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얀 속살이 드러날 때까지
나는 끝없이 깎아냈다.
티끌 하나, 어둠의 작은 조각 하나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흙 속에 오래 숨어 있던 것들은
그 냄새조차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습기와 침묵,
질긴 어둠이 겹겹이 들러붙어
내 안, 깊숙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반짝이는 껍질 하나 갖지 못한 채
자꾸 깎이고 도려내지고 금이 가면
그 부서짐들로 윤곽을 만들어온 나처럼.
그러나 아무리 도려내도
사라지지 않는 흠멍이 있다.
차갑게 굳은 흙의 기억은
아직도 나를 떠나지 못하고
묵묵히 남아 있다.
아마도 나는
흙 속에서 너무 오래 살았던 것 같다.
버려진 흔적까지
몸에 새겨 넣을 만큼.
<나의 기록>
흙연근, 흙당근, 흙무, 흙감자...
흙이 잔뜩 묻어있는 채소들을 보니
얼른 그 흙먼지를 씻어내고 싶었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감자칼이 오늘따라 날이 무뎌진 걸까?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아서
뽀얀 속살이 드러난 뒤에도 자꾸만 더 깎아내고 싶어지는 날.
흙 묻은 채소들을 깨끗이 만들어 내는 일이 평소엔 좋았다.
그런데 오늘은 뿌리에 잔뜩 달라붙어
물에도 쉽게 씻겨지지 않는 흙덩어리가 왠지 모르게 질렸다.
티끌 하나에도 괜스레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연근을 썰어보니
동그랗고 송송 구멍 난 예쁜 모양은 커녕
각지고 반이 갈라진 모양만 나왔다.
예쁘진 않아도
내 마음의 오래된 상처들을
이렇게
도려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