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밤도 오지 않는다. 어떤 날도 밝지 않는다.
서툴고 불안정하지만....
다시 돌아올 새들은 떠날 때를 잘도 안다. 계절의 시간에 맞춰서, 태어난 곳을 떠나서 하늘에 찍어놓은 길을 따라 떠났다가 다시 거슬러 온다. 하늘에 점점이 박혀서 유유히 흘러가는 새들이 희미 하게 사라졌다.. 나에게는 그 시간이 언제쯤 오는 것일까.... 의미없이 둘러본 교실과 반아이들은 평화롭다. 무리 없을 생활이 그려졌다. 아무런 준비 없이 이 곳으로 왔을 때 Jack 삼촌은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야 Daddy의 부재 받아들였다. Jane과 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Jack은 설명해 주지 않았다. 아니 Jane는... 내 앞의 어떤 진실이 가로막혀 있는 기분이 든다.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지금에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찬바람이 틈 사이로 스민다. 온기 없이 걷는다. 보이는 저 끝과 내 끝을 가늠했다. 단숨에 넘어버렸으면... 막연한 형태로 나를 짓누른다. 운동장 한복판을 지날 때 동급생 저희들끼리는 희희덕 거리며 하교 중이다. 텅 빈 눈을 들어 아이들을 보았다. 그중 한 녀석은 붉은 머리의 Nigel이다. 전학 와서 그 녀석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심각하게 냄새가 났다. 불쾌했지만 내색하는 게 더 귀찮았다. 그 녀석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상하게도 싫은 녀석은 아니었다. 짓궂은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Nigel은 내 시큰둥한 표정을 보았는지 그냥 지나치지 않고 멈춰 섰다.
"Tom, 내일 보자!."
시답잖은 인사냐는 표정을 보내주고 말았다. 껄렁한 뒷모습으로 손을 흔든다.. 누구든 어디든 똑같은 거니깐.. 녀석이 내 친구가 되어도..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한 것이 없다. 절정을 맛 볼 기회가 앞으로 나에게 남아있다. 쉽게 진저리 치고 말.... 질문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괴로움이다. 끊어버리고 싶은...
더딘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대기는 젖은 잎사귀처럼 눅눅하고 바닥에 달라붙어 냉기가 돌았다. 겨울이 당겨져 올 것만 같다. Mark가 떠올라 그가 읽던 책을 찾으러 마을 도서관으로 갔다. 그 녀석 책장엔 이름 모를 작가들의 책이 빼곡하게 꽂혀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책은 찰스 디킨스 <어려운 시절>을 손쉽게 찾아 읽었다.
찰스 디킨스 <어려운 시절>...
1850년대 영국의 공업도시 코크타운, 공리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원 그 래드그라인드의 딸 루이자와 아들 톰은 아버지의 엄격한 원칙에 따라 모범적인 학생으로 길러진다. 그들의 인생은 이상적인 이념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전개된다. 상상과 애정을 억압당한 채 자란 루이자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본가인 바운더비와 애정 없는 결혼을 하고, 아들 톰은 누나 덕분에 바운더비의 은행에서 일하게 되지만 방탕한 생활에 빠져 도박빚을 갚기 위해 은행의 돈을 훔치기에 이른다. 그들의 운명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곡마단 소녀 씨씨 주프, 궁지에 몰린 성실한 노동자 스티븐 블랙풀과 엇갈리며 변화하는데...
내 이름과 같은 Tom.. 의원의 아들 Tom은 모범적인 학생으로 길러지지만 인생의 이상적인 이념과 거리가 먼 방향으로 삶이 뒤틀린다. 방탕한 생활에 빠진 Tom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날 밤 난 다른 생각을 쫓기 위해 밤새도록 읽었다. Mark는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내 것이었으면 하는 생각 따윈 없었다. 그저 다름을 받아들였다. 거울 앞에 선 나약하기 그지없는 이 얼굴, 이 어깨, 가늘기만 한 팔목... 비틀고 싶어 진다. 누군가가 나를 보면 그런 충동을 일으켜고 싶어 질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까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갑자기 불행으로 변해버린 응시 속에서 우리는 무력하게 기다릴 뿐이다.
삶을 변경하기란 절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Jack 삼촌과 Jane이 걱정 어린 시선으로 볼 때면 나의 이런 마음을 삼킨다. 물어올 테지만 그 어떤 것도 말하고 싶지 않다. 이곳으로 오기 전 Ann과 작별이 못내 아쉽다. 아쉬움이다.
처음 Ann을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Jane과 집 앞에서 퐁고와 퍼디를 데리고 나와 놀고 있을 때였다. 옆 집에 살고 있는 Jane의 반 친구 Louis가 자전거를 타고 막 집 앞을 지나려다 우리를 발견하곤 함께 놀자고 했었다. 퐁고와 퍼디를 보더니 자신의 여동생이 좋아할 것이라며 부탁했었다. Louis의 집으로 들어가는데 맛있는 스파게티 냄새가 났다.
늦은 아침을 먹었는데도 다시 배가 고플 것만 같았다. 주방에서 Louis의 mommy이 우리를 아주 반갑게 맞이해줘서 너무 기뻤던 생각이 난다. 웃음소리가 크고 맑았다. 얼굴도 몸집도 동글동글한 푸근한 인상을 주었다. 난 엄마는 다 저렇구나 라고 생각했다. Louis의 mommy 뒤에 바짝 붙어서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서있는 게 Ann이었다. Ann은 빨간 볼에 빨간 리본띠를 머리에 하고 있어서 한눈에 쏙 들어왔다.
수줍음이 많아 선 듯 인사를 못하고 뒤에 서있었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불쑥 먼저 말을 꺼냈었다. 내가 생각해도 그땐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그날 Ann과 난 퐁고과 퍼디를 사이에 두고 거실에서 놀았다. 나는 여동생을 대하듯 페럿을 길들이는 방법이나 습성 등을 이야기해 주었다. Ann은 아무 말없이 옆에 앉아 뭘 알아듣는진 몰라도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는 더욱 열성적으로 설명하던 기억이 난다. Jane은 몰랐겠지만 Ann과 난 집 앞에서 자주 만나 함께 근처의 상점이나 공원, 놀이터, 숲의 주변을 돌아다녔다. 오랜 시간 밖에 있으면 Ann의 mommy이 걱정할 거란 생각에 우린 항상 시간을 확인하고 오랜 시간 밖에 머물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우린 특별한 계획을 세웠다. 우리 둘 다 먼곳을 돌아보고 오자는 거였다. 우리에게 특별한 일이었다. 우리만의 비밀이었던 샘이다. 그날은 다른 날보다 일찍 만났다. 우린 가방에 간식과 물병을 따로 챙겼고 모자도 썼다. 완벽한 준비라고 생각했다. 산 아래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걷다 보면 큰길이 나오고 강 근처로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Ann은 수다스럽지가 않아서 좋았다. 항상 웃는 얼굴도 좋았다. 나를 좋아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Ann은 말 한마디 행동하나 가 아주 귀여웠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노란 멜빵바지에 무릎 양말에 운동화를 맞춤으로 신고서 기분 좋게 웃으며 함께 걸었다. 험한 길은 아니어서 어렵지 않게 큰길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큰 도로가 나왔을 때 잠시 정신이 어리둥절해졌고 갑자기 식은 땀이 났지만 나는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Ann의 손의 잡고 큰길을 쏜살같이 내달렸다. Ann도 숨을 몰아쉬었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우리는 더 아랫길을 걷기 시작했다. 매미 울음소리에 귀가 멀어져갔다.
벌써 큰 강이 내려다 보였지만 아무리 걸어내려 가도 가까워 지진 않았다. 머뭇거렸지만 한참을 더 걸었다. 큰 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에 불어왔다. 그제야 곤두선 신경을 내려놓고 우리는 강 가까이 다가가 큰 바위 위에 올라섰다. 물살이 반짝거렸다. 서로 물병을 찾아 물을 마셨다. Ann은 두리번두리번 거리 더니 뒤편을 가리키며 가자고 손짓을 한다. 그늘 아래라며 앉아서 쉬자고 했다. 거기서 가져온 간식을 나눠먹었다. 앉아있는 풀밭 아래로 개미떼가 줄지어 지나는 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갔다.
올 때 보다 발걸음이 무거워졌고 힘이 빠졌다. Ann의 옆 얼굴을 보니 힘이 빠진 모양인지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걱정이 되어서 내가 좀 더 힘을 내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뒤에서 쿵-하고 소리가 나 돌아보니 Ann이 바닥에 손을 짚고 넘어져 있었다. 얼른 뛰어가 무릎을 털어주었다.
"괜찮아? 아파?"
"미안해"
"뭐가 미안해?"
"그냥"
미안할 일이 없는데도 자꾸만 미안하다고 해서 그만 속상해졌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고 기분 좋은 날인데... 아무튼 난 그 뒤로 Ann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또 넘어지면 곤란할 것만 같았다. 집까지 잘 도착했다.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날 밤 잠들기 전까지 그날 일을 꼽씹어 보았다. 아주 여러 번... 다음엔 더 잘 계획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Ann을 더 잘 살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Ann의 생각을 오래도록 한 것 같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런 저런 기억을 더듬다 집에 거의 다다를 무렵 집 앞에 누군가가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무의식 중에 동네 아이겠지 생각하고 지나치려 했다. 그 이름 모를 아이가 내 이름을 불러 세웠다.
"T-O-M!"
얼떨결에 뒤돌아보았지만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 그 아이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뒤돌아본 순간... 나는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 바로 Ann이 서 있었다. 순간 너무 멍하고 소리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서있었다. 헛것을 본 건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Ann은 분명히 내 앞에 서있다. 나는 기쁜 건지 놀란 건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 변한 모습을 확인했다. Ann은 서서히 다가왔다. 반갑게 나를 보고 웃었다. 나는 정말 기쁜 게 분명하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우리는 단 한번만 사랑한다.
이 단 한 번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그것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