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차원에서 떨어진 별의 조각
우리 마을은 산을 등지고 평평한 대지가 부채 모양으로 펼쳐진 형상인데 논 사이 마을길이 시작된다. 초입의 폭넓은 신작로는 금세 양 갈래로 갈라지고, 왼쪽 농로를 따라가면 막다른 길에 장 씨의 집이 있다.
장 씨는 육십 대 중반, 마르고 허리가 살짝 굽었으나 장신의 건강한 노인이다. 장 씨의 장남은 마을의 자랑이었다. 마을 아이들이 읍에 있는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는 일이 흔치 않았고 실업계고를 가거나 대개 중졸이었다. 대학 진학은 몇 세대를 거쳐 없었던 마을에서 장 씨의 장남이 유일하게 공주의 고등학교에서 유학, 그 후 거점국립대를 졸업하고 투자금융회사에 취직했다. 마을 사람들은 장 씨의 장남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고 장 씨를 부러워했으나 대전에서 살고 있던 장 씨의 아들 내외가 작년에 이혼하고 사내아이를 본가에 맡기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말씨가 적은 장 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으나 마을 사람들은 장 씨가 나타나면 하던 말을 멈추거나 서넛이 모여 있다가도 흩어지곤 하는 것이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던 해, 작년 봄에 장 씨가 찾아왔다. 아버지에게서 사 모은 과수원 부지 중 일부를 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기행이 있던 해 가을, 장 씨는 우리 집 주변의 모든 과수원과 산의 일부를 아버지에게서 헐값에 현금으로 매입했다. 그다음 해 12월에 간경화 합병증으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그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 2학기를 마치고 겨울 방학을 보내던 때였다. 아버지의 기행과 그의 죽음과 이어진 할머니, 어머니의 죽음을 모두 곁에서 지켜본 마을 어른은 장 씨가 유일했다. 숙부는 장례와 발인, 장지에 관해 장 씨와 상의했고 장 씨를 통해 마을 사람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평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던 나에게 장 씨는 말했다.
"산옥아 내가 암만 생각해도 이게 좋겄어. 내가 과수원 농사짓는 것을 보고 배워라. 니 아버지 과수원 농사 퍽 잘 짓던 사람이여. 니 아버지 몇 해 안 짓긴 했다만 내 과수원이 가까이 있으니 지켜봐서 알어. 딱 올 한 해 나 따라다니면서 배우는겨. 그리고 내년부터 니 아버지가 하던 과수원 중 니가 할 수 있겠는 만큼 내가 빌려줄 테니 혀봐. 농사지어서 돈을 모으는 겨. 돈을 모아서 니 아버지가 내게 판 땅을 다시 사라 그 말이여. 아버지가 팔았던 값으로 내가 너에게 돌려주마. 어뗘?"
장 씨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내 표정을 살펴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성한 사람이 아니었던 겨, 니 아버지가. 내가 그렇게 그 값에 땅을 사는 게 아니었는디 부탁하드라, 내가 그 땅을 꼭 사주었으면 좋겠다고, 얼마가 되든 있는 대로 돈을 달라고. 내가 그때 가지고 있던 돈을 꺼내서 니 아버지에게 줬어. 얼마 얼마라고 세보라고 했는데 그 길로 그냥 가드라.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니 아버지 눈빛이 사람이 아니었어. 니 어머니도 그렇고, 할머니도, 니 아버지 그렇게 되고 나를 원망할 줄 알았는데 안 그러드라고. 그런 생각을 하믄 맴이 안 좋아. 니 혼자되고 이렇게 사는 거 순전히 니 팔자겠지만 그려도 나는 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되지 않겄냐. 내 생각대로 그냥 혀, 산옥아. 너도 살고, 나도 맴 편히 살자, 그 말이여."
나는 그렇게 작년부터 장 씨에게 과수원 농사를 배웠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장 씨는 내게 자신의 속마음을 자주 들려주었다. 그의 신변잡기 적인 모든 이야기들을 나는 소중히 마음에 받아 적었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많은 사람들 중 진정 어른인 사람이 몇이었던가! 성실히 자신의 인생을 살아왔고 자신의 경험을 소중히 하며 경험 안에서 터득한 지혜를 지붕 삼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직접 겪지 않은 모든 지혜는 싹이 트지 않은 씨앗일 뿐이다. 자신만의 씨앗을 심어 열매를 거두어본 지혜로운 자는 겸손하며 쉽게 길을 잃지 않는다. 장 씨는 자신이 거두고 있는 손자에 대해 유독 말을 아꼈다. 이유는 아이에 대한 모든 섣부른 확언이 무용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자식에 대해서도 같은 이유로 말을 아꼈다.
올해 처음의 과수원 농사를 무리 없이 잘 짓고 가을이 완연한 10월의 일이다. 장 씨가 사과나무에 약을 치기 위해 시멘트를 굳혀 만든 우물 모양 커다란 약통에 물을 받고 농약을 부어 휘저을 때 곁에 기백이 그 모양을 하나하나 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큰 소리로 기백이를 불렀다.
“기백아, 이리 와. 할아버지 약 치시는 동안 나랑 산에 가보자.”
아이는 할아버지 얼굴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한 뒤 나와 함께 걸었다. 내 가족이 묻힌 세 개의 봉분을 지나 갑자기 급경사를 이루는 산길을 말없이 오르다 뒤돌아보니 아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용케도 뒤처지지 않고 따라붙어 잘 걷고 있었다. 나는 앞을 향해 고개를 바로 하고 조금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오르면 너에게 보여줄 것이 있어.”
아이는 대답 없이 나를 따라왔다. 조금 더 산길을 걸어 오르니 오른편으로 아이 키 두 배가 족히 넘는 큰 바위가 보였다. 그 바위는 두 쪽으로 쪼개졌고 조각과 조각 사이에 제 몸에서 떨어져 나온 자잘한 돌들이 그득히 쌓여 있다. 조금 더 낮은 바위 위에 아이를 세워 두고 나는 그보다 높은 바위 조각 위에 올라 걸터앉았다. 구름이 해를 가려 잠시 그늘이 되고 바람이 불었다. 기분 좋게 웃으며 내가 아이에게 물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네…. 이렇게 높은 곳은 놀이동산 말고는 처음이에요.” 아이가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자, 이제 산의 주인들에게 너의 소개를 해보자.”
"네?" 하고 기백이 물었고 그런 아이가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내가 처음 우리 아버지와 여기, 이 바위에 올라섰을 때 내 소개를 했었어. 여기가 바로 산의 주인들에게 정식으로 나를 소개하는 곳이야."
작고 귀여운 손을 허공에 쫙 뻗으며 기백이 또 물었다.
"그냥 하면 돼요?"
"응, 그냥 하면 돼."
아이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배를 살짝 내밀고 다리에 힘주어 서서 조금 큰 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저는 요, 나는 요, 백자고진이의 아들, 장기백이에요. 여섯 살이구요 다섯 살 때 이 마을에 왔어요.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살아요. 아빠와 엄마도 없는 건 아닌데 함께 살진 않아요. 그리고, 또, 저는 책 읽기를 좋아해요.”
"백자고진이가 뭐야?" 기백의 소개가 끝나고 곧 내가 물었다.
"백자고진이는 그냥 백자고진이이에요. 그냥 그런 거예요."
"백자고진이 아들이란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배운 게 아니고 그냥 알고 있는 거예요. 나는 백자고진이의 아들, 장기백이에요."
장기백의 '백자고진이의 아들'이란 단어는 처음 들은 이후 좀처럼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기백에게 물어도 대답이 시원치 않아 스스로 문답을 하며 해결하려 해 보았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장기백과 나는 자주 만나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러면서 장기백의 '백자고진이’란 생경한 단어도 점차 익숙해졌다. 시간의 힘으로 마침내 ‘백자고진이’에 대한 서사를 스스로 지어내기에 이르렀으니 대강의 내용이 이렇다.
『… 장기백이 자라 걷기 시작했다. 다른 차원에 숨겨진 젤다 왕국의 전사가 별의 조각을 타고 나타나 잠든 장기백에게 속삭인다.
"존귀한 분이시여, 당신은 백자고진이의 아드님이시옵니다. 잊지 마옵소서, 당신은 백자고진이의 아드님이시오니 부디 잊지 마옵소서."』
기백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른 차원에서 떨어진 별의 조각처럼 반짝이며 예리하다. 아직 어린 기백이지만 이따금 기백의 기운이 비범함을 알아채곤 한다.
기백의 할아버지, 장 씨는 말수가 적고 표정도 많지 않았으며, 걸음조차 희미한 연기 같았다. 가능한 한 존재감을 세상에 드러내거나 남기지 않겠다고 작정을 한 듯 보였다. 그렇게 내향적인 사람이 손주의 이름은 그 이름도 찬란한 기백이라 지어주었다니! 그 이름을 참 잘도 지어주었지 않은가! 장기백은 여섯 살이지만 세상을 향해 당당하고 두려움이 없다. 나이에 비해 아는 것이 많았는데 한글을 일찍 깨쳐 일찍부터 다독했기 때문이고 생각이 많고 사색 끝의 언어유희를 즐겼다.
어느 날, 바위에 걸터앉아 짤막하고 귀여운 두 다리를 앞뒤로 흔들던 기백이 진지하게 말했다.
"모든 의도가 보여요. 제가 어려서 모를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아니에요. 어리면 모르는 게 맞을 거예요. 하지만 보이니까, 알겠으니까 답답하고 힘들고. 사실 아니까 모두에게 모르는 척해주며 사는 거예요."
봉긋한 세 개의 봉분을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너는 누구나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이 하나 더 있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 귀가 하나 더 있고. 우리는 아무래도 무익하고 무해한 존재들인 것 같군."
확인이라도 하듯 나의 양 귀를 번갈아 바라보며 기백이 물었다.
"귀가 하나 더 있어요?"
"응. 남들이 듣지 못하는 신호를 들어. 정확히 말하자면 강렬한 의미가 담긴 기운을 음성 화하는 세 번째 귀가 있달까. 인간의 감각기관이 감지할 수 없도록 주체가 의도한 의미만으로 생성된 에너지가 있어. 기운으로 다가오는 의미를 감지하고 나는 그 기운의 주인에게 답을 해. 서로 수발신이 가능한 것을 확인하는 순간 이상하고도 특별한 친구가 되는 거지. 간혹 어떤 곳의 땅이 납처럼 무거운 마음을 들려주기도 하고, 사물이지만 특별히 맺힌 가슴 아픈 사연을 전해 듣기도 해. 처음 만난 나무인데 몇천 년 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처럼 몇 마디 대화로 서로의 인생을 이해하기도 했지. 사람은 누구나 의도가 있어. 의도가 삶이고 삶이 의도인 셈이지. 기백이는 그들의 의도 중 선한 의도에 더 집중하는 법을 터득하게 될 거야. 원래 싫은 게 눈에 잘 띄는 법이지. 그것을 넘어서서 보다 선한 의도에, 맑은 의도에, 의도 없는 의도에 마음을 써봐. 너의 불편한 세 번째 눈은 그것이 되는 순간 축복의 눈이 될 테니! 나는 마음과 마음이 정확히 이어진 상태에서 듣는 모든 목소리를 수용하려 노력해. 수용이 뭔지 알지?"
"수용? 받아들임!" 깊이 사색하는 반짝이는 눈으로 내 얘기를 듣다 기백이 복창하듯 대답한다.
"그렇지, 받아들임. 받아들임은 덧붙여간다거나 쌓아간다는 증폭 혹은 증량의 행위가 아닌 본래의 지점, 수학의 본질과 같이 ‘0’을 찾아가는 여행이야. 너의 지혜가 성장함에 따라 너의 세 번째 눈이 점점 밝아지고 그로 인해 마음이 평안해지리라 믿어."
"백자고진이의 아들이니까!"
"그렇지, 장기백은 백자고진이의 아들이니까!"
나는 속으로 조용히 말한다.
'다른 차원에서 떨어진 별의 조각처럼 반짝이며 예리한 장기백이니까.'
물통의 뚜껑을 열고 기백에게 건넸다. 아이는 물을 마신 후 물통을 돌려주더니 제법 기분이 좋아진 듯 몸을 좌우로 흔든다. 파란색 운동화에 멜빵바지를 입고 바위에 걸터앉은 장기백. 나는 아이의 작은 몸에서 싹트고 있는 소중하고 연약한 기운을 듣는다.
"우리 식구, 그리고 아저씨는 달라요 “라고 기백이 나를 보며 말했다. 기백의 아이다운 귀여움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특별히 봐주니 정말 기분 좋은 걸! 굉장해! 나도 장기백이 정말 좋다. 자, 이제 내려갈까?"
아이는 밝은 표정으로 산토끼처럼 깡충거리며 나보다 앞서 저 멀리 경사진 산길을 뛰어 내려갔다. 얼마쯤 뛰어가다 걷고 있는 나를 향해 몸을 돌리더니 귀엽고 통통한 작은 손을 활짝 펴 흔든다.
"아저씨!"
나는 여섯 살, 사내 아이가 되어 깡충거리며 노을을 등진 기백을 향해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