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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경 Oct 13. 2024

네 번째

너의 이름

신중히 편지를 쓰고 난 후 심호흡을 한번 하고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다. 정독한 이유는 교정을 위한 것이 아닌 내 마음에 깊이 간직하기 위함이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쓴 편지는 내가 나를 위해, 순전히 나를 위해 쓴 글이 된다, 결과적으로.

숨을 고르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내가 쓴 편지의 의미를 다시 마음에 새긴 후 성냥과 편지지를 들고 토방의 불을 켜고 밖으로 나갔다. 맑고 차가운 12월의 밤이다. 차가운 공기가 콧속으로 훅하며 들어선다. 집 곁의 봉분을 닮은 두엄이 있는 곳으로 간다. 두엄은 주로 아궁이의 재를 긁어모아 쌓고 그 사이사이 음식물 쓰레기들을 묻어 만든다. 훗날 그 두엄은 집 가까운 텃밭의 훌륭한 거름이 된다.

두엄 앞에 서서 말없이 푸르스름한 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참, 기가 막히게도 별이 많다. 특별히 빡빡하게 반짝이며 길게 띠를 이룬 은하수가 무척 아름답다. 문득 생각난 듯 점퍼 주머니에서 마이마이에 연결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는다. 마이마이의 재생 버튼을 누르니 Scorpions의 Holiday가 흘러나온다.   

‘Let me take you far away, you'd like a holiday, Let me take you far away … ’ 은하수를 눈으로 훑어보며 듣기 좋은 곡이다.

삶은 가끔 극단적인 상황으로 인간을 가르치려 든다. 어지간히 순한 자극으로는 무엇인가 깨달을 수조차 없게 된 세상인가…. 이 세계는 거칠기 그지없는 학습장이다. 하지만 부드럽고 가변적이면서도 공고한 다정함이 공존하므로 괜찮다. 다정함은 이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불필요한 긴장이나 과도한 흥분을 어느 정도 완화시킨다. 공평함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이미 존재하는 듯 다루어진다. 왜냐하면 불공평함을 정정하려 할 때 꼭 필요한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

고등학교 1학년 봄, 1교시 시작하기 직전에 몇 명의 학생을 방송으로 호명한다. 역시, 나도 포함되어 있다. 행정실로 가면 통통하니 키 작은 직원이 참으로 성가시고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거기 서.'라고 지시한다. 호명자 모두 행정실로 모이면 곧 수업료를 언제까지 낼 것인지에 대해 고문에 가까운 심문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장난처럼 느껴지는 듯 히죽대며 웃던 몇몇 녀석은 몇 월, 몇 일이라 정확한 날짜를 말하며 행정실을 벗어났다. 남아서 있던 녀석 중 또 몇 명이 1교시 타종을 듣고 불안해진 나머지 언제까지 내겠다, 날짜를 말하며 나간다. 결국 그렇게 나만 남겨진다.     

"아, 진짜, 언제까지 낼 건지 말하라고!" 마침내 그녀가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부모님이 언제 주실 수 있는지 몰라요." 내가 담담히 대답한다.

"야! 나는 가난한 건 참아 줄 수 있지만 뻔뻔한 건 진짜 못 참아! 넌 진짜 너무 뻔뻔해. 너는 수업 들을 자격이 없어. 거기 남아. 아, 진짜!"     

‘뻔뻔한’ 나는 그렇게 '진짜'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그녀와 대치한 채 행정실에 서 있다. 마음속으로 뜨끈한 무엇이 괴로운 서사와 뒤엉켜 흘러내린다. 지난겨울 현금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챙겨 잠적했던 아버지가 올봄에 간경화 말기 환자가 되어 돌아왔다. 어머니는 겨우내 다니던 식당에서 병원비를 빌려 아버지를 입원시켰고, 집에 남겨진 할머니와 나는 당장 끼니가 어려운 상황이다. 모든 것이 무게 중심을 잃고 엉망으로 뒤섞여 내 주변을 어지럽힌다. 돈에 관한 모든 것은 불확실하며 약속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다.

그 후로도 아버지의 건강과 집의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다. 나는 분기마다 수업료를 기한 내에 납부하지 못해 행정실에 불려 가 ‘뻔뻔하게’ 서서 1교시 결과하기 단골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1교시가 끝나면 어김없이 담임 박종명 선생님은 행정실 문을 열고 들어와 그곳에 갇힌 나를 꺼내주었다.  

   

"이 학생 수업은 듣게 해 주세요." 어이없어하는 행정실 직원을 향해 그는 한결같이 너스레를 떨었다.  

   

박종명, 그가 맨 처음 행정실에 갇힌 나를 꺼내주었을 때 깊은 모욕감을 느꼈다. 이미 중학생 때부터 수업료 미납에 대해 익숙하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안주는 것인지 못주는 것인지 모르겠는 상황에서 늘 언제까지 내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순전히 내 개인의 문제이고 담임 선생님이라 해도 이런 식으로 불쑥 개입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고 나 홀로 감당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결국 그 상황이 너무 화가 나서 어이없게 눈물이 났고 내 눈물을 본 그는 내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며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이 자랑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유쾌하게 말했다.

"뭐 이런 일로 울고 그래!"

나와 그는 이때부터 서로에게 마음의 적금을 붓기 시작했다고 믿고 있다. 아마, 그럴 것이다.

*     


그가 '그렇게까지 고마워하진 말고.'라 말하지 않았어도 내 귀에 들리는 상황, 그때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박종명, 그는 홀연히 이 세계에서 사라져 버리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이었으므로 그의 부재가 시간이 갈수록 낯설다 못해 외롭게 느껴진다. 두엄 위에서 나의 박종명, 그에게 쓴 편지에 불을 붙인다. 내 귀의 음악은 Scorpions의 Holiday가 끝나고 Bee Gees의 Holiday가 이어졌다.

    

 ‘Throwing stones, throwing stones,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Holiday를 따라 부르며 타 들어가는 편지지를 바라보다 지강헌을 생각한다. 1988년은 1954년생 지강헌의 해다. 88 올림픽처럼 전국에 생중계된 그의 모습은 보는 사람마다 각자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절도 560만 원의 지강헌과 미납 4만 원의 나를 맞대어보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느껴졌다. 창고의 대독에 울키던 홍시가 생각나 한 개를 꺼내어 방으로 들고 들어가 먹었다.

인간은 누구나 뛰어난 면이 있다. 충분히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나의 가족만 해도 그렇다. 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는 나와 단둘이 함께 했던 시간 속에서 현자였고 기술자였으며 학자였고 신사 혹은 숙녀였다. 그들끼리 서로 맞붙여 놓거나 세상 사람들과 맞대어 놓았을 때 형편없는 표정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마구 소리 지르거나 조용히 비겁해지곤 했다. 그들은 이런 면도, 저런 면도 다 가지고 있었다. 아니, 우리는 모두 제각기 이렇기도, 저렇기도 하다. 거죽은 거죽일 뿐, 그 안에 반짝이는 영혼의 빛과 온기를 모든 이에게서 보아왔다. 서로 그렇게 바로 보며 모두 온전해지긴 힘든 것인가….

 

불을 끄고 두툼한 요와 이불 사이에 몸을 넣으며 오늘 나는 밥도 짓지 않고 불도 때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찬 이불이 몸의 체온을 빼앗으며 느껴지는 한기에 춥다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끔찍한 한기가 말단에 느껴진다. 숨도 낮고 작게 들이쉬며 한동안 그렇게 잠자코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안을 데운다. 두꺼운 이불이 만든 동굴은 쉽게 데워지지 않고 극한 외로움에 나를 밀어 넣는다. 옆으로 웅크리고 꼼짝 않고 누워있으려니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흐느낌에 몸이 작게 흔들리고 그 흔들림에 달려드는 한기를 새기며 그렇게 소리 없이 울었다. 이불 동굴이 데워지고 뭉근한 온기가 몸에 감길 때 잠이 들었다.


왼쪽 발바닥과 왼쪽 겨드랑이 안쪽 팔에 긴 침이 박히는 이상한 촉각이 느껴졌다. 벌이나 벌레의 침 같았다. 아니 그보다 더 긴 촉수가 박히는 느낌이었다. 쐐기벌레에 쏘인 듯 따갑고 간지러웠다. 벌떡 일어나 발바닥과 겨드랑이 안쪽을 살폈다. 이상 촉각에 깨긴 했지만 아무 이상이 없는 아침이었다.

어제 쓰러뜨린 나무의 뿌리를  '말끔히 잘' 처리해야 한다. 낮에 해가 좋다면 양지여서 충분히 땅을 팔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아침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밥을 먹고 정오가 될 때까지 따끈히 데워진 방에 누워 책을 읽었다. 어머니의 남겨진 책, 민들레 영토.


내가 목 놓아 울고 싶은 건 / 가슴을 뒤흔들고 가 버린 / 거센 파도 때문이 아니다 / 한밤을 보채고도 끊이지 않는 / 목쉰 바람 소리 탓도 아니다 // 스스로의 어둠을 울다 / 빛을 잃어버린 / 사랑의 어둠


미려한 언어유희다. 소리를 내어 읽어 보았다. 공중에 튀어 오른 음들이 하나하나 무게를 지니게 되어 방바닥에 떨어졌다. 그 음들의 낙하지점은 내가 정한 곳이다. 나의 나무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계산해 놓은 곳에 정확히 내려앉았다. 음을 허공에 뱉어내고 그것이 정해진 지점에 정확히 내려앉는 모습을 바라보며 시집의 책장을 읽어 넘기다 그 책의 마지막 쪽을 펼쳤을 때 정오쯤 되었다.

점심을 챙겨 먹고 어제와는 조금 다른 연장을 챙겨 산에 올랐다. 양지에는 눈이 거의 남지 않았다. 오늘 역시 낮은 햇빛으로 충분히 따뜻했다. 나의 나무가 누웠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지게를 내린 후 공연히 그의 나무거죽을 슥슥 문질렀다. 그때 머리와 목, 날개 끝이 까맣게 물들었고 몸통은 눈처럼 하얀 제법 큰 새 한 마리가 가까운 나뭇가지에 앉아 나를 불렀다.

     

"산옥, 산옥, 산옥!"     


새를 바라보며 대답 없이 빙긋 웃었다.

    

"산옥, 네 이름 말이야…."   

  

"뫼 산, 구슬 옥!" 얼른 한자를 풀어 알려준다.     


"산과 구슬?"   

  

"그렇지."    

 

"산에 구슬이 있다는 뜻? 아니면 구슬이 산처럼 쌓여 있다는 뜻인가? “ 새가 묻기에 잠시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  

   

“구슬 ‘옥’의 한자를 보면 임금 ‘왕’ 자의 가로 세 획 중 가운데 가로획의 오른편 아래로 점 하나가 찍혀있어. 왕의 왼손에 들고 있는 그 점, 그것이 옥이야. 세상을 다스리는 자의 보석. 참 세속적이지, 옥(玉)이란. 그렇다면 산(山)은 어때, 산은 속세와 멀리 떨어져 있는 자연의 집합체잖아. 의미로 보았을 때 서로 거리가 먼 두 개의 한자를 나란히 붙여 놓았어.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인데 너무 극단으로 치우치지 말고 적당히 중간을 유지하며 평범하게 살란 뜻이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힘들어하셨던 부분이기도 하고.”

     

"산옥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잘하고 있는 걸까?"  

   

"아니, 아니지. 지금은 아닌듯해.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채 산에서 살고 있잖아."  


"그럼 옥은?"

    

"문을 닫지 않는다면 언제든 그 옥을 삶 속에 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산옥은 언제 산에서 내려갈 생각이야?"

     

"오늘 곡괭이질을 좀 해보려고. 나무의 부탁대로 뿌리를 캐내야 해. 해지기 전에는 내려가야지."


답답해하며 새가 다시 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산옥은 언제 둥지를 옮길 거냐고, 그러니까 내 말은 언제 세상에 나가 살 거냐고!"


"먹고 자는 것과 읽고 생각하는 일상의 사소한 것으로 나를 다듬은 후 언젠가 때가 되면, 그때."


사이를 두고 조용히 있던 새가 다시 물었다.  


"소나무가 산옥에게 그런 일을 부탁한 이유가 궁금해."  

   

"서서히 말라죽어가는 숙명의 나무도 있지만 마지막 날을 스스로 선택하는 나무도 있겠지. 그중 나는 후자의 나무를 알게 된 것이고. 그런 식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 거북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도망이든 도착이든,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소나무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어. 소나무가 베어질 날을 택한 이유는 소나무만 알겠지. 같은 부류의 존재를 알아보는 것도 참 신기하지 않아? 나와 소나무 그리고 너와 나처럼.‘   

  

내가 이어 말했다.   

  

“새야, 우리는 이 세상에 생필품 같은 존재일까, 아니면 선물 같은 존재일까? 난 아무래도 선물 같은 존재이고 싶어. 없다 해도 크게 문제 되지 않지만 만일 받게 된다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나는 그런 선물. “   

"나는 생필품 쪽이야. 평소엔 큰 존재감이 없어 보여도 없으면 당장 문제가 되는 그런 존재. 어째 산옥은 이름부터 이미 선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돼. 산옥은 소나무와 나에게 선물이야."

    

"새야, 너에게 이름을 지어줄까?" 웃으며 새에게 물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건 필요치 않아." 심드렁히 새가 대답했다.

     

"그럼, 그냥 새?"     


"응, '그냥 새' 아니고 그냥, '새'."               


말을 끝맺으며 푸드덕 날아오르는 '그냥 새' 아니! '새'를 바라본다. 애초에 그런 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떠올렸다. 특별한 소나무 역시 스스로 찾은 자유가 흡족할 것이다. 나는 수많은 쓸모없는 의미를 어깨에 지고 있음을 의식했다. 앞으로 살아 있는 한 계속될 생애의 무게다. 새는 마냥 하늘을 향해 위잉~ 별다른 의미도 없이 내가 내려다 보이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며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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