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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아 Oct 30. 2015

남자의 자리-아니 에르노

아버지

매번 그 나이 때 그 장소를 떠올린다.


아침에서 저녁까지 씨름해야 하는 젖소들, 10월의 차디찬 부슬비, 압착기 쪽으로 기울여 사과를 쏟아붓는 통들, 커다란 삽으로 똥을 긁어모으는 닭장, 무더위와 갈증·······. 하지만 또 주현절의 갈레트 빵, 베르모 연감, 군밤, <마르디 그라야 가지 마라, 우리가 크레페를 구워 줄게>, 병에 든 사과주 밀짚으로 바람을 넣어 터트리는 개구리·······. 이런 예는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으리라. 언제나 변함없이 돌아오는 계절들, 소박한 즐거움들, 들판의 고요함 등등·······. 그러나 아버지는 남의 땅에서 일했으므로 그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고 <어머니-대지의 장엄함> 같은 신화들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p31-32


강변의 작은 뜰에서 찍은 사진 한 장. 소매를 걷어 올린 흰 셔츠, 아마도 플란넬 소재인 듯한 바지, 축 늘어진 어깨, 구부정한 두 팔. 불만스런 표정. 아마도 포즈를 제대로 취하기도 전에 사진이 찍혔기 때문이리라. 그는 마흔 살이다. 사진 속에는 그가 겪은 불행, 혹은 그가 품고 있는 기대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은 전혀 없다. 단지 약간 나온 배, 관자놀이께 가 희끗희끗 헤져 가는 검은 머리칼 등, 세월의 명확한 흔적들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보다 은밀하게 숨어 있는 사회적 조건의 표지들.  몸통으로부터 헤벌어져 있는 팔들, 그리고 소시민적인 취향이라면 사진의 배경으로는 선택하지 않을 화장실과 세탁실·······. p49


아버지는 단순하거나 하찮은 사람들의 범주, 혹은 순박한 사람들의 범주로 분류됐다. 그는 더 이상 내게 자기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다. 나 역시 더 이상 그에게 내 공부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중략> 내가 결국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아니 어쩌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늘 품고 있었다. p88-89


난 당시 사귀던 정치학 전공 남학생을 집에 데리고 왔다. 한 집안에 들어올 수 있는 권리를 승인해 주는 엄숙한 의식이 행해졌다. <중략> 아버지는 이 젊음이를 맞이하기 위해 넥타이를 매고, 작업복 바지를 벗고  일요일에 입는 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 내 미래의 남편을 자신의 아들로 여길 수 있다고, 교육 수준의 차이를 뛰어넘어 그와 남자끼리의 은밀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자신의 정원이며 자기 혼자 힘으로 지은 차고 등을 보여 주었다. 자신의 딸을 사랑하는 이 청년이 자신의 가치도 인정해 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자신의 할 수 있는 것을 선물로 준 것이었다. p106


어머니는 아이를 과자 담긴 커다란 유리 병들 앞으로 데려갔다. 아버지는 정원으로 데려가 딸기를 구경시켜 주었고, 그다음엔 토끼와 오리도 보여 주었다. <중략> 우리 넷은 창에 붙인 테이블에, 아이는 내 무릎에 앉혀서, 둘러앉아 먹었다. 그렇게 함께 보낸 어느 차분하고도 아름다운 저녁 시간 그것은 구원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그는 나를 자전거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곤 했다. 빗속에서도 땡볕 속에서도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작가 아니 에르노는 이 글을 쓸 때 사치스러운 삶이 주는 느낌, 비현실감, 울고 싶은 심정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그의 삶을 되돌아 본다. 그녀는 꾸밈없이 담담하게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더욱 슬펐다. 읽으면서 난 나의 어버지를 떠올렸다.


아니 에르노의 책을 읽고 나도 아버지에 대해 뭔가 글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좀 더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에르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By 훌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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