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이 된 공주
삼십 년 남짓한 인생을 통틀어 '공주님'이란 소리를 들어본 일이 드물다.
나의 어머니는 제 아이가 버릇없게 자랄까 염려해 칭찬에 인색하셨다. 환호를 터뜨릴 만큼 들뜨는 순간에도 결코 평정심을 잃는 법이 없었다. 언젠가 백점짜리 시험지를 나풀거리며 집에 뛰어들어갔을 때에도 잔뜩 흥분한 나와는 달리 어머니는 그저 '고생했다' 혹은 '잘했다'는 말뿐이었다. 서운한 마음에 내가 투정을 부려도 어머니는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일 없이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는 말만 덧붙였다. 과연 엄마가 맞나 싶을 정도로 냉철한 면이 있었다.
사실 어머니는 내가 한 번의 승리에 취해 자만심에 빠지거나, '이제 됐다' 하는 안도감에 다음 단계에 준비에 소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셨다. 그만큼 '지금 이 순간이 전부가 아니'라는 걱정이 앞섰던 거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미래를 준비할 줄 아는 능력이야 말로 내게 필요한 거라 생각하셨다.
하지만 그게 나는 늘 못마땅했다.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한 순간에도 맘껏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절제해야 한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격한 반응으로 호응해주어도 모자랄 판에 사뭇 냉정한 반응을 보이는 게 마뜩지 않았다. 그래서 감정 표현이 많지 않았던 어머니와 다르게 감정 표현이 중요했던 나는 어머니에게 서운한 일이 꽤 자주 생겼다. 호들갑을 떤다고 해서 현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거나 자아도취되는 게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내게 맘껏 기뻐할 틈을 주지 않았다. 물론 나의 서운함과 별개로 어머니는 딸리 '공주병'에 걸려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 걸 보느니 냉혹한 현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냉정함'을 물려주고자 했다.
그러한 가르침 속에서 나는 한 없이 보호받고 사랑받는 '공주' 혹은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존재가 아니라 물기 없이 쩍쩍 갈라진 땅에서도 제 목숨을 부지할 줄 아는 '작은 풀 한포기'로 자랐다. 덕분에 거친 풍파에도 변화무쌍한 환경에도 그럭저럭 적응할 만큼의 생존력을 갖추었지만, 한편으론 스스로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남과의 비교를 일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의 공로를 치하하기보다 끊임없이 자아성찰을 함으로써 능력을 갈고 닦는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그만큼 공허함도 자주 찾아왔다.
그래서 어떤 때는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어떤 때는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며 오락가락했다. 감정의 파고도 상당했다. 겨우 작은 성취를 이룬 상황에서도 마음 속엔 항상 온전히 채워지지 않았다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혹시 뒤처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에 잠시의 휴식과 평화조차 불안하면서도 그걸 동력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힘. 바로 어머니가 물려준 유산의 양면성이었다.
특별히 애정어린 별명이 붙었던 적도 없었다.
한편 장난기가 상당했던 아버지는 어린시절 잠이 많고 게을렀던 나를 '대학생'이라고 불렀다. 참 짓궂은 별명이었는데 지금은 많은 대학생들이 알바와 취업을 위해 이리저리 바쁘지만, 지금으로부터 오래 전 '걱정보다 여유가 더 많았던 대학생'들의 모습에 빗댄 말이었다. 유치원에 가려면 제시간에 일어나 통학버스를 타야했지만 눈 뜨는 것조차도 일이었던 내겐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배려심 넘치는 운전기사님 덕분에 제시간보다 늦게 겨우 버스를 탄 게 수 차례나 됐다. 그런 나를 아버지는 늘 '대학생'이라며 놀렸다. 요즘은 '딸바보'인 아빠들이 많다지만 나의 아버지는 그런 다정함보다 장난기가 더 많은 분이었다.
그 이후에 학창시절을 거치며 수많은 별명들이 붙었지만 대체로 나를 놀리는 게 목적이었던 우스꽝스러운 것들이었다. 행동 특성이나 이름 글자를 딴 게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런 별명조차도 관심의 표현이고 내가 다른 누군가와 친했다는 증거였을 것이다. 별명은 함께 어울리는 사이에 서로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니까. 하지만 어른이 된 뒤로는 별명마저 사그라들었다. 지금은 그냥 '누구누구 씨'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남들처럼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서른이 되도록 나는 다정한 애칭이나 별명이 없었다.
아이고, 예뻐라.
이런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었던 게 아장아장 걸어다닐 쯤이었을까. 아니, 초등학생 때까진 간간이 들었던 칭찬이었던 거 같다. 맡겨진 심부름을 잘 했거나 어른들에게 공손히 인사했을 때 간혹 들을 수 있었던 말. 그런데 크고 나니 상대에게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예쁘단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정말 외양이 아름다운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진심이 담긴 칭찬보단 인사치례와 같은 말들을 더 많이 듣게 된다. 적당히 상대와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 건네는 말. 남이 듣기 좋게끔 그럴싸한 포장지에 담아 건네는 말이다. 하지만 대체로 '상대가 듣고 싶어할 만한 말'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자신의 진심을 담긴 어렵다. 그래서 나는 남들의 가벼운 칭찬에 그저 기계적으로 응답하기 일쑤였다. 그도 그냥 지나가는 말로 건넨 인사였겠지 하는 생각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가볍게 흘려 듣곤 했다.
그런데 서른이 된 지금. 거의 매일 같이 듣는 말이 있다. 바로 '아이고, 우리 공주 왔어' 하며 날 반겨주시는 인사말. 바로 구내식당에서 일하시는 조리사님이 내게 하시는 말이다. 어쩌면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 모두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라 어린 직원들을 보면 더 마음이 쓰이는 걸지도 모른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배식줄에 서 있으면 그 아주머님은 우리 공주 왔느냐며 웃는 얼굴로 반겨주셨다. 처음엔 일회성의 인사치례겠거니, 표현이 좀 과했겠거니 하는 생각을 했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처음과 같은 환대가 이어졌다.
인사를 나누는 그 순간만큼은 나는 늘 '어여쁜 공주님'이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다되도록 여전히 나는 '공주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처음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말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애정어린 관심이 진심으로 느껴져 감사한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였던 날엔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그립고 또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온종일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는 날에도,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 지표면을 달구는 날에도. 밤새 고민으로 뒤척이다가 잠을 설쳤던 날에도, 예상보다 일이 수월하게 흘러가 마음이 가벼웠던 날에도. 언제나처럼 아주머니는 다정하고 따뜻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얼굴이 수척해진 날에는 '우리 공주 무슨일이 있나'라며 안부를 물으셨고, 맛있는 반찬이 나온 날에는 많이 먹으라며 손수 반찬을 더 담아주시기도 했다. 그날 하루가 어땠는지 길게 이야기 나눌 시간도 없고 잠깐 스치듯 얼굴 보는 게 전부지만, 그냥 그 짧은 순간들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몸이 축 늘어진 때에도 직원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만큼은 가벼웠다. 괴로운 생각에 마음이 무거운 날에도 항상 날 반겨주는 이가 있었다. 대단할 것도 없는 인사말이자 큰 의미 없을 '공주님'이란 호칭에 얼어붙은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그건 내 삶에 깃든 아주 사소한 행복이었다.
늘 살아남기 위한 전투를 벌이느라 안간힘을 쓰고 살고 있는 것 같다가도 가끔 이렇게 돌아보면 기억나는 뭉클한 순간들이 있다. 앞으로 나아가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한 순간들 속에는 아주 작게나마 사랑받았던 때가 있었다. 그런 따뜻한 지지와 관심 덕분에 나는 잠깐이나마 미소지을 수 있었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하루에 작게나마 불어넣어진 '생기'는 그런 따스함이 주는 위안같은 거였다. 그래서는 나는 내일도 기다린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왔어?" 하는 그 반가운 인사말을. 매일 같이 그러한 소소한 기쁨 속에서 살고 있다. (물론 대체로 그를 망각하고 지낸다는 게 문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