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에서 내려 집에 도착한 후 욕조에 물을 받고 몸을 담근다. 눈 속에 누군가 모래 한 줌을 집어넣은 듯 눈을 깜박일 때마다 껄끄럽다. 몸의 마디마디가 저마다 문제가 생긴 듯 비명을 지른다. 통증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몸에서 비롯된 것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곧 졸음이 몰려온다. 이대로 물속에 잠겨 영 잠들고 싶은 기분이다. 어머니의 자궁에 다시 환원된 태아처럼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아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시작한다 해도 별스럽게 많은 것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그것이 나이므로.
출근해서 조회 시간에 출결을 챙긴다. 이류가 결석이고, 보호자에게서 아직 결석 사유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정말 내키지 않지만, 이것은 일이다, 나를 단속하며 이한에게 전화를 건다. 예상외로 이한이 빠르게 응답한다.
“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사무적인 말투다.
“류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나도 사무적으로 이한에게 묻는다.
“정신이 없어 일찍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난밤에 류가 사고로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많이 다쳤나요?”
“다리 골절 수술을 받으면 4주 정도 입원할 것 같습니다.”
“나이스 학부모 서비스에서 결석 신고서를 제출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한의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넘어 흐른다.
“한아, 류가 수술을 받으면…”
바람이 만들어낸 문풍지 소리처럼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련해지며 이한이 전화를 끊는다.
누군가의 목소리, ‘밤의 문장’에서 넘겨 들었던 목소리다,라고 생각한다, 어리석게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확실하지 않은 짐작으로 내 기분을 나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생각을 멈춘다. 이한은 왜 내게 존대어를 사용했을까? 친근감이 전혀 없는 건조한, 선을 긋는 그의 말투가 내내 마음을 헤집는다.
류의 사고로 한동안 이한은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동안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한다. 오늘 저녁에는 용림과 만나기로 했고 그러다 보면 또 다른 곳에 정신이 옮겨갈 것이다.
용림은 두 면이 창으로 둘러진 2층의 이자카야에서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다. 창문을 몇 개 열어둔 덕에 실내의 공기는 서늘하고 신선하다. 연보라 원피스를 입고 있는 통통한 용림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나를 반긴다. 아직 밝음이 남아 있는 이때, 기분 좋은 낮술을 마실 수 있는 가게다.
용림은 오코노미야키와 간바레 오또상을 이미 잔과 함께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그 모양이 귀여워 나는 방긋 웃는다.
맞은편에 앉자마자 용림은 내 잔에 간바레 오또상을 따르며 말한다.
“이 간바레 오또상은 정작 본토에서 그리 인기가 없어. 원래 이름은 간바레 토짱! 오또상, 오또짱, 토짱이 모두 아버지를 부르는 단어인데 오또상은 아버지, 오또짱은 아빠, 토짱은 아빵 정도의 느낌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용림과 잔을 들어 맞대었다 뗀 후 한 번에 마신다. 사케가 마른 목을 타고 위로 흘러 들어간다. 갑자기 속에서 울컥 우울감이 치민다. 사케가 위를 채울수록 나는 이렇게 넘실대는 우울감을 억제하며 등 뒤로 숨겨야 할 것이다.
용림이 오코노미야키를 먹기 좋게 갈라 내 앞접시에 놓아주며 묻는다.
“무슨 일이야, 너. 담아 두지 말고 말해, 너를 위해서.”
내가 오코노미야키를 입에 넣고 기분 좋게 웃으며 말한다.
“음~ 오코노미야키는 정말 맛있어!”
“예전에 자취할 때 비만 오면 김치전 부쳐달라고 하더니, 오코노미야키도 전은 전이지. 좋아하는 것만 파먹는 것도 좋은 게 아니여. 몸과 마음 생각해서 좋은 것만 따라다니지 말고 다른 것들에게도 관심을 둬.”
“또 시작이네, 잔소리.” 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이놈아, 어떻게 사람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냐?”
“네, 엄마. 알겠어요!”
“너 혹시 아직도 그 첫사랑 때문에 그러는겨?”
“케이가, 아니 케이를 만났어, 그때.”
“그때? 만났어? 첫사랑, 그 케이?”
“우리 반 류라는 애가 있어. 그런데 그 애 형이 케이더라고.”
“진짜? 인연은 인연 인가 벼.” 내 눈치를 힐끗 보는 용림.
“어제 처음 만났는데 모텔에 갔어.”
“뭐?” 용림의 작은 꼬막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게 극한으로 확대된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뭐가 아녀?” 용림이 채근하듯 묻는다.
“유부녀 용림아! 네가 기대하는 그런 게 아니라 아주 미안하다만, 이케이가 이한으로 개명했어. 요즘 개명 흔하지만 어쩐지 케이의 개명은 사연이 있어 보여. 그 얘기를 좀 들을까 해서 같이 모텔이 갔었지.”
“그렇다고 남녀가 모텔에 갔어?”
“아니, 그렇다고 우리 집에 데리고 갈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냥 간 거야, 거기.”
“심안이 너는 생각이 있냐, 없냐? 중학교 친구긴 하지만 십 년도 넘어서 갑자기 만나서 거길 가믄 어뜩해?” 용림의 꼬막 눈이 가로로 길게 늘어지더니 흰자위를 넓게 펼쳐 나를 째려보더니 말을 잇는다.
“어떤 사람일 줄 알고 거길 같이 가냐고, 증말 내가 못 산다, 못살아.”
용림의 말투는 우리 엄마하고 비슷하다. 뭐랄까, 나나 내 친구들이 사용하지 않는 부모세대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한다. 그래서 잔소리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분이 덜 풀린 사람 모양 용림이 계속 말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같이 있으면서 첫사랑 사연 듣고, 그러다 나에게 전화를 건 이유가 뭐여. 뭔 일 난 줄 알았다니껜.”
“테이블에 앉아서 이런 저 얘길 했어. 그런데 이한의 사연은 뚜껑을 열기도 전에 전화를 받고 가버렸어.”
“뭐라고? 모텔에 너만 두고 갔다고? 내가 너에게 듣기론 좋은 사람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아니었나?”
“이한이 같이 나가자고는 했는데 이상하게 고집이 생기는 거야. 걔 마음 편하게 해 주기 싫었달까? 심술이 나더라고. 결국 심술 때문에 내가 상당히 우울해지고 말았지만.”
“그랬네, 안이 네가 우울해져서 나에게 그 새벽에 전화를 걸었던 거였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우울해졌어. 이한이 가고 테이블 앞에 한참 앉아 있다가 어깨가 선득하니 기분이 이상해지길래 침대에 누웠는데 이불이, 용림이 자취방 이불처럼 바스락 거렸어. 그 촉감과 뽀송함 때문에 울뻔했지. 결국 너에게 전화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사랑하는 우리 용림에게 전화하고 너의 잠든 숨소리를 들으며 울었어. 울다가 집에 돌아갔지.”
“안이 너는 왜 자꾸 울고 그래. 나 속상해.” 용림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진다.
나는 용림의 어릴 적 시골 생활을 용림에게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용림에 비하면 나는 이렇다 할 고생담이 없다. 공무원의 자식들이 그렇듯 나는 소박하고 안정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나의 아버지는 용림의 아버지처럼 술을 마시고 어느 자식을 지속적으로 학대하지도 않았으니까. 용림의 아버지는 용림이 ‘지 애미 닮았다’는 이유로 평소 구타는 물론 학교도 보내지 않으려 가방이나 책을 불태웠다. 용림은 고통스러운 어릴 적 기억을 되새기지 않기 위해 지우려 애썼다. 아무리 애써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이, 다른 형제들과의 차별과 가방이나 책을 불태웠던 모습이라 했다. 가방과 책이 없어서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 선생님이 다시 책을 구해주셨고 끈 달린 손가방에 넣고 다녔다고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용림은 공부를 잘했다. 대학을 진학할 때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고, 용림은 너무 화가 나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수 천 번 죽였다고 했다. 용림은 대학 졸업까지 아르바이트로 월세와 생활비를 충당했고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전액 면제를 받았다.
용림의 학교 앞 자취방에 그녀의 아버지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들으려 한 것은 아니지만 들리던 소리로 미루어 용림에게 돈을 달라고 했던 것 같다. 용림은 다시는 오지 말라며 제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주어 아버지를 보냈다. 용림의 아버지는 시골로 돌아가는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다 우회전하는 차량에 깔려 세상을 떠났다. 용림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보랏빛 소름이 돋은 얼굴로 이런 말을 했다.
“마음이 거지 같어. 내 마음이 아버지의 뭉개진 얼굴처럼 사납다. 꼴 보기 싫던 부모가 늙어 가엾어지기 시작하면 또 다른 마음고생이 있다고 하드니 이건 또 무슨 조화 속인지 모르겄어. 아버지가 불쌍해. 불쌍해 죽겄어.”
그런 용림이 내 눈물에 저도 따라 울 때면 나는 깊이 죄책감이 들곤 한다. 도저히 현생에서는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진다. 용림이 추가로 주문한, 갓 튀긴 가지튀김 안주를 씹으며 사케를 내 잔에 따르더니 혼잣말 하듯 속삭인다.
“토짱, 카짱, 아리가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