고, 좋은 기분의 열쇠이며...."[p14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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