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밥이 되어라’의 명장면
다..정아.. ㅅ..삼촌왔어.. 삼촌.. 내일 또 오..ㄹ게.. 잘..지내고 있어야 하ㄴ..다?
반복해서 그녀를 부르는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방문이 열렸다. 부르는 목소리가 성가셔서일까 아니면 그 부름에 한 마디 쏘아붙여줄 요량이었을까. 방 안에 갇혀 있던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마음도 온전치 못한 상태였지만 화가 잔뜩 담긴 채로 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잔뜩 수척해진 얼굴이었지만 분노가 이글거렸다.
그녀가 지독한 슬픔을 짊어지고 방 안에 갇히게 된 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오랜 친구를 비방하고 그 치부를 공개해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한 계략을 꾸몄던 것.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계획은 실패했고 책임과 비난의 화살은 자신에게 돌려졌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잘못된 욕심의 대가가 너무 컸다. 모두가 자신의 잘못을 탓하고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것에 대한 치욕감과 그토록 증오하는 죽마고우를 밀어내려던 계획이 실패했다는 데 대한 좌절감. 그리고 여전히 그 친구와는 달리 자신은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박탈감. 그 모든 것들이 일시에 그녀를 휘감으며 그녀의 마음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됐다.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분노가 되어 표출되었고 급기야 제 손을 수세미로 벅벅 닦는 등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 보는 부모님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를 달랠 만한 사람을 찾았다. 패배감에 휩싸여 어쩔 줄 모르고 날뛰는 마음을 가라앉혀줄 사람을. 하지만 쉽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다가가려 노력해도 그녀의 마음이 굳게 닫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삼촌 용구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는 남들에 비해 지적능력은 떨어지지만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그가 노크한 건
얼어버린 그녀의 마음 속이었다.
마침내 방문이 열리고 오랜 만에 마주하게 된 두 사람. 용구는 놀란 한편 붉어진 눈시울로 ‘다정’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나마저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아무런 대화가 오고 가지 않은 그 일순간에 무언의 이야기가 오고 간 것만 같았다. 말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네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랐다고. 그런 네가 슬픔에 빠져 세상에 등 돌리고 있는 동안 많이 걱정했노라고. 지금도, 앞으로도 네가 항상 잘 지내길 바라노라고. 그렇게 그의 눈빛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과연 용구가 다정이를 위로할 수 있을까 했던 주위의 걱정과 달리 다정이는 그 앞에서 마음을 열고 울음을 토해냈다. 마음에 진 응어리는 남들이 아는 것보다 더 깊었을 것이다. 그런 괴로움을 그녀는 따뜻하게 애정을 쏟는 삼촌 용구 앞에서 털어놓았다. 몇 마디 대화가 오가지 않았는데도 모든 게 이해되는 그런 장면이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드라마 ‘밥이 되어라’에 나온 한 장면에 대한 설명이었다. 특히 위에 서술한 장면이 크게 와닿았던 건 상황 자체가 주는 극적 효과도 있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한 몫을 한 게 아닌가 한다. 상대 배우가 발군의 연기력을 발휘해 눈빛을 쏘아댄 덕분인지 ‘다정’ 역을 맡은 배우도 순식간에 벅찬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현장 상황을 정확히 모르니 그 표정에 동화된 게 맞는지 스스로 상황에 맞춰 잘 감정을 연기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브라운관 너머의 나에게 그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을 정도였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밥이 되어라’는 저녁 식사 시간 때에 방영되는 일일 드라마인데 보면 볼수록 매력이 있는 드라마다. 특징을 꼽아보자면 ‘순한맛’이 주는 특유의 감성이 좋다. 매운맛의 자극적임보다 오랫동안 머릿 속을 매도는 그런 느낌이다. 특히 자극적인 소재와 황당하고 극적인 전개로 눈길을 사로잡으려는 다른 화제성 드라마들에 비하면 꽤 유치하단 느낌이 들지만 볼 때마다 힐링이 된달까. 악역이 사이코패스라거나 주인공이 슈퍼 히어로라는 식의 비현실적인 설정이 아니라, 실제로 있을 법한 인물들이 그럴 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모든 등장인물의 사연과 행동에 다 공감하는 건 아니지만 특히 극중 ‘다정’의 서사에 많이 공감이 간다. 재능이 있는 친구를 뛰어넘지 못해 불안해하고, 따라잡으려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모습이 내가 아등바등하는 모습과 겹쳐보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으려는 것도 아니요, 그녀가 느꼈을 만한 자격지심이 이해가 됐다. 노력하는 만큼 인정받고 싶지만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아야하는 것만 같은 비참함이 느껴졌다. 채워지지 않는 부분에 대한 끝없는 갈증이 내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녀에 비해 독기는 빠져 있다는 게 다르지만.
한편 그녀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악에 받칠수록 그런 모습을 걱정하는 주위 시선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모르는 새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제3자로서 지켜보며 내겐 모종의 깨달음이 생겼다. 나 역시 자신만의 골방에 틀어박히는 동안 내 주변의 시선이 저런 것이었으리라 싶었다. 나만의 생각 안에 갇혀 있는 동안 나는 끊임없이 내 주위와 내 운명을 탓했고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왜 나는 안되는 걸까.’라는 질문에 속시원한 해답을 찾는 게 그토록 어려웠다. 그래서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좌절한 다정이의 모습에 많이 공감이 갔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 역시 슬픔에 취해 놓쳤던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두 배우가 서로 얼싸 안고 눈물을 흘리는 열연을 토해낸 그 짧은 장면이 지나가는 동안 내 머릿 속에도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다. 밥 먹다가 연기자들의 표정에 뭉클해져 눈물이 차오르기도 했다. 다정이가 행복하기를 함께 응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편 ‘드라마는 자고로 이런 맛이 있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워서 혀가 불타는 것만 같은 화끈함이 아니라 마음 깊이 잔잔한 여운을 남길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저녁식사 시간을 훈훈함으로 데울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들을 했다.
밥처럼 참 따뜻한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