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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경 Sep 25. 2024

거룩하고 거북한 약속

1988년은 타인에 의해 죽거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여러 사람의 죽음이 TV를 통해 공유되면서 공명을 일으킨 해였다.  매체의 헤드라인으로 공유된 생경한 죽음들은 다수에 의해 잘 잊힌다. 오히려 잊히지 않는 죽음은 소소하고도 내밀한 그런 종류의 것이다. 나는 오늘 누군가를 베려고 한다. 대상이 인간은 아니지만 나와는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존재이므로 살해와 다르지 않다.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해뜨기 전에 일어나 부엌에 나가 세수를 하고 가스 불을 켠 후 물을 올린다. 김치를 자잘하게 썰어 넣고 김칫국을 끓였다. 올봄 LPG 가스레인지를 들여놓아 밥 짓고 국 끓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가스레인지가 없었다면 이 추운 겨울에 곱은 손으로 아궁이에 마른 솔잎을 넣고 불쏘시개로 불을 피워야 했을 것이다. 김칫국에 밥을 간단히 먹고 해가 오르는 모습을 보며 산에 오를 준비를 한다. 나무로 만든 지게에 연장을 챙겨 묶고 눈이 밟히는 겨울 산을 올랐다. 어제 내린 눈이 산길에 제법 쌓여 있었다. 발이 폭폭 빠지는 눈길을 주의하며 걷는다. 내 어눌한 발걸음처럼 의식 역시 신중하면서도 몹시 불안정해졌다. 무수히 다가왔다 흩어지는 생각들을 지켜본다. 생각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다 결국 오늘 베개 될 특별한 존재를 떠올리게 되어 좀 언짢다. 얼굴을 찡그리고는 근처 풍경으로 다시 의식을 옮겨 본다. 이럴 땐 허공을 향해 혼잣말을 하면 좀 낫지. 숨이 차지만 나는 흰 김을 뿜으며 소리를 내어 말해본다.


 


“나의 특별한 나무 근처에 산토끼가 자주 오가는 길이 있어. 겨울이 되면 눈에 찍힌 발자국으로 산토끼가 주로 다니는 길을 쉽게 알 수 있지. 대개 해가 바뀌어도 그 길은 바뀌지 않아. 산토끼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잡목이나 넝쿨 사이를 지나는 곳이 나오는데 바로 그곳이 올가미를 놓는 지점이야. 가느다란 철사로 올가미를 만들어 작은 넝쿨이나 나무에 단단히 고정해 두면 간혹 덫에 걸린 산토끼를 잡을 수 있지. 겨울의 들판에 농약으로 절인 콩알을 듬성듬성 뿌려두면 간혹 꿩을 잡을 수도 있어. 겨울, 산에서 먹는 산토끼 고기와 꿩고기는 더없이 훌륭한 영양식이자 별미야. 이런 걸 어디서 배웠냐면 아버지에게서 배웠어. 포획한 산짐승은 피를 빼거나 그대로 껍질을 벗기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낸 후 곧바로 날로 먹는 것과 익혀서 먹거나 버려야 하는 것을 구별해 섬세하게 떼어 내야 해. 대개의 산짐승은 비슷한 방식으로 손질해. 겨울을 나려면 무엇보다 장작을 많이 준비해 둬야 해. 겨울에는 땔감 구하기가 어렵거든. 나이가 많은 소나무는 옹이가 빡빡하고 단단해 쪼개기가 쉽지 않아. 요령 없이 힘으로만 하려다가는 장작을 눕혀서 내리치고 세워서 내리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게 될 거야. 결과는 둘 중 하난데, 포기하거나 누더기를 만들거나지. 그렇게 누더기가 된 나무는 끈기 있게 오래 탈 장작의 밑에 놓아 불쏘시개로 쓰면 되긴 해. 한 인간이 어떤 이유건 간에 누더기가 되었을 땐 그는 이미 그 무엇, 누군가의 불쏘시개가 될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돼. 장작이든 인간이든 옹이가 빡빡하고 단단한 놈은 많이 맞게 되어 있어. 물론 곁에 요령 많은 귀인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아무리 옹이가 많고 까다로운 통나무라도 몇 번의 도끼질로 깔끔하게 잘라내는 자가 세상엔 있거든. 인간도 그래. 곁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삶이 바뀌거든. 자, 이제 다 왔어. 저 앞에 노송이 바로, 오늘의 특별한 나무, 내가 벨 대상이야.”


 


‘오늘의 특별한 나무’에 도착한 나는 다시 입을 다물고 지게를 내린 후 연장이 묶여있던 끈을 풀었다. 연장은 지난밤 줄로 정성껏 갈아놓은 큰 톱 하나와 도끼, 그리고 낫이다. 도끼나 톱이 사용 목적에 따라 미묘하게 모양이 다르니 도끼가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이고 톱 역시 마찬가지다. 도끼는 날이 넓은 것을, 낫은 도톰하며 오금에서 슴베 위까지 날이 선 것을 나무 벨 때 쓴다. 나는 지형을 살핀 후 신중하게 나무가 잘려 쓰러질 낙하지점을 확인한다. 베기 적당한 곳을 어림해 자리를 잡고 서서 잠자코 나무를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대…, 산의 선배이자 아버지….”


 


나무는 예상대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나는 나무에 기대어 잠시 그의 표피에 얼굴을 갖다 댄다. 차갑고, 차가우며, 나무는 나의 온기를 빌어 잠시 얼마간 데워진다. 눈물이 날 듯한 나는 마음을 차갑게 식히며 잘 갈아 둔 톱으로 소나무의 아랫동아리를 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이 멘 나는 어렵게 소리 내어 말한다.


“안녕, 나의 나무여.”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나무여서 톱이 쉽게 움직여졌다. 톱을 당길 때마다 톱밥이 그의 쪽으로 한 줌씩 쏟아졌다. 입에 넣고 씹으면 들큼한 맛이 날 것 같은 상큼하고 시원한 향이 났다. 그는 이 소나무 향이 좋아 코를 벌름거리며 요령 있게 톱질했다.


서늘하고 메마른 겨울바람이 내 이마를 스쳐 지나갔다. 조용한 숲에 썩~ 썩~ 톱으로 나무 베는 소리가 스며들었다. 아름드리 소나무 지름 삼분의 일 만큼 베었을 때 팔과 배의 근육이 땅기고 몸이 뜨거워져 이마에 땀이 송글 송글 맺혔다. 나는 잠깐 톱을 끼워둔 채 일어섰다.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켰다. 올려다본 하늘은 맑고 차갑고 평온했다. 언제나 하늘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비를 내리고 눈을 뿌리며 빛과 어둠을 번갈아 내릴 뿐이다. 나는 가쁜 숨을 고르며 근처 숲을 둘러보았다. 눈을 뒤집어쓴 작고 소박한 봉분 세 개에 내 시선이 멈추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의 무덤이다. 숙부는 아버지의 묘 양 옆에 나란히 할머니와 어머니의 묘를 썼다. 살았을 때 이부자리를 깔고 누워 잠이 들었던 대형 그대로 죽어서도 눕혀진 그들이다. 어머니의 푸념이 내 귓가에 재생된다.


"엄마 소원은 아빠하고 한 요에 같이 누워 자는 거야. 할머니와 아빠, 엄마가 왜 작은 요를 세 개 깔고 자는지 알아?" 얘기를 듣던 나는 그 사실조차 몰랐던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조금 멈추었다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모두 누울 수 있는 요는 너무 크고, 둘과 하나로 쪼개어 요를 만들어 두면 둘이 누울 수 있는 요에 누가 함께 누울지 눈치를 봐야 하는 게 너무 신경질이나." 어머니의 이 말에 어린 나는 어른들이 사용하는 요의 크기가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빠 가슴에 엄마가 손을 올리면 이미 할머니의 손이 아빠 가슴에 올려져 있어. 엄마가 물러서야 해. 너무 분하게 아빠 가슴에서 손을 내리는 건 언제나 나라고."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할 만큼 호흡이 가빠지더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른들의 문제가 바람처럼 어린 나를 감쌀 때 누구의 편도 되지 못하는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요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워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므로. 하지만 어머니에게 편을 들며 말한 적은 없었다. 할머니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도 이미 나는 알고 있지만 말로 꺼내어 확정 짓는 순간 그들 셋의 무게 중심이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간신히 균형을 이룬 가족이다.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 갈등이 기형적인 현재의 평온을 집어삼키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 가족은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질 것이라고, 피투성이가 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봉분 아래 땅 속에서도 두 여인 가운데 자리한 아버지의 가슴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소유권 분쟁으로 분주할 것만 같다. 그곳에서 만큼은 할머니가 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기묘한 웃음을 입가에 담고 있을 때, 내가 걸어온 눈길을 따라 산을 오르는 이가 있었다. 나를 발견한 한 남자가 쌓인 눈 위로 위태롭게 걸음을 옮겨 숨을 헐떡이며 다가와 말을 건넸다.


 


"쌓인 눈도 그렇고, 오늘은 나무 베기 좋은 날이 아닌데 나무를 베시나 봐요?"


 


"네, 반쯤 숨을 거둔 소나무인데 약속한 날이 되어서 베고 있어요."


 


"약속한 날이?"


 


"아, 네, 소나무가 베어주길 원하던 그날이에요, 오늘이."


 


목사는 의아해하는 눈치였으나 말로 표현하지는 않으며 웃어 넘겨주었다.


 


"아, 네… 하하하. “


 


"목사님은 오늘 좀 일찍 산에 오셨네요?"


 


"글쎄요, 어제 눈이 많이 내린 편이라 아내가 오늘은 가지 않는 게 좋다고 말렸지만 아무래도 오르고 싶은 날이었어요. 이런 날 무리여도 산 기도를 하고 내려가면 얼마간 마음이 편안해지거든요."


 


"산은 뿌리내릴 것이든 뿌리 없이 떠돌 것이든 모두에게 공평해요. 하여간 목사님은 산에 뿌릴 내리신 것 겉만 같아요.”


 


내 뒤로 베다만 소나무를 세세히 살피며 목사가 말했다.


 


"그런 것 같죠? 저도 동감이에요. 하지만 뭐, 산에서 살고 있는 형제님에 비하겠어요? 하하하. 원래는 기도 마치고 돌아가기 전 평상에서 물 한 잔 얻어 마시며 형제님과 세상 얘기를 나누려 했는데 다음으로 미뤄야겠어요. 오늘은 평소의 아무 날이 아닌 것 같으니…."


 


"네, 고맙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어렵겠어요. 다음에 세상 얘기 들려주세요. 눈길 조심하시고요."


 


"형제님도 조심해요."


 


허둥대며 길로 되돌아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일주일에 한두 번 이 산에 오른다. 우리 집 근처에 하얀색 포니픽업을 세워두고 산에 오른 후 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소리로 기도와 찬송을 했다. 작고 흰 기품 있는 얼굴에 가지런한 치열을 지녔고 함께 대화를 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위화감이 없을 듯한 인상, 우렁차게 기도나 찬송할 때와는 전혀 다른 곱고 작은 목소리의 서울 말씨를 지닌 서울 사람.


마을 사람들은 읍내에서 개척교회 목사라 소개한 붙임성 좋은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서울 사람이 뭐 하러 이 시골까지 내려와 개척교회를 세웠겠냐며 무슨 사연이 있는 게 틀림없다, 잘 웃고 붙임성 있는 성격이 꼭 사기꾼 같다, 방언 기도를 하던데 그럼 이단 목사 아니냐, 이러쿵저러쿵 목사의 험담을 일삼더니 목사가 마을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게 좋겠다며 나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처음 우리 가족이 이 마을에 이사 왔을 때 목사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을 사람들은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에게 마을 어른들을 만나면 예의 바르게 인사 잘해야 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 마을 사람들을 예의 바르고 상냥히 대했다. 마을에 애경사가 있을 때 항상 함께 음식을 만들고 일을 거들었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불경한 것을 물리치려는 듯 나를 쏘아보니 한달음에 도망치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당부가 마음에 걸려 가슴이 두근거려도 꾹 참고 그들을 항해 허리 굽혀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들이 인사를 받든 받지 않든 나는 내 몫의 예의를 다 했다. 어머니가 나 마저 신경 쓰다가는 곧 쓰러져 죽을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식의 순종하는 모습에 기대어 사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그러는 것처럼 타인도 자신을 '알아서' '잘' '예의를 다해' 대해주길 바랐으나 그녀의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몇 되지 않았다. 어린 나는 그 점이 안타깝고 속상했다. 이 마을은 산에 둘러싸여 있고 오래전부터 살던 사람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곳이다. 이 마을 밖으로 나가 사는 것을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듯 외지인이 이 마을에 유입되는 것도 불안한 게다.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며 살지 못하는 아버지를 둔 나로서, 떠나지 못하는 쪽과 머물지 못하는 쪽 모두 분명 같은 종류의 문제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사를 보낸 후 나는 톱질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참을 말없이 톱질, 톱질, 톱질, 또 톱질. 멀리 희미하게 들리던 목사의 기도는 찬송으로 바뀌더니 이어 소리 높여 방언 기도가 시작되었다. 나는 톱질에 온 정신을 집중하며 다른 잡념을 걷어냈다. 한참 후 거의 다 베어진 특별한 소나무에게서 톱을 빼냈다. 이제 경사면 쪽을 향해 나무의 잘린 윗부분을 발로 툭 차낸 후 마무리 톱질로 끊어내면 된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다. 그루터기와 땅에 깊이 묻힌 뿌리를 파내야 한다. 그루터기와 뿌리는 새싹이 나기 직전까지 미루다 파낼 생각이다. 이제 더 이상 살아있다 할 수 없는, 하지만 완전히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소나무를 베어진 부분부터 가지 맨 위까지 훑어보며 말했다.


 


“그대가 말한 본연의 목적과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리석은 나는 그 뜻을 짐작하기 위해 그대가 나무로 지내온 긴 시간을 수치로 가늠해 볼 뿐입니다. 정작 베어지는 그대는 아무런 말이 없으니 나 역시 의연해지려 노력합니다. 죽음-이생에서 서로 맞닿지 않을 그 모든 형태의 관계적 소멸-으로 인한 단절, 그로 인한 슬픔이나 외로움 이런 것들의 생경함은 무엇으로도 덧칠해질 수 없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머금은 채 계속 살아갈 것입니다. 나도 그대처럼 내 본연의 목적과 모습을 알게 되길 바라니까.”


 


농약에 절인 콩을 던져둔, 햇빛에 눈이 녹아 땅이 조금 드러난 양지에 장끼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 꿩고기를 먹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 귀에 익은 목사의 큰 외침 소리와 뒤를 잇는 메아리.


 


"할렐루~야!“


”루~야! 루~야! 루~야! 루~야!".


 


그 소리에 놀란 장끼는 그대로 푸드덕 날아올랐고 숨죽여 바라보던 나는 얼굴을 평평히 펴고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아멘! “


 


마침내 나의 특별한 소나무가 여린 바람에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며 폭신한 눈 위로 천천히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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