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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경 Sep 03. 2024

산29번지

검댕이 같은 외로움

우리 가족은 내가 10살 되었던 해, 1978년 봄에 이곳으로 이사 왔다.  10년 전 그때만 해도 아랫마을 대부분은 초가집이었고 저녁이 되면 아궁이 불로 인해 굴뚝에 연기가 피어올랐었다. 이미 역전 부근은 개발의 기운이 흘러넘치지만 이곳은 시내와 멀찍이 떨어져 태평히 눈감은 채 겨울잠에 빠진 시골마을일 뿐이다.  3년 전쯤 집 집마다 전화선은 이미 들어왔으나 연탄보일러는 대부분 들이지 않았으니 마을을 감싸고 있는 뒷산에서 땔감을 손쉽게 충분히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렷다. 최근 앞서거니 뒤서거니 초가집을 허물고 양옥을 지으며 등유 보일러를 설치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우리 집에만 전화기와 보일러가 설치되지 않은 채 남겨질 것이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긴급한 전화 연락은 십오 분 정도 걸어 내려가 마을이 시작되는 첫 집, 선일이네 것을 이용할 것이고 방을 데우는 땔감으로 나무 장작을 준비할 것이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산길을 따라 오르면 닿는 외딴집이다. 회색 기와를 얹었고 회벽에 아무 색도 칠하지 않았다. 담이나 대문 없이 왼쪽엔 돌을 둘러쌓아 만든 조그맣고 동그란 연못이, 오른쪽엔 가을에 노랗고 작은 꽃을 구름처럼 피워내는 튼실한 국화 나무가 있다. 그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놓여 있는 네 개의 섬돌을 딛고 오르면 시멘트를 바른 토방에 닿는다. 토방 위로 지붕에서 이어지는 차양을 늘이고 3미터는 족히 넘는 가느다랗고 둥근 쇠기둥 여섯 개를 받쳤다. 신을 벗은 뒤 나무로 성글게 만든 평상을 딛고 올라 8조각으로 나뉜 무거운 미닫이 유리문 중 가운데 것을 열면 삐걱거리는 마루가 깔린 거실이다. 네 가족이 한 겨울을 제외하고는 항시 둘러앉아 밥을 먹던 곳이다. 거실을 중심으로 삼면이 방, 나머지 한 면은 큰 미닫이 현관이 남쪽으로 나 있다. 미닫이 현관문이 끝나는 왼편 구석엔 하얀 바탕에 파란 붓질이 된 요강이 놓여 있다. 요강은 할머니가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늘 아침마다 비우고 깨끗이 씻어 정해진 자리에 두었다. 밤 소변은 식구 모두 이 요강을 사용했는데 소변이 요강에서 흘러넘치거나 배뇨 시 실수로 흘린 오줌으로 요강 주변 마루에서 늘 지린내가 났다. 그 요강과 가까운 곳에 작은 방 하나와 현관문과 마주 보는 커다란 안방이 만나는 지점에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방의 구들을 위해 높이를 낮춘 부엌은 덕분에 대개의 집이 그렇듯 다락방을 머리에 이고 있다. 현관문 오른편에 또 작은 방 하나 그리고 변소는 집 밖, 외채로 지어진 창고 끝에 붙어있다. 가능하면 멀리 떼어 두자고 작정하고 만든 구조다. 나는 남쪽 창이 마을을 비추는 요강 옆의 작은 방을 사용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머문다. 부엌문을 열면 ‘덜킁’ 소리를 내는 동시에 거실로 나 있는 모든 문이 함께 구역질하듯 들썩인다. 부엌문을 열고 연기로 그슬러 검게 변한 스위치를 ‘톡’ 켜면 붉은 알전구가 빛을 밝히고 황망해하는 생쥐, 생쥐들 쏜살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부엌은 그을림으로 여섯 면 모두가 검게 변해있었다. 검댕이는 여러 번의 솔질에도 질 것 같지 않은 나의 외로움과 닮았다.


식구는 모두 넷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고립된 아버지와 그런 자신의 아들을 남편처럼 섬기고 의지하며 살았던 할머니, 남편을 무척 사랑했으나 시어머니에게서 독립시키지 못해 온전히 소유할 수 없었던 어머니, 그리고 나. 지금은 나를 제외한 세 사람 모두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세 사람은 색상, 명도, 채도인 채로 살며 빨강, 녹색, 파랑 각각 다른 색채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자신만의 색이 무언지 조차 깨닫지 못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할머니와 어머니가 차례로 빛이 되었고, 그들을 떠나보내며 ‘세 사람은 결국 함께 뭉쳐 빛이 될 운명이었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숙부는 속세의 삶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형에게 집과 논, 밭, 소, 과수원과 산, 그것이 무엇이든 형이 원하는 것은 때마다 원대로 사주었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헐값에 땅과 집을 팔아넘긴 후 빈털터리가 되는 모습을 진력나게 봐 왔다. 명석했던 숙부는 소학교 졸업 하기 전 일찍이 집 떠나 부잣집 양자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엿한 대기업에 입사한 후 노모를 돌보는 형의 가난을 두고 보지 못하고 돌봐왔다. 그들이 차례로 세상을 뜨니 마침내 무거운 짐을 벗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장례를 마친 후, 숙부가 조용히 나를 불러 앉혀놓고 말했다.

“이제 다 돌아가시고 너만 남았구나. 나는 너를 안쓰러워할 여력이 없다. 너도 알겠지만 너의 부모님은 문제가 많은 분들이었잖니? 나는 그동안 할 만큼 했으니 이해해 주기 바란다.”


나에게 남겨진 것은 외딴집과 산의 일부였다. 집이 디딘 땅은 아버지가 마을 사람에게 이미 팔아넘겼다. 집을 지나 산을 오르면서 펼쳐지는 복숭아와 배, 사과가 심어진 큰 규모의 과수원들 역시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잘게 쪼개 여러 차례에 걸쳐 조금씩 팔았고 마을 사람들은 헐값에 그것을 사들였다.

나는 혼자된 후 고모와 숙부가 자신에 대해 신경 쓰지 않도록 문제없이 고등학교 졸업을 했고, 새벽에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거나 틈틈이 학원 청소 같은 잔일들을 소개받아하기도 했다. 홀로 지내면서 나는 세상 사람들이 중요히 여기지 않거나, 관심이 없거나, 두려워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완벽히 혼자가 되어 살려면 필요한 것들 말이다. 예를 들면, 남겨진 자의 견딤.

“산옥아, 이거 봐. 돌멩이지, 하지만 네가 돌멩이가 아니다 하면 아닌 것이 되는 거야. 사람은 다들 자신이 정해놓은 경계 안에 사는 거다. 네가 저 돌멩이를 신이라 정하면 그것이 신이 되고 강아지라 정하면 강아지가 되는 거야.”

아버지가 나에게 이런 말을 들려줄 때 나는 어렸지만 그 의미만은 알 것도 같았다. 자신이 정해놓은 경계 안에 사는 거다. 가끔 떠올렸다.

“아가,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되는 겨. 잘된 일에 너무 들뜨지 말고 잘못된 일에도 너무 기죽지 말어. 그럴 일이 아녀. 잘된 놈 시기하지 말고 망한 놈 위로 삼지 말고 살어. 다 왔다 갔다 하는 거여, 사람은 무장, 무장 그런 거여. 착하게 살어, 착하게.”

할머니가 양지에 멍석을 깔고 나물을 말리며 자주 했던 말이다. 그 말은 틀린 말이 하나 없다 싶어 내가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는 이가 다 빠져 발갛게 드러난 잇몸에 아직 단단히 버티고 있는 색 바랜 아래쪽 송곳니 두 개가 드러나도록 환히 웃으며 말했다.

“암~만, 그래야지, 암~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에게 팔아버린 과수원 중 집과 가까운 곳을 빌려 복숭아 농사를 짓게 되었다. 몇 해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전지를 하고 꽃을 솎고 약을 쳤으며 봉지를 쌌었다. 백도, 황도, 천도 세 가지의 복숭아가 어디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이 큰 복숭아나무가 어떤 것인지, 자주 들여다보아야 하는 병약한 녀석은 어디에 있는지, 때보다 조금 이르게 출하할 수 있는 복숭아는 어떤 것인지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다. 아버지가 세세히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무와의 교감이 사람들과의 교감보다 더 쉬운 그런 사람이었다. 이곳에서 과수원 농사를 처음 짓지만 첫 해 출하 시기를 놓쳐 망쳤을 뿐 그다음 해부터 복숭아와 배 농사는 매년 풍작이었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을 때 나무 한 그루마다 마음을 쏟는다고 느꼈다. 자신이 받아본 적 없는 그런 종류의 마음, 충분히 표현된 사랑이었다. 다만 아버지의 마음은 쉽게 변하며 무책임하고 변덕이 심한 것이 문제였다.

 실제 농사를 지으며 필요한 온갖 것은 지금 과수원의 주인인 장 씨 아저씨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 그것이 방법이든 도구이든, 무엇이든 말이다. 장 씨 아저씨는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았으나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며 다정히 대해주었다. 내가 지금처럼만 한다면 아버지가 팔아넘긴 거대한 과수원을 모두 되찾을 수 있을 거라 말하곤 했다.

복숭아 농사는 겨울의 끝 무렵 정전(가지치기)으로부터 시작된다. 꽃이 피면 꽃 솎기를 하고, 어린 열매가 매실처럼 초록색으로 살이 조금 오르면 과일을 솎는다. 과일 솎기는 제법 여러 날이 걸리는데 적과(과일 솎기)가 끝나면 5월 말부터 봉지 싸기를 한다. 복숭아 봉지는 얇고 맨들 거리며 단단한 소재의 영문 잡지를 이용해 만들었다. 봉투를 감싸는 철끈은 얇은 캔을 절단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것 역시 재활용인 듯 영문이 적혀 있었다. 주머니가 두 개인 작업용 앞치마를 허리에 차고 앞치마 한 칸엔 종이 봉지를 한 칸엔 철끈을 넣은 후 목장갑을 끼고 작업을 시작한다. 작업 중 봉투나 핀이 필요하면 큰 소리로 아이들을 불러 심부름시켰다. 봉지 싸기는 혼자서 하기 힘든 작업으로 모내기처럼 몇 주에 걸쳐 서로 품앗이했다. 말이 품앗이지 마을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전력을 다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며 떠들썩 하니 잔치하듯 복숭아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봉지를 쌌다. 산옥과 품앗이 무리가 지나간 자리엔 초록 나뭇잎 사이로 알록달록 종이봉투 꽃이 곱게 피어났다.

한여름 복숭아 출하가 끝나면 가을이 온다. 그러면 복숭아 농사는 농한기에 접어드는데 나에게 농한기는 버텨야 하는 인내의 시간이자 치유의 시간이었다. 매일 해가 뜨기 전 일어났고, 해가 지면 전등을 밝히지도 않은 채 조용히 누워 죽음을 맞이하듯 잠이 들었다. 세상에 닿는 인연의 끈이 없으므로 언제, 어떻게 죽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삶이라 생각하니 홀가분했다. 인간의 소리가 닿지 않아서, 아침에 온갖 새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산에 물드는 색으로 분별할 수 있어서, 별의 민낯을 볼 수 있어서 참으로 좋았다. 겨울의 저녁은 다섯 시가 되기도 전에 시작되는데 그 긴 밤은 언제나 차가운 별을 쏟아냈다. 모양을 바꾸며 이쪽 하늘에서 저쪽 하늘로 자리를 바꾸는 달이 애인의 기분을 보는 듯 질리지 않고 늘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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