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무정한 현실에 짓밟혀도 생존을 위해 나는 오늘도 버틴다
*본 글에는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내용에 대한 줄거리(결말 포함)가 들어 있습니다.
매일같이 작업자들은 사무실에 모여 작업복으로 환복 한다. 그리고 작업 장소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데 모여 구호를 외친다. "우리는 생명, 우리는 빛, 안전제일" 영화에서는 이 구호가 여러 번 반복해 등장한다. 언제부터 외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벽면 어딘가에 적힌 낙서를 볼 때 꽤 오래 전부터 이어온 전통인 것 같았다.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가 아니라 그저 할 일을 할 뿐이라는 무미건조한 톤이었지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외침을 그들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소위 회사에서 잘 나가던 시절, 정은에게 인사고과를 잘 받는 일은 쉬운 것이었다. 남들이 잘 해내지 못하는 일도 그녀는 척척 해냈다. 동기들보다도 그 성과가 우수해 촉망받는 재원이었다. 하지만 시골 변방으로 쫓겨난 뒤 그녀는 'D'라는 평가를 받는다. 해고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는 '경고'다. 회사의 시나리오대로 일은 진척되고 있었고 그녀는 이를 저지해야만 했다.
때문에 사업장 내에서 철저히 이방인으로 지냈던 정은은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초조해졌다.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녀의 미래가 불안해 질 게 불 보듯 뻔한 데다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그녀는 나머지 공부를 택했다. 그녀는 일과 후 그리고 주말까지 사무실에 나와 혼자 책을 보며 업무을 익혔다. 그렇지만 해본 적이 없는 일인 탓에 실력이 늘긴커녕 겨우 원리만 이해하는 수준에 그칠 뿐이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그 동안 그녀가 남들에게 선을 그어온 탓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소장이 일정상 작업에 함께하지 못하자 본인이 대신 가겠다고 자원했다. 처음으로 작업자들 틈에 섞여 일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다들 못미더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지만 사정상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동반했다. 일터로 떠나기 전 작업복을 고르는 과정에서 그녀는 또 하나의 진실을 마주한다. 남은 작업복이 형편없는 이유가 바로 원청에서 별도의 예산지원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제 돈으로 지켜야 하는 자신의 생명. 회사는 작업지시 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하고 있었다. 때론 노동의 대가가 사고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도 말이다.
송전탑을 보수하는 일을 하기 전까지 정은에게 송전탑은 스쳐지나가는 존재에 불과했다.
일상의 편리함을 누릴 줄만 알았지 고압의 전류가 흐르는 위험을 무릅쓴 노동자들의 험난한 사정을 헤아려본 적은 없었다. 그의 삶 역시 치열하고 바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래서 까마득히 솟은 위를 바라보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자세히 들여다 본 송전탑은 그녀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터득해 온 그녀는 송전탑 앞에서 걸음을 멈춰섰다. 결국 다른 작업자들이 작업을 끝낼 때까지 그녀는 한 발짝도 내디디지 못했다. 경험이 전무한 일이라도 내가 노력하면 남들만큼 할 거라 믿었는데, 정은은 끝내 오르지 못한 송전탑만 멀거니 바라봤다.
정은은 결국 이대론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고소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약을 처방받았고 팀의 막내라서 '막내'로 불리는 서충식에게 알바를 할 생각이 없느냐며 자신을 가르쳐달라고 제안한다. 이미 세 명의 자매를 키우는 아버지로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던 그에겐 솔깃할 거라 생각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은이 배울 의지가 없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해 거절한다. 현장 평가가 예정되어 있어 잔뜩 예민해진 정은은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과는 달리 따라주지 않는 몸을 원망한다.
결국 막내에게 제안한 부탁이 거절당하고 난관에 부딪힌 정은은 또 다시 편의점에서 소주 팩을 샀다. 소주를 사기 몇 시간 전, 정은은 막내와 함께 하산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막내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교대시간이라며 그녀를 내버려두고 먼저 내려갔고 깊은 밤이 되서야 그가 일하는 편의점에 도착한 정은은 그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은 격해진 감정으로 싸우게 된다. 정은은 스스로를 원망하다 못해 제 허물을 씌울 다른 대상이 필요했던 상황이었고 막내는 고달프게 돌아가는 제 삶에 지친 상황이었다.
정은: 열심히 일하면 뭐합니까? 대우도 못 받으면서.
막내: 우리가 무서운 거는 해고에요. 그런데 박 대리한테는 해고보다 사망이 문제겠어요.
정은: ...해고든 사망이든, 그게 뭐가 달라요?
정은은 지쳤다.
몸 구석구석 쓰지 않던 근육을 움직이다 보니 몸에 전에 없던 상처가 생겼다. 지친 몸만큼이나 마음도 한 없이 복잡했다. 언젠가 사무실 직원들이 그를 부르는 말처럼 '박 대리'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힘들더라도 견디면 더 나은 내일이 올 거라 믿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현행법과 제도는 질긴 싸움 끝에 승패의 결과를 확정지을 순 있어도 당장의 불이익으로부터 근로자를 보호하진 못했다. 그녀는 회사라는 골리앗을 상대로 한 싸움에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한편 오랫동안 비워져 있었던 제 자리를 다른 동료가 채울 것이란 소식도 접했다. 제 생을 바쳐 일구어 온 자리였는데 이제 남의 것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 자신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그녀는 망연자실했다.
그런 정은의 상황을 좀 더 알게 된 막내는 노골적인 평가원들의 핍박에 당하지 않도록 그녀를 도울 결심을 했다. 뒤늦게 정은은 막내로부터 여러가지 원칙과 주의점 그리고 일 하는 방법 등을 배운다. 서툴지만 차근차근 해내며 그녀는 작은 성취감을 얻는다. 발을 떼는 게 무서웠지만 막내의 따뜻한 격려에 힘입어 앞으로 나아갔다. 혼자의 힘으로만 해내려고 했다면 천재가 아닌 이상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파트너가 되어 신뢰관계를 쌓아갔고 서로의 삶에 대해 비로소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정은: 막내 씨는 알바가 몇 개에요?
막내: 사는 게 알바에요.
날씨가 좋지 않았다는 것과 서로에게 무관심하던 두 사람이 파트너가 되었다는 점은 모두 결말의 복선이 되었다. 정은이 이제 막 송전탑에 오르려고 발을 뗐을 때 그녀는 떨어지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감전을 당해 온몸이 검게 그을린 채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그는 남긴 게 별로 없었다. 한편 장례식장 한 켠엔 사고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원청 직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린 자식들을 불러 모아 합의금 서약서에 사인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사망한 근로자의 안위나 사고경위에 대해 조사하는 대신 사고 사실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정은은 그들의 뻔뻔한 태도에 치를 떨었지만 제3자인 그가 직접적으로 나설 수 있는 방법은 마땅히 없었다.
설상가상 기상이 악화된 상황에서 어느 작은 섬마을 모든 가구가 단전이 되었단 소식이 전해졌다. 그 때문에 장례식장마저 전기가 나갔다. 우두커니 어둠 속에서 벽에 기댄 채로 생각에 잠겨 있던 정은은 이내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장비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자신을 향해 고함을 치는 원청 관리자들을 뒤로 한 채로. 마침내 문제가 발생한 송전탑에 도착한 그녀는 한 발 한 발 올라간다. 처음 두려움에 주저했던 걸음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결국 혼자의 힘으로 올라간 그곳에서 그녀가 수리를 마친 뒤 섬마을 가구들에 다시 불이 들어오는 걸 바라보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는 끝난다.
믿고 의지했던 동료의 빈자리, 혼자의 힘으로 올라야 하는 탑.
하지만 그곳에 그녀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고
그녀가 가야하는 길이 있었다.
라는 나래이션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암시는 없지만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그에 파묻히지 않는 한 명의 용감을 여성을 그리며 말이다.
정은과 그의 작업 동료들은 각각 제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저마다의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를 보듬어 주기엔 각자의 견뎌야 할 삶의 무게가 너무 버거웠다. 일일이 남의 고충을 헤아리기엔 제 자신을 위해 쏟을 정성도 부족했다. 그 모습이 우리네 현실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스치듯 지나가며 마음 아파하지만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못하는 타인의 삶과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해야만 하는 적자생존의 사회. 가슴 아픈 일이지만 코로나 사태로 더 심해진 난관을 뚫어야 하는 지금의 현실이 더욱 생각났다. 한편으론 정은을 바라보며 답답한 마음도 숨길 수 없었다. 한 때 자신의 열정을 바쳤던 회사에 뒤통수를 맞고 비참한 심정으로 자신을 좀 먹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국제노동기구의 설립 취지 등을 담고 있는 '필라델피아 선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특히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노동력이 더욱 경시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더 새겨야 할 말이라 생각한다. 또 해고사유로 자주 쓰이는 '잉여인력'이란 표현의 기저엔 경영이 효율성과 비용절감이라는 관점이 깔려있다. 그런데 이 말이 사람이 오고 가는 일에 함부로 써도 되는 표현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결국 평가를 통해 걸러지는 사람들이 맞이할 결과는 당연시하면 서도 겪을 고통에 대해 우리가 너무 무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버텨야 한다. 버티면 산다.
영화는 팍팍한 삶 속에 내던져진 우리에게 그런 메시지를 남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