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가르며 나아가는 자
"산옥아..."
아버지는 다정히 나를 부른 뒤, 뚝뚜둑 마른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무릎을 접어 쪼그리고 가만히 앉았다. 업히라는 의미였다. 나는 폴짝 뛰어 아버지의 등에 얼굴을 묻었고 아버지는 나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단단히 받쳐 잡은 후 딱딱 소리를 내며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아버지는 그렇게 나를 업은 채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을 만큼의 속도로 걷고 또 걸었다. 아버지의 숨소리와 흐릿한 술냄새, 귀를 스쳐가는 바람소리와 들판의 계분 냄새, 오른쪽과 왼쪽으로 일렁이던 몸의 흔들림, 눈을 감고 느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아버지는 가끔 나를 불렀다.
"아가..."
아버지는 부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이 또 한참을 걸었다.
그날은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 저녁이었다. 저녁밥을 먹으려는데 아버지가 마당 한가운데 쪼그려 앉은 채 나를 불렀다. 나는 신을 신고 아버지의 등에 업혔고 뒤에서 할머니가 언짢은 듯 나무랐다.
"애기 밥 먹게 둬. 뭐하는 짓이여."
아버지는 소리 없이 웃으며 나를 업고 일어섰다.
"산옥아, 손 넣어."
나는 아버지 등과 내 배 사이에 양손을 모아 넣은 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오른쪽 볼을 아버지의 등에 단단히 붙여 놓은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나를 업고 동네 입구까지 걸었다. 마을 앞을 가로지르며 산업도로가 생겼다.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향하는 아스팔트 도로에 비하면 우리 동네는 낡았고 허름하며 운명의 수레바퀴에 갇혀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도로가 나오자 아버지는 다시 몸을 돌려 집 쪽을 향해 걸었다. 마을 초입 첫 번째 집 커다란 창에 어린 노랗고 따뜻한 불빛을 바라보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봉자네 집이야. 봉자는 누나의 자식이지만 남이나 다름없다. 여기 이사 와서 동네 사람들이 텃세를 부렸는데 봉자도 한편이었어. 누나를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되지만 누나가 낳은 자식도 아니니까 멀리하며 살기로 했지. 하지만 언제나 이곳을 지날 때 마음이 좋지 않아. 가족이란 그런 것이지."
마을로 난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성급하게 휘어진 길을 따라 방향을 바꾸며 걷다 아버지가 발을 헛디뎠고 길가로 밀어 쌓아놓은 눈에 발이 빠졌다. 등에 업힌 나를 추스른 뒤 다리의 눈을 털어 내려고 쿵쿵 굴렀다. 그곳을 지나쳐 계속 걸음을 떼었다.
"동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곳에 옛날엔 웅덩이가 있었대. 원래는 동네 공동 우물이었다는데 땅 주인이 그 땅을 논으로 만들었고 우물은 망가진채 방치되었어. 방치된 우물은 시간이 지나자 웅덩이가 되었는데 처음엔 개나 염소가 빠져 죽곤 했대. 그러다 술 취한 이 씨가 밤에 발을 헛디뎌 빠져 죽었고, 얼마 후 자전거를 타고 가던 장 씨 막내아들이 빠져 죽었는가 하면 장 씨의 아내가 이어 자살을 한 곳이기도 해. 그런 일이 있고서 우물을 채워 막았대. 나는 이곳에서 죽은 사람들을 보았어. 그런데 산옥아, 너를 업고 있으면 그들이 말을 걸지 않아. 슬픈 얼굴로 저만큼 서서 나를 보고 있어. 저들에게 표정이란 게 있을까 싶지만, 나는 그들을 통해 내 감정을 읽곤 해. 저들과 이어져 있음을 느끼거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느낄 수 없는 절절한 무엇인가가 있어. 상실감 같아. 너를 업고 이 길을 걸으며 단지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상실감을 읽어. 살아서도 인간은 할 말이 많고, 하고 싶은 말이 많으며 쉬지 않고 이야기하지. 그런데 저들은 죽어서도 놓지 못한, 잃고 싶지 않은 무엇이 있어."
산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길, 이제 마을에서 만나는 마지막 집을 지나고 있었다.
"사랑이 무엇일까? 삶과 죽음은 무엇일까? 나는 지금껏 살아있는 것보다 죽은 것에 관심이 많았어. 왜냐하면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어 있는 그들이 더 많이 다가왔거든. 따라왔고, 말을 하고 싶어 했어. 그들 모두와 대화를 했던 것은 아니야. 대화를 나눌 수 있는가 하면 아닌 경우도 있었거든.
저 마지막 집이 똘마의 집이야. 동네 사람들은 똘마의 식구들을 무시하지. 무식하다고, 가난하다고. 모내기나 추수 때는 농사일을 거들어야 한다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아. 내가 똘마네 집 모내기할 때 똘마에게 물었었어. 학교 가고 싶지 않냐고, 그랬더니 학교에 가든 안 가든 어차피 똑같다고 대답했어. 똘마의 바로 위 오빠는 중학생인데 아직 한글을 못 떼었다고 하더라고. 참, 똘마가 왜 똘만지 알아? 그 집 식구들 중 가장 똑똑해서 동네 사람들이 똘마라고 불렀대. 똘마가 모내기가 한창인 때 논둑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도 똘마와 눈을 맞대고 있는 그것을 보게 되었는데 자전거 타고 가다 웅덩이에 빠져 죽은 장 씨의 막내아들이었어. 똘마는 이미 알고 있었어.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나에 대해서."
아버지는 어둠 속의 달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얼마나 더 걸을 것인지, 어디까지 갈 작정인지 우리 집에서 멀어지는 길을 택해 걸었다. 아카시아 나무의 뿌리가 드러나도록 땅을 파고 흙을 걷어내어 낸 길이었다. 여름에 이 길을 걸으면 젖은 흙의 냄새와 쌉싸름한 나무뿌리의 냄새가 엉켜 진지하고 끈질긴 여름이 느껴졌다. 겨울의 길은 여름의 것보다 신사적이고 오히려 우리 집에 가는 길보다 넓고 완만하다. 동네의 마지막 집, 똘마의 집을 지나면 가로등이 없어 어둠뿐인 길이 계속되었다.
"산옥아 너를 업고 밤길을 걸으면 특별히 나는 기분이 좋아.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거든. 살아있지 않았으면서 산척 하는 저들이 말없이 물러서서 바라보는데 이 느낌을 잘 기억하고 싶어. 원하지 않는 것들이 물러서고 나는 내가 원하는 길을 저벅저벅 걸어 나아가는 거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 나가는 거지. 사랑이 무엇일까? 인간의 사랑은 왜 하나같이 슬플까? 아니 인간은 왜 하나같이 하찮고 슬플까? 대단해도 슬플 것 같은데 너무 하찮아. 너무 하찮아서 못 보겠어. 그 하찮음 마저도 나는 견디지 못하겠어. 이런 내가 너를 업으면, 너를 업고 있으면, 너를 업고 걸으면 좀 살 것 같아. 소주를 입에 물고 있는 기분이거든."
문득 아버지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랑은 나의 행복 사랑은 나의 불행
사랑하는 내 마음은 빛과 그리고 그림자
그대 눈동자 태양처럼 빛날 때
나는 그대의 어두운 그림자
사랑은 나의 천국 사랑은 나의 지옥
사랑하는 내 마음은 빛과 그리고 그림자
그대 눈동자 태양처럼 빛날 때
나는 그대의 어두운 그림자
사랑은 나의 천국 사랑은 나의 지옥
사랑하는 내 마음은 빛과 그리고 그림자
빛과 그리고 그림자
"산옥아, 산옥아, 나는 나의 사랑을, 너의 어머니를 지키지 못할 거야."
나를 업은 아버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며 등으로 젖은 열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눈을 감은채 아래로 넣어 두었던 손을 꺼내 있는 힘껏 아버지의 팔을 둘러 잡았다. 다시 얼마간 아버지는 나를 업은 채 말없이 걸었고, 그 사이 나는 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결국 그 무엇도 지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