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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경 Sep 28. 2024

세 번째

다정하고도 차가운 박종명 선생님께

나의 특별한 나무를 베어 바닥에 눕혀두고 머리를 깎듯 솔잎이 달린 가지를 툭툭 잘라 대강 정리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특이한 울렁거림을 느끼며 점심도 거른 채 하루를 보냈고 저녁이 되어서도 딱히 식욕이 나지 않았다. 불안정한 마음이 좀처럼 잠잠해지지 않아 결국 좌식 책상에 앉아 가장 큰 서랍을 열어 편지지를 꺼낸다. 아버지와 고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을 떠올렸다. 두 사람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므로 내가 글을 쓰는 즉시 그들에게 전해질 것이다(라고 나는 믿는다). 마침내 나는 두 사람 중 선생님을 향해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제가 있는 이곳은 겨울입니다. 이가 부딪혀 딱딱거릴 만큼 추운 방에 앉아 있으려니, 선생님 모습이 떠오릅니다. 늘 추워 보이는 복장으로 교탁에 서서 언 입술 위의 각질에 침을 바르시곤 했지요.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고서 말입니다. 하얀 얼굴엔 소름이 돋아 있었고 항상 무언가 적응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 불안함에 저까지 불안해지곤 했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때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저로선 여전합니다. 저는 아직 이렇게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언제나처럼 저는 혼자이며 적어도 내적 대화를 나눌 상대가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결국 더 외롭고 평온합니다.


선생님, 제게는 특별한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오늘 서신에 그 이야기를 적으려 합니다. 이 이야기를 살아 있는 사람들은 가볍게 무시하겠지만 오히려 그곳의 선생님은 자연스럽고 익숙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고 살아 계셨더라도 진지하게 들어주셨을 듯하여 써봅니다.


이곳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입니다. 산의 많은 나무 중 특별히 그 나무는 제게 말을 걸어왔고,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존재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저는 어떤 특정한 새 한 마리와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 발성에 의한 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의 대화를 의미합니다. 아, 맞아요, 텔레파시! 텔레파시 같은 것.


선생님, 한 자리에서 그리 오래도록 시간을 보내는 나무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요? 산토끼 올가미를 볼 요량으로 산에 오르던 눈의 겨울, 고사리를 꺾기 위해 허리를 굽히던 비의 여름, 진달래를 맞기 위한 바람의 봄, 밤을 거두기 위한 낙엽의 가을에 저는 그 소나무와 함께였습니다. 나무는 눈과 비, 바람의 방향, 철새들의 움직임과 겨울을 맞이하는 동물들의 분주함을 알려주는 지혜로운 존재였고 삶 그 자체였습니다.


특별한 소나무는 어제 새벽, 숲에서 저를 불렀습니다. 그의 부름이 워낙 다급한 느낌이어서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산에 올랐습니다. 소나무는 눈을 감고 서서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가지에 조금 쌓인 눈을 흩어냈습니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뜻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올 것 같습니다. 틀림없어요. 오늘 눈이 많이 올 겁니다. 지난밤, 새가 전하는 정자나무의 말을 들었습니다. 동네에 서 있는 정자나무도 이미 많은 가지가 말랐다고 합니다. 그 정자나무는 동네 한가운데 서서 그곳에서 나고, 자라고, 죽어가는 인간들을 여러 세대에 걸쳐 지켜보았습니다. 정자나무가 새에게 말하기를, '인간의 집과 옷과 탈 것이 달라졌고, 먹을 것의 수확량 역시 달라졌다. 인간은 자신들이 만들어내고 수정을 거듭하며 이루 낸 성과들에 둘러싸여 더욱 인간다워지고 있다. 인간과 자연은 이제 확연히 구분 지어졌고, 이제 자연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이식된다. 우리는 언제나 인간을 특별히 다르게 보아주지 않고 다루지 않으며 이용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내 자신을 위한 양분을 스스로 거두기 어려워졌고 심재 역시 대부분 썩어 없어졌다. 나는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음에도 인간은 여러 이유로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나도 이제 때가 되었음을 느낍니다. 오늘 눈이 많이 올 겁니다. 내일 해가 뜨면 산에 올라 나를 베어주세요. 본연의 목적과 모습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완벽한 장작과 땔감이 되고 싶어요. 남은 뿌리에서 다시 싹이 나지 않도록 말끔히 잘 부탁드립니다."


약속대로 오늘 그 특별한 소나무를 베었습니다. 애초 그 나무가 제게 말을 걸게 된 이유이자 그의 소망이었던 그 일로 저는 오늘 산을 올랐고 마침내 그는 뜻을 이뤘습니다. 오늘이라 하여 소나무의 특이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어느 소나무보다 소나무다웠고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인간적이었습니다. 마르지 않은 소나무의 향이 제 몸에 배어들어 아직도 향을 맡을 수 있습니다. 그 소나무는 그렇게 자신의 향을 남겼고 계속해서 저는 그 냄새를 맡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기이한 일이라 할 수 있지만, 덕분에 세상의 온갖 것들과 온갖 방법으로 이별을 경험하게 되었으니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본디 산에서 나무를 키우고 또한 베며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 감흥 없이 나무를 베며 살아왔지만 이젠 전혀 다른 의미가 되었습니다. 혼란스러움에 정리가 되지 않은 모든 것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확연해질 때 나무 베기에 대해서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은 저의 특별한 나무만큼이나 참, 다정하고도 차가운 분이십니다. 학기 초 어느 날, 양동이를 들고 복도 끝에 섰을 때 선생님은 제 뒤에서 '막내야!"라며 부르셨습니다. 제가 놀라 뒤돌아보자, ”어, 너. 너는 딱 봐도 막내거든. 맞지? “, 선생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저는 외동이 입니다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선생님은 반 아이들과 섞이지 못하는 제가 신경 쓰이셨습니까? 제가 혼자 있을 때면 어김없이 기분 좋은 성가심을 느낄 수 있게 말을 걸어오곤 하셨습니다. 저는 아무에게나 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선생님께 했고 언제나 한결같이 진지하게 들어주셨죠. 당시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그 누구도 관심 없는 것에 대해 얘기할 상대가 필요했어요. 기꺼이 선생님은 그런 제게 말벗이 되어 주셨습니다. 저에게 선생님이 그러셨듯 선생님 역시 말벗이 필요하기는 매한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풍부한 감정과 표정을 저에게만은 감추지 않으셨다는 것을 압니다. 모든 인간이 삶의 무게를 감당하며 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유독 어른이면서도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많은 것에서 비겁하게 도망치려 하는 인간도 있는 법입니다. 선생님이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저는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가 그랬으므로 이미 너무나 익숙한 비겁함을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됩니다.


아버지에 이어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에 방문하신 선생님을 어머니는 황망히 맞으셨었습니다. 머리에 흰 리본을 꽂고 시체의 안색을 가진 어머니가 과일이라도 내드리겠다고 부엌으로 자리를 비우셨을 때 제가 먼저 선생님께 말을 걸었습니다. 아직 추운데 옷을 왜 그리 춥게 입고 다니시냐고 아랫목을 내어 드리며 제가 물으니 선생님은 그저 빙긋 웃더니 각질이 벗겨져 마른 채 눌러앉은 입술에 침을 바르실 뿐이었습니다. 어떤 말로 이 녀석을 위로할 것인가 궁리하며 산을 올라 외딴집까지 오셨을 테고 저는 그런 선생님을 잘 아니까 듣지 않아도 들은 것과 같은 위로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시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이 보고 싶었던, 수동적인 태도로 갈망해 온 그 세계는 어떤 건가요?”


대답 없이 선생님이 살짝 눈시울을 붉히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보통 누군가의 죽음을 위로하러 찾은 사람은 눈물마저 준비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보통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 눈물은 아마도 제 물음의 답이었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눈은 돌아가신 제 아버지의 그것과 닮았습니다, 소처럼 큰 눈에 물기가 어린 선하고 무기력한.


당신의 뒷모습 역시 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원하는 것을 만들어 가는 삶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부터 도망쳐 버리는 비겁함을 감추지 못하고 들켜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조회와 종례 지시 사항을 확인하러 교사실에 들어갈 때마다 선생님의 피부에서, 옷자락에서 맡았던 소주 냄새는 패자로서 지루한 당신 삶의 단편이자 단면에서 흐르는 피와 같았습니다. 삶에 대해 관조적인 사람은 선생님과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삽니다. 오히려 그들은 순간에 대한 순도 높은 의지와 집중, 진심으로 살아갑니다. 선생님 본인의 의지로 세상을 떠나신 후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의 삶 속에 바람직하다고 느껴지는 기본 관념들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결국 인간의 삶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소양이자 인연을 만드는 기교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기본이 되는 것들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제외되고 싶다는 의도로 읽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다정하고, 섬세하며, 지혜로우셨으므로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세상에서 제외된, 죽음 뒤편으로 도망친 사람들, 그리고 특별한 나무 한 그루.


아버지 인생의 기행과 형태 없는 폭력에 불만이 가득 찬 중학생 시절에 나의 특별한 나무와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나무의 뜻은 이랬습니다.


'우매한 자식은 부모에게 관대하지 않습니다. 매우 옹졸하며 쉽게 오해하지요. 바라는 것이 많고 책임을 지우며 자신의 모든 허물이 부모에게서 비롯된다고 믿습니다. 부모는 부모 각자의 인생에서 자식을 만나며 자신의 삶을 사는 동시에 아이를 돌봅니다.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무언가는 제대로 하는 부모가 있고 또한 두루두루 잘하는 부모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잘하는 부모와 서툰 부모 사이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을 분별하는 자가 있을 뿐 부모는 단지 부모일 뿐이지요. 부모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자식은 자신의 자식에게서도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식은 단지 자식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테니까요. 지혜로운 자식은 부모를 부모로서 존경하고 지혜로운 부모는 자식을 자식으로서 존중합니다. '


선생님, 인간이 인간을 아무 기준 없이 그 자체로서 존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인간에게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요. 나무의 뜻을 내가 행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누구보다도 평온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분별없는 세상이 오히려 사랑으로 가득한 세상보다 평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인간은 의미 속에 본질을 가두며, 늘 분별합니다. 선생님의 삶에 대한 회의와 염세적인 태도 이면에 오히려 힘이 잔뜩 들어간, 해체되지 못한 욕심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닐는지요.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던 분별에 의한 욕망의 깊고 큰 울림을 참을 수 없었던 것 아닐는지요. 저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것들이어도 늘 진심이고 싶습니다. 진심을 담아, 저와 타인을 향한 심술이나 기만 없이.


 


선생님의 선택이 삶이었다면 어땠을까, 또다시 생각합니다. 좀 더 견디셨다면 어땠을까요, 제 특별한 소나무와 아버지, 그리고 선생님이 스스로 택한 삶의 끝이 도착이었을까요, 도망이었을까요? 남김없이 다 드러낸 미소와 제어하지 않은 진솔한 언어의 흰 피부를 지닌 선생님, 저는 그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본 듯이 선연(鮮然)합니다.


 


선생님 영혼의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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