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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Jun 25. 2021

붉게 물든 하루

발 없는 말이 더 빠르다는 지독한 사실

전부터 나는 그 애가 눈에 거슬렸다.


  그 애는 언제나 사람들의 사랑을 갈구했다. 이곳저곳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해맑게 웃고 떠드는 아이였다. 많은 이들이 그런 그녀의 발랄함을 사랑했다. 물론 처음엔 나도 기꺼이 그 아이에게 나의 관심과 사랑을 줄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애의 별로인 점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에 따라 편향적으로 기우는 행동, 어디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있는 곳이면 달려가야하는 성미 그리고 비밀로 여기는 게 참 많은 구석까지. 내가 친구란 존재에서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면들을 그 애는 가지고 있었다.


  때론 지나치게 발랄했던  애의 모습이 나의 예민한 심경을 자극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주위를 함부로 거닐다 밟고 지나간  나의 뾰족한 모서리였다는 것을.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생각 없이 돌아선  등에 내가 진심으로 서운해 했다는 .  애는 누군가의 복잡미묘한 마음을 이해하기엔 무심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종종 남의 진심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마음을 꿰뚫어  적도 없으면서 '나는 너란 친구가 좋다' 말을 내뱉고 퍽이나 잘도 웃었다. 내게는 숨기는 것도 많으면서, 서로를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친구'라는 단어를 쓰다니   없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애와 마음의 거리가  있었다.


출처 Getty Images


오랜만에 그 애가 연락을 했을 때 나는 그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눈치챘을 거라는 걸 그 애는 짐작도 못했겠지만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바로 내게는 비밀로 한 그 시험에 붙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종종 말 하지 않고도 느껴지는 여운을 감지한다. 그게 촉이라면 촉인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꽤 잘 들어맞았다. 그래서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내 느낌이 말하는 바를 믿는 편이다. 물론 꼭 느낌만이 아니더라도 정황상 그렇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연락하는 게 사람의 본능인데, 떠들고 싶은 말이 생겼다는 건 분명 상황이 좋기 때문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실수를 했다. 친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입이 무거울거라 생각한 이들 몇 명에게 내가 눈치챈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 말이 일파만파 퍼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로. 묘한 질투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애가 필요할 때만 가끔 연락하는 존재라는 것에 대한 짜증, 그 애한테 느꼈지만 말못한 불쾌한 감정들 그리고 아직 합격이라는 행운을 거머쥐지 못한 자의 못난 질투심. 모두 시험을 앞둔 나의 초조함이 낳은 괴물이었다. 나 역시 그 애처럼 넘어야 하는 산이 있었고 혹시라도 중간에 발을 헛디딜까 걱정에 겨운 상태였다.




  그런 그 애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일순간 깨달았다. 모든 게 잘못되었음을. 예상치 못하게 말이 돌면서 소문이 최악의 종착지로 향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결국 그 애는 내가 자신의 치부와도 같은 비밀을 알았다는 사실을 알고 내게 분노를 터뜨렸다. 그녀는 나의 가벼웠던 처신에 대해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그 애의 그 날선 말에 나는 온 하루가 피로 물든 기분이었다. 하지만 일부러 저지른 일이 아니기에 내게도 억울함이 있었다. 말을 꺼낸 대상은 믿을만하다 여긴 사람들이었기에 어안이 벙벙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애에겐 그런 걸 이해해줄 겨를 같은 건 없었다.


  내가 입이 가벼웠던 탓일까, 말해도 퍼져나가지 않을 거라 믿었던 이들이 내 말을 함부로 전달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분노를 참치 못하고 내게 칼을 휘두른 네가 문제였을까. 그렇게 사람에 대한 실망이 커질 대로 커져 자꾸만 세상을 등지고 싶어하는 내가 또 다시 무너졌다. 검붉게 물든 내 심정을 헤아릴 겨를도 없이 너는 네 말만 쏟아내기 바빴다. 그냥 너는 한마디로 내 잘못이었다고 치부하고 싶었던 걸까. 변명 한 번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고 너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물론 네가 분노한 건 이해하지만 왜 비난의 화살은 나 혼자 감당해야하는 건지 모르겠다. 너만 상처받은 게 아닌데, 나는 분노할 대상조차 없이 속상함을 홀로 털어내야 했다.


출처 Getty images


사람들은 나에 대해 아무 말이나 쏟아낸다.


  개 중에 누군가는 날더러 능력이 뛰어나다고 칭찬을 하고, 개 중에 누군가는 잘난척을 한다며 손가락질을 한다. 입을 열면 여는 대로 입이 싸다며 험담을 늘어놓고 입을 닫으면 닫는 대로 눈빛이 사납더라고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내가 자신감이 넘쳐보여 부럽다고 말을 하고 다른 누군가는 나를 제멋대로 구는 독종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 진짜 나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건 하나도 없다. 그건 그저 그들이 보고 싶은 대로 본 내 모습이었을 뿐. 나를 제대로 봐주는 사람은 없다. 자신들이 아는 모습 그 외의 것들은 그저 '의외인 모습'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남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를 정하기도 했다. 밝고 활달하며 적극적인 모습. 그런 좋은 이미지로 각인되기를 바라며 그런 모습으로만 보이기 위해 짜증과 분노, 초조함과 긴장과 같은 것들은 남들 눈에 띄지 않을 벽장 안에 숨겨두었다. 그래서 나만이 열어보는 벽장 속에는 온갖 음울함이 담겨 있었다. 벽장 안에서 볼 때의 나는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인것처럼. 그 동안 나는 그런 약간의 괴리를 즐겼다. 그 두 가지의 세계가 불안함으로 흔들리기 전까지는 아무렴 괜찮았다.


사람들을 남 얘기하는 걸 참 좋아한다.


  소문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재밌을 만한 이야깃거리는 쉽게 가공된다. 종종 실제로 뱉은 말과는 다른 이야기로 결론이 맺어진다. 말 하는 게 너무 좋았을 때는 사실 그 무서움을 미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말이 너무나도 두렵다. 내가 뱉은 말이 나를 집어 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마음을 닫고 입도 닫은 채로 지내왔지만 나는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 내가 원했던 결말은 이게 아니었는데 어쩐지 배드엔딩으로 가는 기분이다.


지금 나는 어느 인형놀이 상자 안에 갇힌 채
꼼짝없이 앉아있는 인형이 된 것만 같다.



https://www.pexels.com/photo/close-up-photography-of-hand-near-window-1264438/


재밌는 얘기 하나 할까.
어쩌면 슬픈 얘길 지도.
믿거나 말거나 한 가벼운 얘기죠.
부디 비밀은 지켜줘요.
아 글쎄 말야. 그 여자 있죠.
무시무시한 그녀에게.
푸른 날 하늘처럼 새파랗게 웃던 때가 있었다네요.
남자는 물론 여자들도 사람이 아닌 것들까지
전부 반해 사랑에 빠질 만큼 그 웃음이 예뻤다나요.
꼬까옷 입고 천진하게 재잘거리며 지금 핏기 없이 메마른 뺨엔 생기가 돌더래요.
Oh Red Queen
표정이 없는 그 여자. 모두가 미워하는 그 여자. 당신도 알지 그 여자.

- 아이유 'Red Queen' 중


출처 wonderful mind



  비록 내가 오늘의 잘못은 네게 사과했지만, 앞으로무례한 너를 용서하진 않을거야. 기대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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