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흔한여신 Jun 26. 2021

오르막과 내리막

사주풀이를 듣다

  작년 11월쯤 사주를 봤었다. 예전엔 대학입시운, 취업운 같은 주제로 사주를 몇 번 봤었는데 지금 직장에 입사한 뒤로는 처음보는 사주였다. 당시 나는 딱히 고민이 되거나 걱정스러운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내년이나 그 이후의 운이 어떨까 하는 그런 가벼운 호기심으로 본 거였다. 질문했던 내용은 직장 내의 입지 변화, 금전운, 결혼운과 같이 정말 먼 미래의 것들이었다. 그 때는 닥쳐 있는 상황이랄 게 없었고 단지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가벼운 궁금증이 일었던 상태였다.


나: 제가 내년에 직장에서 위치를 옮겨야 하거든요. 아마 내년 하반기일 거 같은데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아무래도 집 근처로 옮겼으면 하는데 가능할까요?
상담자: 음.. 일단 자기는 하반기에 움직이는 운이 아니야. 이동수가 주로 상반기에 있는 사주라 내년 하반기에 이동하는 운은 없어요. 이동수가 들어오는 건 22년 2월 6일 이후예요.


  이 말을 듣자마자 ‘아, 여기 잘 못보네. 돈 날렸다.’고 생각했다. 3년에 한 번 전근을 통해 순환근무를 하는 게 회사 방침인데, 내가 하반기에 이동하지 않는다니 말도 안 된다 생각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 전까진 말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만 3년을 채우지 못했더라도 대략 근무한 지 3년쯤 되면 전근을 갔다. 그 동안 관행적으로 그랬던 터라 당연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믿었다. 곧 이삿짐을 쌀 준비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또 한 군데서 일한 지 3년쯤이 되니 온갖 의욕을 상실한 상태가 되어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렇게 내게는 ‘아름다운 이별’만이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출처 sampleposts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약 1주일 전 쯤 인사이동에 관한 내부방침이 내려왔는데 나와 내 동기들은 전부 만 3년을 채우지 못해 전근 대상에 불포함된다는 내용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다같이 충격에 빠졌다. 나와 마찬가지로 내 동기들 역시 지금 환경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제대로 된 직장생활이 처음이라 멋모르고 의욕이 앞서다보니 쓸데없이 힘을 많이 빼기도 했고 직장 내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상당했다. 적당한 변화가 필요하다 여긴 시점이었다. 하지만 모든 건 마음대로 되지 않듯이 기존의 관행을 깨고 3년을 채운 뒤에 떠나는 것으로 결정됐고 우리는 그 방침에 저항하지 못한 채 망연자실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 그럭저럭 어울리는 게, 원하지 않는 일을 나서서 해야하는 게, 잘 맞지 않는 사람들과 부대끼면서도 겉으론 웃어야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주어진 일도 없이 하루종일 멍하니 앉아 있는 날이면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한 때 나는 동료에 대한 애정이나 팀에 대한 애정으로 힘든 일들을 버텼는데 지금은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다. 내가 힘든 점을 토로할 만한 이가 없다. 각자는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살필 뿐 서로의 일에 참견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어설픈 선배 노릇을 하기엔 어쭙잖은 위치에 놓여 있었다.


  문제는 1년 가까이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홀로 걱정과 불만을 짊어져야 했다는 것이다. 인내심이 닳고 달아 한계점을 뛰어넘은지 오래. 숨통을 조이는 듯한 답답함 속에 내 영혼이 질식해가고 있었다. 불행히도 이런 고충을 헤아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주변의 몇몇 친한 동료한테 넋두리를 하는 게 전부였을 뿐 관리자들은 자신의 아랫사람들에 대해 무심했다.


  그런 내게 순환근무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지금의 지옥을 탈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기회였다. 어두워진 표정을 감추느라 바닥에 시선을 내리꽂고 다니던 내가 다시 마음껏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시작점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stockholmresilience.org


  그래서 다시 사주를 보게 됐다. 작년에는 너무 먼 미래의 것들만을 신경썼기에 당장 올해 상반기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흘러갈지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땐 아예 1년 이내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 물어보지도 않았다. 어리석게도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은 잊은 채 먼 미래에 내가 잘 먹고 잘 살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들만 늘어놓았던 것이다.


상담자: 올 때 되서 다시 왔네. 오랜만이에요.
나: 너무 신기하게 지난 번 풀이가 잘 맞았더라구요. 그 때 말씀하셨던 대로 정말 저는 이번 하반기에 움직이지 않게 됐어요. 내년 상반기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움직이게 될 거구요.
상담자: 거 봐. 이동수는 내년에 크게 찾아온다니까. 올해는 움직일 운이 아니었어요.


  그 땐 일어나리라고 믿지 않았던 일이 정확히 맞았던 것에 소름이 돋았다. 이제 이 답답한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볼 차례다. 나는 나를 얽어맨 이 올가미를 어떻게든 벗어던지고 싶었다.


나: 솔직히 지금까지 너무 힘들게 버텼는데 더는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상담자: 음.. 급하게 생각하면 안 좋아요. 지금까지 힘들게 버틴 건 맞아. 그런데 지금 버티면 나중에 분명히 편해지긴 하거든요. 잘 생각해 봐요. 이제 물리적으로 힘들 만한 일은 다 끝났어. 오히려 일은 작년이 더 힘들었을걸? 지금은 일이 힘든 게 아니지. 올해 6월, 7월은 갑자기 안 좋은 일이 더 생기는 게 아니에요.
나: 제가 지금 봤을 때 직장 내부에서의 상황이 너무 안 좋거든요. 그런데 이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요. 그럼 제가 어떻게 버텨야 하죠?
상담자: 올해 딱 2월부터 5월까지 많이 힘들었죠? 그게 뭐냐면 바깥에 해가 나니깐 당연히 비가 올 줄 모르고 집을 나섰는데 갑자기 소나기에 폭풍이 온 거야. 근데 우산을 안 챙겼어. 그래서 그 비를 다 맞는거야. 영문도 모르고 그냥 비를 쫄딱 맞은 거에요. 전쟁에 나간 병사로 치면 전투를 치러야 하는데 나는 총도 안들고 와서 그냥 맨몸으로 남의 총을 피해야 하는 거야. 그걸 겪는 시기였어요. 그런 흐름이 닥쳐왔기 때문에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어. 그런데 지금 하도 전투를 많이 치르다보니 노쇄해져 있죠? 힘이 다 빠졌어 본인은.


  내가 장황하게 상황 설명을 하지도 않았는데 대뜸 풀이가 시작됐고 나는 이미 힘든 걸 버틸 마음도 더 이상 견딜 여력도 없어 뭐든간에 조언을 구하던 참이었다. 얘기를 들으면서 서러웠던 기억들이 떠올라서 울컥했다. 남들의 말과 행동이 내심 불편했던 내가 잘못된 게 아닐까, 모든 문제의 원인은 나 스스로에서 찾아지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때였다.


www.centerforsharedinsight.com


상담자: 그런데 하반기엔 운의 흐름이 바뀌어요. 똑같은 전쟁이 하반기에도 벌어질거야. 그런데 이미 본인이 바뀌어 있어요. 그걸 이겨낼 수 있어. 기력이 전보다는 달리지만 이제 내 편 들어줄 사람도 있고 훨씬 전보다 잘 대처하게 될 거에요. 물론 6월이랑 7월에도 마음이 많이 힘들건데 그건 일을 더 겪어서 힘든 게 아니야. 그 동안의 싸웠던 전쟁터를 내가 바라보는 거지. 내가 너무 애써온 게 보이니깐 그게 밉고 원망스러워서 미치겠는거야. 근데 잘 생각해 보면 그건 감정의 찌꺼기인거에요. 지금은 변화의 시작점이에요. 그래서 무조건 버텨야 돼. 그 때는 그 힘든 걸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어디 물어보고 도움 청할 사람도 없었던건데 이제 본인이 준비를 해야하는 시기거든. 지금까지의 인생과는 또 다른 변화가 있을 건데 그러려면 물어봐야 하잖아. 그러니깐 본인이 지금은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는 거지. 그래서 사주도 보러 온 걸 테고.


  구체적으로 지난 몇 달 간의 상황을 짚는데 또 한 번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알았지? 마음 고생을 지지리도 오래 하다가 최근에서야 겨우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힘들었다고 얘기하기 시작했고 이제 하반기를 대비해야겠다 싶어 사주까지 다시 보러온 거를. 사주를 보러 다닌다고는 해도 아주 철석같이 믿는 편은 아니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정확하세 눈앞의 상황을 그려내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 그런데 제가 왜 작년에 올해 일을 물어보지 않았을까요? 또 굳이 설명도 안해주셨잖아요?
상담자: 그 운을 피하기보다 겪고 지나가야 하는 거니깐 도움 청할 수도 없는거지. 운이란 게 그래요. 안 좋은 걸 겪고 지나면 또 좋은 운이 들어와요. 지금 운이 영원하지 않거든. 본인은 이제 준비를 해서 인생의 다음 시기를 맞아야 하는 상황이니깐 지금은 씨를 뿌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https://lancelang.com/hope-life/


  그의 말에 따르면 인생의 4계절 중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막 찾아온 시기라고 한다. 아직까진 바람이 차가워 봄기운을 느낄 새가 없지만 지금 씨를 뿌려야 다음 여름에 무성하게 맺은 잎을 보고 그 뒤에 올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원의 겨울이 지속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에 빠져 있던 내게 이 말은 사실인것과 관계없이 한 줄기 희망과도 같았다. 앞으론 내가 달라지고 상황이 달라질 거라는 것이야말로 내가 간절하게 바라던 바였다.


너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하니. 그 동안 그걸 어떻게 참고 있었니?


  이런 말을 가장 많이 듣는 요즘. 내 굳은 얼굴을 이해하는 사람이 더 많아진 요즘. 나는 한창 씨뿌리기 바쁜 농부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새싹이 돋는 게 오늘이려나, 아니면 내일이려나.


그렇게 언젠가 싹이 돋고 줄기가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그 날이 오기를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붉게 물든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