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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Aug 25. 2021

선배의 품격 season2

매타작에 눈물이 그렁그렁할 적에

K선배: 요즘 일 하기가 너무 싫다. 지금 이 팀도 너무 싫어. 확 딴 데로 옮긴다고 할까 봐.

J선배: 하는 동안엔 적어도 일을 제대로 해야지. 이제 네가 팀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해야하니까, 그만 정신차려.


  그들은   나와 가깝게 지냈으며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우러러 보았던 선배들이었다.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어떤 업무든 노련하게 해냈으며, 경험이 적은 내가 풀리지 않는 문제를 들고 고민하고 있을   들어맞는 조언을 해줄 만큼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선배들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아서 나는 그들을 좋아했고 닮고 싶어했다. 많은  배우고 싶은 마음에 그들 가까이에 있으려 했고  지내고 싶은 생각에 그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 두었다.


그들 곁에 있는 게 행운이란 생각이 들 만큼
그들을 좋아했던 때가 있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나는 그들 틈에 어우러지기 위해 노력했다. 야무지게 이것저것 해내는 그런 아이가 되기 위해, 내가 기특해 마지 않도록 그들의 눈높이에 나 자신을 끼워 맞추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밝고 웃음이 많은 사람으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똑부러진 후배로 지냈다. 그런 내 모습이 스스로도 퍽 맘에 들었다. 이만하면 직장생활 잘 하고 있다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나는 하루하루 즐거웠다. 그 땐 모든 게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영원할 것이라는 건 내 착각이었다.


  첫 인상부터 너무 잘 하려고 애쓴 탓에 기대가 커졌기 때문일까. 한 번 박힌 인상은 잘 변하지 않기 때문인 걸까. 그들은 내게 끊임없이 기대를 한다. 더 나은 모습을 보일 자신이 없어진 지금까지도 그 기대는 유효한 것 같다. 어떤 이는 내가 속마음을 터놓는 친구처럼 의지가 되기를 바라고, 또 다른 이는 내가 사람들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제 그런 역할을 잘 해낼 자신이 없다. 어느 날 그 선배가 남겼던 말처럼 나는 그냥 '벽지'처럼 있는듯 없는듯 그런 가벼운 존재가 되고 싶을 뿐. 지금의 나는 어떤 부담감도 짊어지고 싶지 않다.


출처 schroders


그냥 아무 존재도 안 되면 안 될까요?


  차마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목구멍 안으로 삼키는 말. 해가 뜨면 나와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조용히 해가 질 무렵 자리를 비우는 그런 단조로운 삶을 꿈 꾸게 된 나는 그들의 관심이 부담스럽다. 남보다 더 높이, 멀리 뛰어야지 하는 그런 욕심이 바닥이 난 지금은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때가 있다. 그래서 요즘엔 하고픈 말들을 조용히 품 안에 가둔 채 자리에 고요히 앉아있곤 한다.


  선배들 곁에 있으면 아무런 걱정없이 좋은 것만 보고 배울 거라 생각했던 건 참 안일한 생각이었다. 선배들의 채찍은 생각보다 매서운 면이 있었고, 한 없이 다정하기만 한 줄 알았던 이는 상처가 될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인간적으로 별로인 면도 갈수록 눈에 도드라져 보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더 그들 마음에 들 자신이 없어졌다. 그들의 눈치가 보이면 보일수록 몸과 마음이 굳어진다. 실수만 눈에 더 밟힐 뿐 내가 뭘 잘 할 수 있는 건지, 뭘 해야 한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995298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줄만 알았던 그 선배들의 뜨거움에 데이고 나서야 비로소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 역시 한 때 가깝게 지냈던 선배였다. 같이 지내는 동안에는 미처 그 다정함을 잘 알지 못했던 사람. 멀리 떨어지고 난 뒤에 더욱 그리워진 그 선배는 퍽 쌀쌀맞은 말투를 쓰는 이였다. 매정한 이는 아니었으나 따뜻함이 좀 없단 생각에 종종 서운하단 생각을 했었다. 매사에 의욕적이기 보다 그저 자리를 잘 지킬 줄 아는 이였다. 하지만 태양이 이글거리는 듯한 뜨거움을 동경했던 그 시절의 나는 미적지근한 그가 못미덥단 생각을 했다.


  말 하지 않아도 먼저 헤아려주는 마음. 절대로 입 밖에 서운함을 먼저 내지 않는 신중함. 뜨거운 열정은 없지만 인내심만큼은 누구보다 강한 사람. 뛰어난 성과 없이도, 잘 보이려는 노력 없이도 예쁘다 봐주던 사람. 그렇게 소중했던 인연을 떠나 보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큰 지를 알게 됐다. 사랑했던 그 순간들이 과거가 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그 시절의 내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음을.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조금은 무뚝뚝한 듯했지만 나에게는 사실 참 다정했던 그는 누가 뭐래도 좋은 선배였다. 그런 그에게 슬픔을 한껏 덜어낸 채 애써 담담하게 그 동안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겪어보니 내가 잘못 생각했던 부분도 있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이들이라고 내게 잘 맞는 사람들이 아니고, 조언이라고 다 새겨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걸 미리 알았더라면 조금 더 조심했을텐데 미숙하다 보니 실수도 많이 했던 것 같다 하는 속내를 이야기 했다. 그런데 묵묵히 내 얘기를 듣던 선배는 문득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출처 ㅍㅍㅅㅅ


L선배: 나도 혹시 너한테 그런 꼰대였나 하는 생각이 드네. 그 때 내가 혹시 내가 잘못한 거 없었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나는 그에게 '그런 거 전~혀 없었으니까, 걱정마세요.'라고 답해주었다. 그는 얘기를 듣고 보니 자신도 별로 좋은 사람은 못 된다고 생각하는데 괜히 훈계질 한 거 없나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 그런 기분 나쁜 점이 있었다면 그냥 잊고 용서해달란 말도 덧붙였다. 그 말에 더 웃음이 나서 '선배님한테 맞은 매는 매도 아니었어요.'라고 이야기했다. 그래, 그건 눈물이 줄줄 터질 만큼 아픈 매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분 나쁘지 않은 따끔함이었다. 그것조차 이제야 알게 된 깨달음이지만.


  다정함이 겉으로 묻어나지 않지만 속에 꽉꽉 눌러담겨 있던 그 애정어린 말이 나는 늘 그립다. 그리고 언젠가 먼 미래에 나도 그런 선배가 될 수 있기를 작게 소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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