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사람에 대한 단상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교과서에서 처음 만난 뒤로 좋아하게 된 시. 그 땐 시의 언어를 찬찬히 곱씹어 볼 새도 없이, 단어 하나하나가 담고있는 설렘과 기대를 들여다 볼 틈도 없이 그저 규격화된 해설을 외우기 바빴다. 학교와 학원에선 시를 음미하는 법을 배우기는커녕 기계적으로 문제풀이 하고 의미를 외우는 법을 가르쳤다. 단어마다 동그라미를 치고 밑줄을 긋고 그렇게 주입식 암기를 했었다. 문제를 풀어 답을 맞히려면 그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낭독 역시 교육과정에 불포함된 채로 각자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시를 읽은 여운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수능 준비를 하면서 지겹도록 봤기 때문이 아니라 시를 읽으며 외로이 길섶에 피어있던 꽃이 듣어 누군가에게 발견된 것 같은 그런 상상이 절로 그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삶의 장면마다 떠오르는 하나의 심상이 되었다. 특히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순간, 남에게 나를 인정받지 못해 고통스러운 순간 그리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그런 간절한 바람이 드는 순간이면 그 시가 또렷이 생각났다.
힘든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면
그를 반겨줄 이가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 때
눈물겨운 심정으로 이 시를 떠올렸다.
얼마 전까지 나는 타인의 관심에 목말라했다.
한 때 골목대장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결과물이다. 여러 다른 사람들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특유의 친화력으로 먼저 인사를 건네고 무슨 말에도 환한 웃음을 지어줬던 건 사랑받고자 한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마음 깊이 사람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어릴 적엔 빨리 어른이 되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단 강박이 있어 깔깔거리며 웃지 못했었다. 그런데 괜찮은 직장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면의 천진난만한 구석을 좀 더 꺼내 놓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 나는 남의 사소한 행동도 곱씹어보며 감사해했고 작은 친절에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이 기뻤던 때도 있었다. 그런 감사한 마음을 보답하려 했던 나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섰다. 가만히 있기엔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모두에게 쉽게 다가섰고 쉽게 마음을 열었다. 그 땐 그런 내 선택이 옳다고 믿었다. 그런 나를 본 사람들은 점점 내가 나서는 게, 먼저 말을 건네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내 밝은 에너지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이라 믿었고 나 또한 그러리라고 맹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모두 내 착각이었다. 지금의 행복이 어쩌면 영원할 것이란 기대에 너무 들떠 있었던 탓이다. 사람들은 길섶에 피어난 꽃에 쉽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잠시 관심을 주는 듯 해도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지는 것처럼 관심이 금세 식어버린다. 오래도록 꽃의 곁을 지켜 보는 이는 극히 드물다. 각자의 인생길을 걷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잠시 쉬어가는 길이 멈출 순 있겠지만 더 걸어야할 길이 한참 남았으니 영원히 멈춰설 순 없다. 서른이 되어서야, 사람에 대한 나의 해맑은 기대가 인간관계의 경험이 미숙해 생긴 순진한 착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시각각 삶이 주는 교훈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반성하고 성장한다.
가지고 있던 생각도 쉼없이 엇갈리고 뒤틀린다.
그래서 그 땐 옳았던 게 지금은 틀린 게 된다. 지금은 그 오답을 열심히 오답노트에 정리해서 다시 또 마음이 다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내면을 다독이고 있다.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무엇이 된다는 건 정말 희박한 확률의 기적이라는 것. 내가 사랑했고 사랑받으리라 믿었던 이들은 그저 인생의 여로에서 잠시 만난 내가 어여뻤다 기억하고 말 뿐이라는 것. 그런 결별에 무심해져야 한다는 것. 지금의 슬픔 역시 한순간으로 지나갈 테니 너무 슬픔에 매몰되지 말 것. 그리고 앞으로는 가장 사랑하는 내 자신을 제외하고 모든 것에 마음쓰지 말 것.
살아온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인간관계엔 명답이 쉽게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롯이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과도 어긋나기 일쑤고 한 두 차례 보다 말 것이라 생각한 이와는 어쩐 일이지 꾸준히 마주치도 한다. 또 가고자 했던 길이 막혀 다시 돌아가는 길에 샛길을 만나서 아예 다른 길로 들어서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이루지 못한 꿈을 남몰래 품고 사는 이들도 많다. 세상이 참 요지경이 아닐 수가 없다.
하긴 초등학교 때 짝궁을 정하는 일도 내 맘대로 어쩌지 못했었다. 누구랑 짝이 됐으면 좋겠다 하는 그 사소한 바람조차도 무작위라는 확률에 번번이 무너지고 말았다. 인생에 내 뜻대로 되는 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크게 기쁠 일보다는 좌절할 만한 싱황이 더 자주 오는 게 아닐까 한다. 그런데 또 신기하게 한참 우울할 적엔 그 수렁에 영원히 헤어나오지 못할 것만 같다가도 어느 순간 여기가 극락인가 하는 가슴이 탁 트이는 순간을 맞는다. 그래서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옛말도 잘 들어맞는다.
나라는 존재를 그림자 속에 꽁꽁 감춰두고 있다.
요즘 나는 내게 벽지같은 존재가 되라 조언했던 어느 선배의 말처럼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하게 지내고 있다. 남들의 웃음소리에 가려지고 왁자지껄한 이야기 속에 감춰지는 그런 존재. 구름 뒤에 가려진 해같은 존재. 아무에게도 의미 없을 길섶의 이름 모를 풀포기가 되어 지내고 있다. 내가 특별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난 마음이 겪는 모진 시련인 셈이다.
종일 희미한 숨소리만 들리는 채로 발걸음 소리와 말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를 오가고 있다. 강한 햇살에 비추어봤을 때 겨우 존재감이 드러나는, 허공을 떠도는 작은 먼지처럼 소리 없이 지낸다. 마음 깊이 있는 어둠과 슬픔을 애써 숨긴 채로. 그렇게 남들의 그림자 속에 산다. 어쩌다 괜히 존재감이 드러나는 것조차 거북해 미소도 거두고 입도 꾹 다문 채로 앉아 있다.
세상에 존재하지만, 그 존재감을
명확히 알 수 없는 희미함으로 존재한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어떤 의미가 되기를 바란다. 타인의 관심이 아직 고프다. 내가 존경하거나 사랑해 마지 않는 그 타인과 생각과 마음을 나누며 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되고 싶다. 그리고 그런 타인이 내 주위에 많기를 바란다. 벌써 삼십년 가까이 꿈 꿔온 바람이고 아직까지도 이루지 못한 꿈같은 일이지만, 언젠가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지금은 그 바람이 실낱같은 희망에 불과해 끝없는 절망을 맛보고 있는 중이지만, 누군가에게 한없이 사랑받는 그런 햇살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그렇게 내가 한껏 웃을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지금의 어둠을 밝힐 한 줄기 빛이
내 하늘에 와 닿기를.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