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가 된 현실을 버티는 강인함, 미나리

영화 <미나리> 리뷰

by 흔한여신

*본 글에는 영화 '미나리'의 줄거리가 일부 들어 있습니다. (스포일러 주의)


개봉하기도 전에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했다는 소식에 힘입어 한국에서도 흥행하고 있는 영화, 미나리. 흔하디 흔한 한국 식재료를 제목으로 내세운 이 영화에 쏟아진 찬사 때문에 보러 가기 전부터 영화에 대한 기대가 많았다. 이전에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주제를 접한다는 것에 대한 흥미가 있었다. 다만 예산이 많이 투입된 영화도 아니고, '이민자의 정착을 위한 고군분투기'라는 대강의 줄거리를 봤을 때, 화려한 볼거리 대신 심도 깊은 서사가 담겨 있겠지 했다.


이미 관람한 사람들이 올린 영화에 소개글에서 자주 보인 문구는 '가족영화, 감동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 배우의 열연'과 같은 것들이었다. 특히 배우 윤여정이 연기한 K-grandma(할머니)의 역할이 인상 깊었다는 내용이 많았다. 한국인이라면 공감할 만한 일반적인 할머니 모습을 답습하지 않아 더 재밌어졌다는 캐릭터. 한국인에 대한 내용이면서도 결코 한국적이지만은 않다고 하는 소개가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여러 긍정적인 평가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나는 극장을 찾았다. 한국의 정서를 재치있게 담았다고 하는 외국 영화, 미나리를 보기 위해.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지만 결코 한국적이지 않은 내용으로 영화는 전개된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80년대다. 당시 한국은 한국 전쟁 이후 전쟁이 남긴 생채기가 아물고 경제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던 시기이자 개발도상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인권이 유린되던 시기였다. 영화의 주인공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인 부부. 그들은 한국에서의 삶을 견디다 못해 이민을 결심했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낯선 땅이었지만 '기회의 땅'으로 여긴 부부는 미국에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린다. 가진 게 몸뚱이 뿐이라해도 부부가 합심하여 노력하다보면 어떤 역경도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어느 새 부부는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지만 미국에서의 살림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골 변두리에 위치한 그들의 삶의 터전은 이민자의 험난한 정착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영화 도입부에 그들이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내인 모니카(한예리 분)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크게 당황한다. 남편이 마련한 그들의 집은 바로 넓은 마당 한 가운데 서 있는 '트레일러 하우스'였다. 남편 제이콥(스티브 연 분)은 오래 전부터 농장주를 꿈 꾸고 있었고 농사 짓기에 적합한 땅을 물색한 끝에 트레일러 집을 찾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새 집으로 이사한 첫 날부터 근처에 토네이도가 지나가는 일이 발생했고 집 곳곳에서 물이 새는 걸 틀어막으며 아내는 불같이 화를 낸다. 어째서 우리가 이런 곳에서 살아야하느냐고 남편에게 책임을 따져묻는다. 외롭고 험난한 외국 생활을 버티는 것만 해도 힘든데 제이콥은 아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는커녕 제 꿈을 이루겠다는 데 더 관심을 쏟고 있었다. 물론 제이콥은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항변하지만 당장 심장병을 앓고 있는 둘째 아들의 건강이 늘 걱정이었고 과연 농삿일이 성공을 거둘 지도 미지수였다.


농장주를 꿈 꾸는 제이콥은 사실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고 있었다. 아내인 모니카도 생계를 위해 그와 함께 병아리 감별사 일을 시작했다. 흔히 미국으로 건너간 한인이라면 보통 세탁소를 차리는 게 아닌가 하는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신선한 설정이었다. 하지만 타지에 온 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삶은 불안정하다. 호기롭게 시작한 농장일 역시 지하수가 고갈되어 물이 나오지 않는 등 문제가 생겼고 성사됐는줄로만 알았던 거래가 막판에 취소되는 등 어려움이 계속 따른다. 그럼에도 제이콥은 농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가족보다 성공을 우선시하면서 모니카와의 갈등은 거세진다.


부부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가운데 새로운 인물인 순자가 등장한다.


이런 두 사람 사이에 찾아온 사람이 바로 모니카의 엄마 '순자'다. 그녀는 일 하는 부부를 대신해 아이와 집 안을 돌보기 위해 이국 땅을 찾았다. 그녀가 화면에 등장하자마자 눈에 띈 건 역시 K-할머니 다운 '반찬종합선물세트'였다. 딸 모니카가 고추가루와 멸치에 눈물을 글썽이는걸 보며 순자는 "울어? 멸치 때문에?"라며 딸을 달랜다. 그리고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 받아두라며 돈 봉투를 건네는 등 딸에게 든든한 응원군 역할을 자임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그 나이 할머니스럽지 않은 '쿨한' 성격이다. 그런 그녀는 딸 모니카가 바퀴달린 집에 사는 제 처지를 보이는 걸 부끄러워 하는데도 뭐 어떠냐며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상황이 어떻든 제 생각대로 판단하기보다 낯선 환경에도 적응력이 뛰어난 인물이다. 또한 집 안에서 쿠키를 굽거나 아이들에게 음식을 해 먹이는 대신 오락용으로 가져온 화투를 가르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게다가 그녀는 오자마자 데이빗에게 주변을 소개해달라며 근처를 돌아다닌 끝에 한국에서 가져 온 미나리 씨앗을 심을 공간을 발견하고 미나리를 심기도 했다. 나이든 이들이 대개 그렇듯 낯선 환경에 위축되어 집 안에만 갇혀 있지 않을까하고 예상했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데이빗(모니카의 아들)은 그런 순자가 못마땅하다. 그는 순자가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라며 싫은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결국 자신에게 한 없이 다정하고 따뜻하기보다 자신을 놀리는 등 할머니답지 않은 그녀의 행동에 데이빗은 오줌물을 가져다 주고 만다. 이 일로 데이빗은 부모님에게 크게 혼날 뻔 하지만 강아지풀을 가져오는 기지를 발휘한 끝에 회초리를 맞는 벌은 피한다. 그 이후로 데이빗은 조금씩 순자에게 마음을 연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 할머니임에도 나쁜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어딘가 잘 맞는 구석이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족의 시련은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된다.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노력하고 있지만 뿌리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들이 미국사회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이방인으로서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일자리가 한정적인데다가 미국 내 인종차별 역시 감당해야 할 문제였다. 그러한 보이지 않는 차별과 이질적인 시선이 못내 불편했던 모니카는 결국 친구를 사귈 거라 기대했던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이웃과의 연결고리가 별로 없어 직장동료와의 대화를 제외하곤 고립되어 있는 그녀에겐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힘겹게 농사 지은 끝에 어떻게든 수확물을 거두게 되고, 아들의 심장병이 나아가고 있다는 희소식도 잠시 가족은 또다른 불행을 맞이한다. 특유의 유머감각과 넉살로 가족 간 불화를 잠식시키곤 했던 순자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는가 하면, 애써 일궈 온 수확물을 보관한 나무 창고가 불타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쯤되면 누구 하나 죽게 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 쉴새 없이 들이닥친다. 불길에 활활 타오르던 '제이콥의 꿈'을 그들과 함께 바라보며 이 영화는 비극적인 클리셰 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하지만 결국 가족은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서로에게 지지대가 되어주기로 한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란다는 미나리처럼 그들은 뿌리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한국식 결말이 몇 년 후의 모습을 그리며 주로 닫힌 결말을 그리는 반면 영화에선 그들의 현재가 어떤지 알 수 없다. 그저 헤어짐을 결심하기도 했던 이전과 달리 여전히 그들은 함께 살고 있고 전보다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 순자가 일군 미나리 밭을 찾아 미나리를 뜯는 장면을 통해 아마도 그들이 단단히 이국 땅에 뿌리내린 이민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이 무성한다. 결말은 각자 상상하기 나름이겠지만 그들이 부귀영화를 누릴 정도는 아니더라도 마침내 좋은 기회를 얻어 변두리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처럼 열린 결말로 끝을 맺은 영화이기에, 또 계속해서 그들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기에 현실적인 고통이 함께 느껴져 답답함이 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장면들을 곱씹어 보면 볼수록 그들의 아픈 서사만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현실의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의 땀방울이 기억난다. 그토록 많은 빚을 져가며,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을 져가며 그들은 끝내 함께하기를 선택했고 극복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절망 속에서 서로의 손을 놔버리고 때론 제 목숨마저 내놓는 지금의 각박한 현실과 비교해보면 굉장한 희망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의 결말이 찜찜하게 끝난다고 느낀 일부 사람들과 달리 영화에 등장하던 따뜻한 시골 풍경과 가족의 소소한 미소가 더 떠올랐다. 결국 감독은 이 사실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동양인으로서 그리고 이민자로서 남의 터전에 자리잡는 일이 이토록 고통스러움을 보여줌과 동시에 여전히 그들은 제 터전의 주인이 되기 위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 ‘미나리’는 우리 삶에 주어지는 시련이 감당하기 어려운 때가 오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묵묵히 이겨내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척박한 환경을 뚫고 자라나는 '미나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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