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외식에 대한 단촐한 기억
회삿돈으로 매식비를 지출할 수 있게끔 약정한 가게가 몇 군데 있다.
판매하는 음식 종류는 저마다 조금씩 다른데 그 중에서 김밥천국의 음식 맛이 일품이다. 보편적으로 김밥천국이 주는 이미지 때문에 좀 씁쓸하다 느껴질 수도 있는데 사실 여느 김밥천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모님의 음식 솜씨가 좋다. 김밥천국에 대해 안좋은 인상을 갖고 있던 나 역시 음식 맛에 크게 감탄하곤 했다. 쉐프가 상주하는 사기업의 구내식당에 뒤지지 않을만큼 만족스러운 식사였기 때문이다. (물론 사실 격하게 부럽긴 하다) 하지만 요즘은 날이 추워서 그나마도 발걸음이 뜸해졌다. 외투를 주섬주섬 챙겨서 나간다는 것 자체가 꺼려질 정도로 바깥 공기는 차디 찼다.
그래서 한 동안 ‘대성장’에서 배달 주문을 했다.
사무실이 비좁아 먹을 자리도 마땅하지 않았지만 강추위에 실내 취식을 고집했다. 밤이면 바람은 더 차가워졌다. 또 다른 매식식당인 대성장은 홍보문구에 신속배달이라고 쓰여 있는 것과 달리 매번 주문한 지 1시간쯤 뒤에 퉁퉁 불은 면이 오곤 했다. 기다린 보람이 없을 정도로 맛은 기대 이하였다. 불맛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을만큼 미적지근하게 식은 짜장면을 애써 입 안 가득 밀어넣었다. 외식을 하지 않는 이상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은 탓에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도 짜장면과 군만두를 먹다보니 마치 올드보이가 된것 같고 입에 너무 물렸다. 때문에 오랜만에 나가서 먹기로 했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평소 자주 들르지 않던 식당엘 갔다.
사장 내외가 불친절하기로 유명한데다가 음식도 늦게 나와 직원들이 선호하지 않는 곳이었다. 게다가 우리에겐 이미 김밥천국이 있었다. 저렴한 가격에 그렇지 않은 맛을 자랑하는 제1호 식당의 매력 덕분에 다른 식당은 선호도가 떨어졌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다른 메뉴가 당겼다. 따뜻한 국물을 먹을 요량이라 한식 메뉴를 다양하게 내놓는 그 집엘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손님을 향한 찌릿한 시선이 느껴졌다. 빠르게 구석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사장님을 호출했다.
“사장님!”
거짓말 안 하고, 네 번은 불렀던 것 같다. 식당에 손님이 바글바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결코 구석에 있는 내 일행쪽을 바라보지 않으셨다. 들은체 만체를 하는 건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오히려 새로 온 손님에게 물티슈와 생수통을 가져다주러 떠나셨다. 오는 건 순서가 있는데 서빙하는 데는 순서가 따로 없었다. 익숙한 무관심이자 냉대였지만 사람을 기억하고 차별하는 게 아니라 그저 정말 제멋대로이신 분이라 그저 쓴웃음을 짓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주문을 해야했다. 주어진 저녁 시간 1시간 안에 주문 하고 밥을 먹어야 한다. 네 번 넘게 사장님을 부르고 나서야 물티슈와 생수통을 든 쟁반이 나타났다.
“저희 동태탕이랑 갈치조림 주세요.”
겨우 주문을 했다. 사장님은 뒤돌아서서 아내 분께 주문한 메뉴를 전달했다. 내 일행이 앉은 자리에서 머지 않은 거리에 주방이 있었다.
“참나, 메뉴를 하나로 통일하지 뭘 다르게 시킨대? 다르면 오래 걸리는구만. 근데 갈치는 왜 먹겠다는 거야? 귀찮게시리.”
대놓고 들리는 손님 험담이 참 신선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충분히 예측했기에 별로 놀랍진 않았다. 안들린척하며 앞에 놓인 물티슈 비닐을 뜯으려 하는데 대체 어디에 뒀던 건지 음식물이 잔뜩 묻어있었다. 순간 흠칫해서 다시 자리에 내려놓고 식탁 한 켠으로 물티슈를 밀어두었다. 일행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는데 서로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다들 이 상황을 코미디로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 내외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다. 그 사실이 그들의 불친절함이나 잘못된 위생 관념을 미화시킬 순 없지만 대놓고 뭐라 할순 없었다.
반찬이 놓이는 순간에도 차렷 자세로 있어야 한다.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정신 때문에 반찬을 함께 내려놓는다고 손을 갖다대면 차가운 시선이 박히게 된다. 반찬 접시의 위치도 놓인대로 두고 가급적 손대지 말아야 한다. 옮겼다간 한소리를 듣기 쉽다. 또한 다 먹은 반찬의 리필도 대체로 늦기 때문에 아껴먹는 게 상책이다. 메인 메뉴가 나오면 비로소 한시름 놓인다. 가끔 메인 메뉴와 함께 잔소리나 먹는 요령 같은 게 전달되기도 한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처음엔 놀랄 수 있지만 이 상황이 B급 코미디다 생각하면 그저 웃어 넘길 일에 불과하단 걸 깨닫는다.
음식 맛은 그 때 그 때 다르다. 하지만 함께 먹은 사람들 말로는 후추로 시작해서 후추로 끝나는 맛이라고 한다. 입맛이 섬세하지 못한 나는 그냥 '해동된 맛'으로 느낄 뿐이다. 오랜 세월 부부가 운영해 온 이 식당은 희한하게도 회사의 매식식당이면서 가끔 들르는 사람들로 적당히 자리가 차 있다. 불친절한 태도에 익숙해진 것인지 들르는 사람들은 별 불평없이 주는 대로 먹고 간다. 만약 TV 프로그램에 이 같은 사정이 공개되었더라면 온갖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을텐데, 손님이든 주인이든 서로에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정말 신기한 점이다.
그렇게 또 새해 들어 처음으로 밖에서 먹은 저녁이었다. 새해 맞이 병치레를 하느라 며칠간 입맛을 잃었다가 다행히 오늘부터 밥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런 김에 선택한 평소와는 다른 메뉴였다. 맛있다 평할 순 없지만 참 요상하고 특이하다고 평할 순 있는 그런 집.
불친절을 반참 삼아 내놓는,
알 수 없는 매력의 가게였다.
*글을 읽으며 혹시라도 불쾌함을 느꼈을 일부 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자못 불쾌한 상황에 맞서 싸우기보다 블랙코미디로 생각해 저만의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상황을 풀어쓴 글입니다. 그러니 그저 대수롭지 않게 허-하고 웃고 넘어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글쓴이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