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 혹은 삭제
아래의 이야기는 장기백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기백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기백이 당시에 느꼈던 감정과 시간을 들여 무엇을 정리하고 무엇을 간직했는지에 대해서도 나로선 알 수가 없었다. 장기백이 나를 배려했다고 직감한다. 듣는 상대가 어떤 의무감도 느끼지 않도록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하지만 장기백은 그것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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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지 얼마 안돼서, 그러니까 내가 이 마을에 보내진 작년, 가을이었어요.
엄마의 검은색 그랜저가 마당으로 훅 들어왔어요. 엄마는 마당 한 켠에 자동차를 세우고 내린 뒤, 하이힐의 굽 자국을 바닥에 새기며 하얀 크림 케이크가 든 상자와 과자 종합 선물 세트, 바나나, 생선과 고기가 담긴 봉투를 차에서 꺼내 인사도 없이 집 안으로 옮겼어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마루에 말없이 서서 엄마의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었고 나는 내 방 창문으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고 있었죠.
엄마가 함께 머무는 동안 할머니와 엄마, 할아버지는 꼭 필요한 말 외에 이렇다 할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나를 찾아온 이후 평소보다 더욱 침울해져서 누군가 침을 삼키기만 해도 그 소리가 크게 울릴 만큼 모든 것이 깊은 침묵 속에 잠겨버렸어요.
엄마는 내 방에서 세 밤을 함께 잤어요. 매일 밤 엄마는 내가 어디로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 듯이, 즙을 짜듯, 눌러 부수어 허공에 다 날려버리려는 듯이 그렇게 집요하게 끌어안고 요 위에 누웠어요. 옆으로 나를 향해 누운 엄마의 보드라운 명치께의 평평한 곳에 내 얼굴을 박고 숨이 좀 막혀도 참으며 잠을 잤어요. 나는 이것이 이미 익숙하답니다. 내가 네 살 때부터 엄마는 아빠와 나를 두고 집을 떠났거든요. 아빠는 엄마가 회사 일 때문에 서울에서 혼자 사는 거라 했어요.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우리 가족이 떨어져 사는 것이 아니란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저씨, 아빠와 엄마의 싸우는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거든요? 적어도 내 기억엔 없어요. 그리고 엄마의 웃는 모습도 거의 기억나지 않아요. 엄마의 창백한 얼굴의 무표정한 시선, 불안정한 목소리만 기억에 가득해요. 아무튼 대전에서 아빠와 내가 둘이 살 때 아빠가 출장을 가거나 하여 밤에 나 홀로 있어야 할 때면 엄마가 어김없이 나타나 둘이 밤을 보낸 적이 여러 번이었고 그때도 엄마는 나를 꼭 끌어안고 잠을 잤었어요.
엄마는 나에게 오기 위해 목소리를 팔아버린 인어처럼 내게 말을 거의 하지 않았고, 새벽 일찍 일어나 밥을 짓고 청소를 한 후 가까운 냇가에 나가 빨래를 했어요. 세탁한 빨래를 들고 집에 돌아와 탈수기에 넣어 탈수한 후 빛이 좋은 마당 빨랫줄에 널어 말렸어요. 점심을 지어 과수원으로 가져다주고 돌아와 한가해진 오후에는 평상 위에 앉아 나를 불렀는데 내가 달려가니 엄마의 허벅지를 베고 눕게 한 후 귀를 파주었어요. 엄마는 귀이개로 귀 파는 것을 좋아했어요, 원래. 귀속에 들어와 소곤대는 귀이개의 소리를 듣고, 긁는 소리를 듣고, 귀에서 쏙 빠져나가는 느낌을 참아 주었죠. 욕심을 내는 귀이개의 움직임, 내 귓속 끝까지 들이미는 주걱 같은 것의 존재, 눈물이 찔끔 날 만큼의 둔하고도 두려운 통증, 그 후 들리는 엄마의 낮은 환호성, "와! 크다! 이것 봐, 귀지야! 정말 크지!". 이것이 엄마의 기쁨이라니! 나는 인내심을 발휘해 꾹 참아주었어요. 한참 후 몸을 돌려 돌아누워 다른 쪽 귀를 내어주며 엄마의 허벅지 누워 오후를 보냈어요.
두 밤을 잔 오후, 엄마가 읍내에 가자고 옷을 입으라 했어요. 둘이 손을 잡고 걷던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빈틈없이 벽을 만들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어요. 엄마는 자신이 코스모스를 좋아한다고 내게 고백했고, 엄마는 코스모스를 좋아하는구나, 머릿속에 주의를 기울여 저장. 엄마는 걷는 내내 코스모스를 손으로 훑었어요. 목적지 없는 걸음걸이, 속도가 느리고 그저 길을 걷기 위한 걸음이었어요. 나는 엄마의 손에 잡혔다 풀려나며 허무하게 흔들리는 색색의 코스모스를 별 의미도 없이 바라보며 걸었어요. 상큼한 듯 시원한 듯, 생채기 난 코스모스의 냄새를 맡았고 바람이 머리에 쏟아진다, 평온하고 좋은 길이다,라고 생각했어요. 이 길을 이렇게 느긋하게 걸어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참으로 좋은 길이더군요. 내 곁의 엄마가 어떤 마음인지 느껴졌어요. 코스모스가 벽을 만들어 주는 그 공간 안의 평온함, 내 작은 손이 엄마의 손안에 쥐어져 있고, 엄마는 더 이상의 것은 잠시 잊었거나 내려놓았구나,라고 생각해 보았죠. 엄마는 이미자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맑고 가늘고 청량한 음색이었어요. 하얀 피부, 손수건으로 묶은 까맣고 윤기 나는 머리칼, 그 아래 드러나 있는 흰 목덜미, 원피스에 가려진 가늘고 단정한 몸매, 뒤꿈치를 끌며 걷는 슬리퍼의 마찰음, 아직 젊은 엄마의 가을, 이미자와 젊은 엄마, 이 모든 모습을 머릿속에 소중히 저장.
저만치 앞에 공중전화 부스가 보이자 뭔가 생각난 듯 엄마는 내 손을 놓고 아무 설명 없이 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어요.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서 있었죠. 내 쪽의 시간은 멈추어진 채 엄마의 시간이 흐르는 것을 지켜보았어요. 엄마와 누군가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어요. 엄마는 동전을 주머니에서 꺼내 꽂아 넣기를 반복했어요.
“미안해요, 생각보다 오래 머물게 되었어요. 곧 돌아갈게요….” 엄마의 목소리.
나는 엄마의 대화를 의식적으로 흘려들으며 듣지 않으려 애썼어요. 바람이 엄마의 목소리를 흩어버리도록 세게 불어주길 간절히 바랐어요. 엄마의 표정이 밝아지기도, 진지해지기도 했어요. 나와 두 밤을 함께 잤고 세 날을 함께 있었지만 나를 바라보던 엄마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어요. 엄마의 대화와 목소리, 표정을 기억하지 않으리라, 삭제.
‘전화기 너머로 이어진 세상은 엄마에게 어떤 의미인가? 내가 있는 이곳과 저곳은 어떻게 다르며 엄마는 어떤 세계에서 살아가길 바라는 것일까? 엄마가 진심으로 바라고 갈망하는 세상은 이곳일까, 저곳일까?’
생각할수록 나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졌어요. 내가 있는 이 세계는 희망이 없어 보였죠. 통화하는 엄마의 표정을 계속 살펴보다 알 수 있었어요. 나여서, 나 때문에 엄마는 이 세계를 마지못해 바라보고 있는 거라 생각되었어요. 머지않아 엄마는 발목의 붉은 실을 끊고 새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릴 것이고 나도 내가 있는 이 세계에 엄마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집착 따윈 버릴 수 있을 거예요. 맞아요, 나는 꼭 엄마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나는 더 이상 어리지 않고, 알 만큼 알며 이해할 수 있어요. 아저씨, 하지만 이상하게 몹시 억울한 기분이 들었어요. 저쪽 세상의 누군가와 더없이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이야기하는 엄마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슬퍼졌거든요. 갑자기 심술이 나기 시작했어요.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 버릴까, 머릿속이 복잡해 발로 땅바닥의 돌을 툭툭 차고 있었는데 엄마가 전화를 끊고 부스 밖으로 나왔어요. 엄마의 얼굴에 아직 가시지 않은 엷은 미소가 배어 있었는데 보면 안 되는 남의 비밀을 몰래 엿보는 기분이 들었어요. 아무 일 없었던 듯 엄마는 내 손을 다시 잡았고 나는 그 손에 계속 쥐어져 있을 것인지 빼낼 것인지 의미 없는 고민에 빠졌죠.
엉망인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엄마는 원하는 대로 도로변 ‘읍내 슈퍼’에서 라면 10개와 무 2개를 샀어요. 커다란 검은 봉지 두 개, 적어도 하나 정도는 엄마와 나누어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엄마의 손에서 무가 든 봉지를 건네받았죠. 엄마를 위해 그랬던 것이 아니에요. 이건 정말이에요. 단지 난 누구에게나 친절할 뿐 엄마에 대한 나의 특별한 배려는 아니었어요. 얼마 되지 않아 들고 있는 봉지가 무겁게 느껴지더니 손바닥이 끈처럼 얇아진 봉지에 짓눌려 끊어질 것만 같았어요. 무겁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며 엄마에 대한 원망이 사라지더군요. 걸으면 걸을수록 봉지가 무거워지더니 마침내 온통 머릿속에 힘들다, 무겁다는 생각뿐이었어요. 통증이 깊어질수록 나는 좀 더 평온해지는 기분이었어요.
엄마는 코스모스를 왼손으로 훑으며 오른손으로 라면이 든 봉지를 들고 내 앞에서 걷고 있었어요.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생각에 잠겨 있다면 적어도 내가 있는 이 세계의 생각은 아니었을 거예요. 엄마가 즐거워 보이는 것이 한편으론 다행이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했어요. 정말 이상한 기분이죠? 맞아요.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어요. 엄마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자마자 봉지가 무거워지기 시작했어요. 무가 점점 무거워지더니 납덩이로 변하더군요. 손이 끊어질 것만 같았고 다른 손으로 바꾸어 들어도 점점 버티는 시간이 짧아졌죠. 아, 잠깐만! 멈추어 봉지를 묶고 두 팔로 가슴에 안았어요. 저만치 이미 앞서 가버린 엄마를 따라잡으려고 뛰었는데 엄마는 뒤뚱이며 뛰는 나를 돌아보더니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어요. 오랫동안 거의 본 적 없는 그 밝은 미소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나는 엄마의 웃는 예쁜 모습을 기억해야 할지, 잊어야 할지 또 고민하고 말았어요. 집에 도착했을 때 또 한 번 엄마가 방긋 웃으며 땀이 묻는 내 정수리를 쓰다듬었어요. 나도 모르게 얼굴에 소름이 조금 돋았고 부끄러워지고 말았어요. 정말 이상하죠?
나를 끌어안고 하룻밤을 더 잔 후 엄마는 검은색 그랜저를 타고 새벽에 말없이 떠났답니다. 나와 할아버지, 할머니 중 누구도 엄마를 배웅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엄마가 마루 문을 여는 소리와 마당을 걷는 소리, 차 문을 여는 소리, 시동을 걸고 엑셀 밟는 소리, 바퀴가 지면에 닿는 마찰음까지 인내력 있게 듣고 있었어요. 엄마의 그랜저가 멀어져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나는 마루로 나갔고 이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멍하니 마당 가운데 서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할머니는 충혈된 눈으로 조용히 나를 돌아보며 말했어요.
“더 자. 어여 들어가.”
그 후 할아버지는 변함없이 과수원에 나가 나무를 돌봤고, 나는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아졌고, 할머니는 가끔 마당을 향해 한숨을 쉬었어요. 국민학교 입학한다면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 나는 차라리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까 싶어 생각해 보았지만 자꾸만 코스모스 길을 함께 걷던 엄마가 떠올라 공연히 슬퍼지곤 했어요.
엄마가 좋아한다는 코스모스, 나는 그 단어를 좋아해요. 코스모스는 웃는 얼굴을 갖고 있어요. 엄마의 웃는 얼굴이 신기하게도 코스모스와 닮았죠.
아저씨, 코스모스는 어떻게 Cosmos라는 이름을 얻었을까요? Cosmos는 우주적이며 질서적인 의미가 있고 또한 철학적이고 수학적인 의미예요. 나는 과연 엄마로부터 완벽히 독립적일 수 있을까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완전히 독립적일 수 있을 때까지 나의 아주 많은 모습 중 다정하고 정돈된 모습으로 자라고 싶어요. 물론, 실수도 많이 하겠지만요. 큭큭큭.
장기백은 분명히 웃었다. 내 귀를 의심했지만 모든 이야기를 마친 후 코스모스처럼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