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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가지 Dec 13. 2022

31. K-장녀입니다.

아, 일상퀘스트를 진행 중입니다.

아, 일상퀘스트를 진행 중입니다. -노가지


31. K-장녀입니다. 






'능력 되면 혼자 살아.' 엄마는 그 말을 밥먹듯이 했다. 주변에서 '승희는 남자 친구 없어?', '연애 안 해?'라고 물을 때마다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얘는 관심 없어. 결혼도 안 한대.' 하며 앞서서 말을 잘라냈다. 자라오는 내내, 성인이 될 때까지도 나는 엄마에게서 그런 말을 계속 들으며 살아왔다.


“결혼은 무슨 결혼, 능력 있으면 혼자 사는 게 제일이야”


늘 그랬다. 그래서 당연히 능력을 키워서 혼자 사는 게,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게 이뤄야 하는 최고의 인생가치관이라 생각했다. 애 없이 자유롭게. 누구의 구속도 없이 편하게. 내가 스물 후반에 접어들어 연애를 하면서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어도 엄마는 강요하듯 주변에, 내가 들으라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승희는 연애 생각이 없는 애야, 얘는 진짜 결혼 생각도 없어."


어릴 적엔 그 말이 당연한 것인 줄만 알았다. 매일 듣는 엄마의 말처럼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크고 나니 '왜 자꾸 나를 엄마의 가치관 속에 가두려고 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닌데, 나 그렇지 않은데. 그건 엄마 생각이지"


다만 아이 생각이 없을 뿐이었다. 지난 20여 년 간 들어오던 혼자 살라는 이야기에서 결혼 생각을 갖게 된 것도 나름의 큰 변화라고 생각했다. 절대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나 자신을 둘러싼 유리벽이 깨진 느낌이었다. 어릴 적부터 결혼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그 어떠한 것도 궁금하지 않았고 여느 친구들처럼 딱히 로망이 있다거나 꿈에 그리는 결혼식 같은 것도 없었다. 지금도 '도장만 찍고 살면 그게 결혼이지 뭐' 하는 정도의 사고를 할 뿐이다. 그럼에도 결혼에 관심을 두는 나의 변화가 친구들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던 낯설고 신기한 일로 현실에 벌어진 것처럼 받아들였다. 


능력 되면 혼자 살라던 엄마는 언젠가부터는 ‘그래도 자식 하나는 있어야지’ 하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 주변 친구들의 자녀가 이제 혼례를 올리는 것을 넘어 손자 손녀를 보기 시작하면서였다. ‘능력 있으면 혼자 살아’를 반복하던 엄마의 입에서 어느 날 이런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그래도 여자로 태어났는데 애는 하나 낳아야지."


그날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과 동시에 대단한 배신감을 경험한 날이 됐다. 이제껏 내게 강요하던 당신의 가치관이 이제는 180도로 바뀌어 '여자로 태어났으면' 하는 꼰대 같은 말이 되었다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단번에 '자기 마음대로구나' 하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다. 자식을 키우는 데 있어서 부모교육이 왜 중요한지 알 것 같은 순간이었다. '엄마도 엄마가 서툴러서 그렇겠지만'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갔지만 ‘이건 분명한 가스 라이팅이야’라고 명확히 느낀 날이었다.'나는 더 이상 이 굴레에 갇혀 있지 말아야지' 하며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걸 생각하니 '키울 능력이 있으면 딸보다 아들 하나 키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역시도 그간 강요받았던 '엄마의 가치관은 아닐까?' 하는 경계심이 먼저 들어 스스로 주춤하게 되었다. 


K-장녀, 맏이라는 이름으로 부모를 실망시킬 수 없단 책임감에 묶여 사는 존재.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 없는 외식 자리에서 ‘맛있는 걸 나만 먹는다’ 라거나 ‘좋은 곳에 함께 여행 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답답해하면서도 나 역시도 경험해본 일이기에 공감이 갔다. 


스무 살 초반, 모아 놓은 아르바이트비로 한의원에서 보약 두 달 치를 지어온 나를 보며 엄마가 했던 말이 지금도 가슴에 남아있다. 


"보약도 지어다 먹고, 팔자 좋네"


참 많이 삐뚠 말이었다. 왜 그런 이야기를 내게 했는지 지금도 솔직히 이해가 가진 않는다. 아마 엄마는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냐'며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챙기지 않는다는 서운함이었을까, 그 시기에 느낀 괜한 투덜거림이었을까. 뭐가 됐든 지난 30여 년 간 책임감, 부담감, 성실함, 그 모든 부담을 떠안고 살아온 내가 이제는 장녀라는 껍데기를 벗고 정말 나를 위해 살아가야지 마음을 먹는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걱정을 한다. 

자식 키우느냐고 늙고 마른 노쇠한 부모를 이렇게 등지면, 그럼 이제 누가 그들을 돌볼까. 장녀는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일찍부터 독립을 해 나 가사는 남동생이 걱정하는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내버려 둬. 내버려 두면 내버려 두는 대로 또 다 돌아가. 누나가 나서서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거 아니고 두 번 다시 안 생길 문제도 아니야. 해결하는 방법도 이젠 엄마 아빠 둘이서 찾아야 하는 거야. 자꾸 끼어들어서 애쓰지 말고 이젠 누나 일이나 신경 쓰면서 살아.” 


처음엔 ‘나가 산다고 저 새끼 남 얘기하듯 하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보니 정말 내가 일일이 걱정하고 마음 썩지 않아도 흘러가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장녀라는 이름으로 책임감 속에 가둔 건 실은 나 자신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K-장녀의 이름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식구들을 대하고 있다. 


분명 사랑하는 가족이지만 평생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우리 넷 모두가 아니라 

아빠, 엄마 당신 두 분이라는 걸 분명히 하고 있다. 


K-장녀는 이제야, 이렇게.

이만한 심리적 독립을 이뤄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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