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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Jul 09. 2016

밀란 쿤데라 <커튼>_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에세이


삶은 짧고 독서는 길고 문학은 자멸하는 중이다.
예술의 역사는 덧없지만 예술의 지저귐은 영원하다.

- 밀란 쿤데라 -




커튼 / 저자 밀란 쿤데라


소설은 예술이다.
개척자는 증명의 표시로 신해석의 <커튼>을 찢어 버렸다.



<커튼> 4~7부



사회 현상의 실존적 영향력이 미약한 초창기에 가장 날카롭게 인지된다. 타락의 초기에만 타락을 참을 수 없다고 느낀다. 일상적이 되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현실이 비난을 넘어 부끄러움 없이 반복되다 결국 입을 다물어버린다. 개척자(소설가)는신해석의 커튼에 수놓인 진실들을 그대로 베끼지 않는다. 용기 있게 그 커튼을 찢는다.



# 슈티프터 <늦여름>와 카프카 <소송>,<성> / 소설의 그 깊은 의미.....

19세기 오스트리아 작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는 제일 처음 관료주의의 실존적 의미를 발견한 사람(쿤데라의 말에 의하면)이다. 그의 <늦여름, 1857>은 청년 하이리히와 한 저택의 노귀족 리자흐의 우정을 그린다. 리자흐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모습 속에 향유되는 삶을 바란다. 그는 관료주의를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상황 그 자체가 요구하는 것' 지키곤 했던 그가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없었는지를 설명할 뿐이었다. 인간과 현대세계와의 결별, 목가적 분위에 적합한 평화롭고도 근본적인 결별을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도 관료주의를 피할 길이 없다. 우리는 슈티프터의 세상에서 카프카의 세상으로 결정적으로 옮겨왔다. 카프카는 평화로운 마을과 성의 세계에 사무실과 관리들의 군대와 서류 사태를 침입시킨다. 반관료적 목가의 신성한 상징을 관료화의 전적인 승리로 만들었다. 내 인생의 관리자들 내가 할 일을 도맡아 처리하여준다. 파업이 일어나도 K에게 사과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행정은 예의범절 저 너머에 있다.

자유는 무한하지만 그만큼 무력하다. 사생활을 보호해 주는 비밀 따위는 없고 우리는 더 이상 비밀 요구조차 않는다. 사생활은 더 이상 사적이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사람 대 사람의 대립이 아니라 사람 대 행정으로써 대립된다.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다.  소송은 길어지고 삶은 갑작스레 끝이 난다. 자신의 의지 없이 무관하게 모험에 이르렀다. 행정의 실수, 기계의 오류, 예측 불가의 결과뿐이다.



# 노년의 자유


가소가 늙는 때가 온다. 무리에게 버려지고, 그사이 다른 노선을 취한 회화의 역사에서도 버려진 채 혼자가 된다. 그는 별 유감없이 쾌락주의적 기쁨을 누리며 자기 예술로 채워진 집에 머무른다. 오직 자기에게만 속한, 모방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상에서 가능한 모든 방향에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젊음의 자유와 노년의 자유는 서로 만나지 않는 대륙이다.
젊은이는 무리에 강하고 노인은 고독에 강하다.

저녁의 자유가 불어넣어 주는 영감을 받아 다시 한 번
자기 스타일을 바꾸고 스스로에 대해
만들어 냈던 이미지를 버린다.

자유의 그 <즐거운 면책>을 만끽한다.
저녁의 자유의 작품은 기적이며 섬이다.




# 소설, 기억, 망각


망각은 잠시도 쉬지 않고 책을 읽는 와중에도 끼어든다. 책장을 넘기면서도 읽은 부분을 그새 잊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독서로 얻은 몇몇 기억의 파편들로 각자 아주 다른 두 권을 만들어 버리고 만다. 작가는 결말 부분에 소설을 집필하며 느낀 것을 불러오지만 독자는 어떤 기억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곧장 잊어버린다. 소설가는 잊힐 수 없는 파괴되지 않는 견고한 성을 만들어 갈 것이다.



# 연속성에 대한 인식


모든 소설들이 공유하고 있는 역사는 소설끼리 다양한 상호 관계를 맺는다. 소설의 의미는 명확해지고 그 명성은 유지되고 망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스턴, 디드로, 곰브로비치, 벤쿠라, 그라스, 가다, 푸엔테스, 가르시아 마르케스, 키스, 고이티솔로, 샤무아조, 루슈디가 프랑스와 라블레의 광기들을 반향 시키지 않았다면 라블레의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예술 작품들은 그 역사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면 훌륭한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쇼데를로드 라클로 <위험한 관계, 1782>→ 제임스 조이스<율리시스, 1922>→ 헤르만 브로흐 <몽유병자들,1929~1932>→ 윌리엄 포크너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1930>→ 작가? <우리의 땅, 1975>→ 살만 루슈디 <악마의 시, 1991>








<마무리>


앞서 <배신당한 유언들>보다 <커튼>은 좀 더 포괄적인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커튼>을 읽고 <배신당한 유언들>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쿤데라의 에세이는 여기서 끝인 줄 알았는데 <만남>이란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아직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책을 마저 읽고서 카프카의 책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쿤데라 덕분에 알게 된 생소한 작가들이 참 많았다. 수확 중에 수확이었고 작가의 역량이라 할만한 점은 소설의 연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 소설의 계보를 읊을 때마다 어리둥절하지만 그렇구나 이해하게 된다. 소설의 발전이 눈부시게 이룩된 걸 보면 그동안 문학을 읽지 못한 시간들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시간마저 소중하게 여겨야겠지만...

다 읽을 수 없겠지만 구경은 실컷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독자는 독서하는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고유한 독자가 된다.
독자가 책이 말하는 것을 자기 자신 안에서 인정하는 일은
진실과 대면하는 것이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






<커튼> 1,2부
http://roh222.blog.me/220730917826



<커튼> 3부
http://roh222.blog.me/220737865241






<함께 보면 좋을 책>
밀란 쿤데라 에세이 : <소설의 기술>, <배신당한 유언들>, <커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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