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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i Jan 20. 2024

고려-거란 전쟁 <2>

제1차 전쟁 - 거란과의 첫 충돌

 만부교 사건 이후로 고려는 혜종-정종-광종-경종의 시대를 거칩니다. 이 시기는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하려는 왕권과 중앙의 통제 밖에 머물며 중앙을 통제하려는 지방 권력이 수시로 충돌하던 정치적 혼란기였습니다. 거란도 태종 사후 중화왕조로의 변화와 유목 전통의 유지, 그리고 황권의 강화를 둘러싸고 정치적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중원에서는 오대십국의 혼란을 끝내고 송나라가 통일 왕조를 만들었습니다.     

 

 거란은 성종(聖宗)이 즉위한 이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성종 야율융서는 불과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기에 그 어머니인 승천태후 소씨가 정치를 맡았습니다. 그녀는 황족 종실의 제왕(諸王)들이 가진 군사력을 제한하여 내부 권력투쟁을 억제하는 한편,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한 송나라 태종의 공세를 막아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거란의 지배력이 약화된 요동을 평정함으로써 다시 거란이 남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요동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거란의 정치적 혼란기에 그 지역에 있던 발해 유민들은 정안국(定安國)을 세우고 거란에 저항하였습니다. 거란으로서는 요동을 평정하지 않으면 고려로도, 중원으로도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정안국은 반드시 정벌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고려로 가는 길을 정안국이 막고 있었으므로 정안국은 고려의 방파제 역할이기도 했습니다.      


정안국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95%88%EA%B5%AD#/media/%ED%8C%8C%EC%9D%BC:Jeongan.svg


거란의 화살, 남에서 동으로


 거란은 986년 정안국을 정복하여 멸망시켰습니다. 그와 동시에 고려로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습니다. 정안국 정벌은 분명 고려를 향한 것이었으나, 고려를 자극하지 않으려 애를 쓴 것입니다. 고려가 자극을 받으면 정안국 정벌을 방해할 수도 있고, 당시는 어린 거란 성종이 즉위한지 몇 년 되지도 않은 때였으므로 아직은 고려와 전면전을 벌일 때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고려 왕도 한자는 다르지만 성종(成宗)이었습니다. 성종은 태조 이후로의 대 거란 적대 정책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최승로의 시무28조가 이때의 일인데, 그 제1조가 바로 국경의 확정과 국방 강화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즉 거란의 공격에 대비하자는 것입니다.      


 고려 성종의 전략은 바로 ‘사대(事大)’였습니다. 얼핏 들으면 굴욕적이고 무책임한 국제전략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시는 중원의 통일왕조인 송나라가 들어서고 거란에 대해 공세를 가하던 시기였고, 거란은 요동을 정복하고 다시 고려의 턱밑에 칼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고려로서는 송에게 사대하는 것이 거란에게 굴복하는 것보다 훨씬 자긍심을 지키는 일일 뿐 아니라 실리적으로 타당한 것이었습니다. 말이 ‘사대’지만 실제로는 송을 움직여 거란을 견제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결코 맹목적인 사대도 아니었습니다. 송이 거란을 견제하는 것을 노릴 뿐, 고려가 앞서 화살받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985년에 송 태종은 거란 공격에 앞서 고려에 사신 한국화를 보내어 ‘함께 거란을 치자’고 하였습니다. 그는 조서에서 ‘왕(고려 성종)은 항상 밝은 계책을 가지고 굳은 절개로 예의의 나라를 편안히 하였다’며 성종을 띄워주고는 ‘좋은 기회는 두 번 오지 않으니 왕은 결단하라’고 부추기기도 하고, ‘노획한 포로와 재물 등은 모두 고려 장병에게 주겠다’며 회유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 성종은 시간을 끌다가 못내 출병을 약속하고 사신을 돌려보냈으나, 송 태종이 거란을 공격할 때에 출병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송군은 986년에 기세 좋게 북진하였으나 곧 전세가 역전되어 버렸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송 태종의 거란 공격 실패는 송-거란 관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거란이 혼란기를 끝내고 다시금 강성해 졌다는 것, 송의 북진 공세가 보기 좋게 격퇴되었다는 것은 이를 지켜보고 있던 주변의 국가와 부족들에게도 중요한 신호였습니다. 특히 거란 동쪽 배후의 여진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그때까지 여진은 송에 조공을 바치며 고려를 견제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는데, 이후로 상당수의 부족들이 거란에 조공하거나 심지어는 거란에 합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송에게도, 고려에게도 위협적인 신호였습니다. 여진 역시 고려에게는 중요한 위협이었기 때문에 여진이 거란에 붙자 고려는 더더욱 송과의 친교를 굳건히 하게 되었습니다. 송에게도 고려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물론 고려가 송 태종의 뒷통수를 친 일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30년 전쟁의 시작


 요동을 확보하고 송의 공세를 막아내었으며 여진을 굴복시키기까지 한 거란은 이제 드디어 동쪽으로의 진군의 종착지인 고려로 향했습니다. 993년 10월, 거란의 동경유수 소손녕(고려 측 기록에는 소손녕, 중국 측 기록에는 소항덕)이 이끄는 군대가 고려의 영토로 들어왔습니다. 소손녕은 스스로 80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고 하였으나, 당시 동아시아의 기록에서 군대의 규모는 매우 부풀려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학자 칼 비트포겔(Karl Wittfogel)은 당시 거란국 인구가 380만, 그 중 거란족은 75만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군역을 질 수 있는 인구를 모두 끌어모아도 80만 대군을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10만 정도의 핵심정예기병을 유지하고 있던 것으로 보이며 최대 규모는 30만 정도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윤영인, 동아시아 세력균형과 “정복왕조” 거란의 군사력, 동양고전연구, 85호(2021), 223-253면)되기 때문에 소손녕이 수만에서 10만 남짓한 군대만 이끌고 왔더라도 대규모의 침공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특히 고려로서도 대군을 이끌고 싸우기에 힘든 상황임은 같았습니다. 비트포겔은 고려의 인구를 250만~300만 정도로 추산하였습니다. 당시 고려는 30만 규모의 광군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나, 이는 그야말로 전국의 군역 장병을 모두 끌어모아 만든 숫자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거란군을 맞아 싸우러 북방으로 출병한 병력은 소손녕이 이끌고 온 병력과 비슷한 수준을 넘지 못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어쨌든 소손녕은 자신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고 고려에 엄포를 놓았습니다. 워낙 기동성이 좋은 거란군이 급습해왔기 때문에 고려로서는 적의 병력 규모를 바로 파악할 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첫 전투인 봉산군 전투에서 고려군 선봉이 패하고 지휘관인 윤서안이 사로잡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거란과의 전쟁은 수십년 간 예견되고 대비되었으나, 첫 전투에서 고려군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고려 성종은 직접 서경(평양)으로 나가 군을 지휘했습니다. 유사시에 직접 군을 지휘하는 군주의 모습은 멋있기는 하지만, 그만큼 사상 초유의 거란의 공격 앞에서 고려가 흔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입니다. 성종은 봉산군에서의 패배 소식을 듣고 중군사 서희를 봉산군으로 보내어 거란군과 대치하도록 했습니다.      

 봉산군에서 대승을 거둔 소손녕은 거듭 항복을 촉구하며 다시 80만 군사를 언급하는 협박을 했습니다. 고려의 조정은 소손녕의 요구를 두고 둘로 나뉘었는데, ‘주전론과 화친론의 대립’이 아니라 ‘항복론과 할지론의 대립’이었습니다. 즉 ‘소손녕의 요구대로 항복하자’는 것과 ‘땅을 떼어주고 보내자’는 것의 대립이었습니다.     

 

서희


 그런 와중에 서희와 민관어사 이지백만이 항복하거나 땅을 떼어주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서희는 “한 번 싸워본 뒤에 항복하거나 땅을 떼어줘도 늦지 않다”고 하였고, 이지백은 “소손녕의 의중을 살펴보고 나서 싸우든 화친하든 하자”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고려사> 서희 열전의 기록에 따른 것인데, 실제로 고려 조정에서 서희와 이지백 두 사람만이 항복이나 할지를 반대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와중에 서희는 ‘한 번 싸워 보자’고 하고, 이지백은 ‘소손녕에게 뇌물을 줘서 소손녕의 의도를 알아보자’는 쪽이라서 기록에 따르면 오직 서희만이 싸우자고 한 것인데, 이 기록의 실제 여부는 알 수는 없으나 서희가 ‘싸워 보자’는 측의 대표적인 인사였음은 맞는 것 같습니다.    


왜 고려군은 허약했을까

  

 고려는 왜 이토록 허무한 패배를 겪었으며, 왜 고려 조정의 대다수는 항전의 의지를 보이지 못했을까요? 성종은 즉위 이후 거란의 침입이 있기까지 군 조직을 정비하고 국경지대인 양계에 병마사를 설치하였으며 절충부와 좌우군영을 설치하는 등 지속적으로 군사제도를 정비해 왔음에도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전경숙(2014)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성종이 했던 군사제도 정비는 실질적인 전쟁 수행이 아니라, 중국의 군사제도의 틀에 맞추기 위한 위계적이고 형식적인 제도 정비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중국식 군제를 도입하여 호족들의 군사적 기반을 축소하려던 일종의 정치적 의미의 개혁이었으며 당연히 호족 세력은 이에 반발하였기에 거란과의 전쟁에서도 소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해석입니다(전경숙, 고려 성종대 거란의 침략과 군사제도 개편, 군사(軍史), 91호(2014), 229-259호). 게다가 소손녕의 침공 당시는 성종이 정비한 군제가 전쟁시에 제대로 작동할 만큼 정착되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소손녕의 군대가 침공을 시작하기 전인 993년 5월에 여진인들이 거란의 고려 침공 정보를 알려왔으나 고려는 여진을 믿지 못하여 그 첩보를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했습니다. 8월에 거란군의 이동 소식이 들려오자 그제서야 고려는 각지에 병마제정사(兵馬齊正使)를 보내 징병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고려는 총체적으로 전쟁 대비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난국은 고려의 중앙군이 봉산군에서 소손녕의 거란군에게 무너지는 결과로 나타났고, 기세가 등등한 소손녕의 요구에 고려 조정은 맥없이 항복론과 할지론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곳에서 상황이 반전되었습니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고려의 중앙군은 맥없이 무너졌으나, 지방군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고려 조정의 결정이 늦어지자 소손녕은 최종적인 압박을 위해 청천강을 건너 안융진을 공격하였는데, 이곳에서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지방군을 이끌고 출진하여 거란군을 무찌른 것입니다. 거란군은 다시 강을 건너 봉산군으로 후퇴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제 고려 조정도 항복이나 할지가 아닌, 대등한 입장에서의 협상을 할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비록 거란군의 진격을 막았으나 무력으로 거란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협상이 필요했습니다. 성종은 합문사인 장영을 ‘화통사(和通使)’, 즉 화친과 통교의 사신으로 보내어 소손녕과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소손녕은 “대신을 보내라”며 장영을 문전박대하였습니다. 이것은 ‘나와 급이 맞는 협상단을 보내라’는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협상 결과를 번복하지 않을 만큼 책임 있는 고위관료를 보내라’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내사시랑, 병관어사, 중군사를 겸하고 있던 서희가 직접 소손녕의 진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역사에 길이 남은 위대한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담     

 거란의 1차 침공 당시 서희가 싸울 것을 주장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이지백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고려사 서희 열전에서는 아래와 같이 이지백의 주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 민관어사(民官御事) 이지백(李知白)도 아뢰어 이르기를, “태조(太祖)께서 창업하시고 자손에게 전하시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는데, 충신 한 사람도 없이 갑자기 국토를 경솔하게 적국에 주고자 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 사람의 시에 이르기를, ‘어린 아이가 천리 산하를 가벼이 여겼으니, 두 왕조의 문무관이 초주(譙周)를 원망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이는 촉(蜀)의 대신 초주가 후주(後主)에게 권하여 국토를 위(魏)에 바치게 한 결과, 천고(千古)의 웃음거리가 된 것을 말한 것입니다. 요청하건대 금은과 보물을 소손녕에게 뇌물로 주어 그의 뜻을 살펴보시옵소서. 게다가 경솔히 국토를 분할하여 적국에 버리는 것보다는, 선왕께서 설치하신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선랑(仙郞) 등의 행사를 다시 거행하고, 다른 나라의 괴이한 법을 본받지 말며, 국가를 보전하고 태평을 이룩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여기신다면 먼저 천지신명께 고하시고 그 후에 싸우거나 강화하는 것은 오직 주상께서 결정하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성종도 옳은 말이라 여겼다. 당시 성종이 중화(中華)의 풍습을 즐겨 따르는 것을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지백이 이것을 언급한 것이다.   


 이지백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대신 초주가 촉한 황제 유선에게 위나라에 항복하자고 하여 촉한이 멸망한 고사를 들며 섣부른 항복을 반대하고, 소손녕에게 뇌물을 주어 그의 의도를 살펴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연등회, 팔관회, 선랑 등의 행사를 다시 거행하고 다른 나라의 괴이한 법을 본받지 말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성종이 추진하던 정책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습니다. 성종은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유교 질서에 근거한 체제를 건설하고자 했고, 불교를 비롯한 고려의 전통문화를 억제하였습니다. 연등회와 팔관회는 불교 행사이고 선랑은 곧 신라 화랑에서 유래한 청년조직 또는 행사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삼국시대 이래로 한반도를 지배한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성종은 이를 폐지하고 유학에 근거한 중국식 제도를 적극 수용하였기에 이에 대한 저항이 있었습니다.      


 전쟁의 급박한 와중에 대응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런 불만이 튀어나온 것은, 고려사를 쓴 사관도 “당시 성종이 중화의 풍습을 즐겨 따르는 것을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언급하였듯이 당시 전통문화를 지지하는 세력이 ‘이 전쟁에서 우리가 고전하는 것은 성종이 유학을 중시하고 중국화를 꾀하던 정책 때문이다’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결국 성종은 이지백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단지 반대 세력의 요구에 굴복하여 개혁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종은 전쟁 이후에도 고려의 중앙군 체제인 ‘2군6위’를 구상하는 한편 10도(道) 12목(牧) 체제를 만들어 현재까지도 사용되는 ‘도’ 중심의 지방제도를 만드는 등 개혁을 이어갔습니다. 또 배향공신을 선정하여 태묘(종묘) 제도를 완성하였고, 송나라의 15품계를 도입하였습니다.      


 성종의 개혁은 고려를 넘어 조선, 심지어 현대에까지 이르는 많은 변화들을 가져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반도의 고대 전통문화가 약화되기도 했고, 그에 대한 반발로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성종의 개혁이 반드시 옳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이후 고려와 조선의 역사는 크게 보면 성종이 추구한 방향을 향해 움직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종은 고려사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중요한 군주였다고 할 것입니다. 




참고 자료     

 - <고려사>, <고려사절요>, <송사>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역본

(https://db.history.go.kr/)

 - 윤영인, 동아시아 세력균형과 “정복왕조” 거란의 군사력, 동양고전연구, 85호(2021), 223-253면

 - 전경숙, 고려 성종대 거란의 침략과 군사제도 개편, 군사(軍史), 91호(2014), 229-2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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