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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Jul 24. 2021

엮이기 싫은 불청객, 진상

평온한 하루에 불쑥 나타난 달갑지 않은 그 사람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졸음이 쏟아질 무렵. 나른함을 깨우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감사합니다. OOOO센터입니다."
"저 코로나 때문에 영업을 못하고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규제 때문에 손실이 크잖아요. 그러니깐 피해보상 같은 게 좀 필요하거든요?"
"네."
"뭐 지원해주는 게 있다는 거 같은데 어떤 게 있죠?"

  질문에 답을 잇기도 전에 한숨부터 터져나올 것 같았다. 급히 책상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냉수로라도 속을 다스려야 진정하고 차분한 톤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굴은 이미 굳었지만 어짜피 상대는 내 표정을 보지 못한다.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고 질문을 던진다.


"네. 현재 지금 사업장 상황이 어떠신가요?"
"뭐가 어떻고 어때요? 많이 힘들지."
"지금 직원분들 일부나 전부가 쉬고 계신가 해서요."
"아 그냥 지금 정상 영업이 안 된다니까. 힘들어 죽겠어. 근데 그건 알아서 뭐하게요?"
"휴업이나 휴직을 앞으로도 시행할 계획이신가 확인 차 여쭤본 거에요. 어떤 지원금을 어떻게 신청하시는 게 좋을지 말씀드리려고요."

  전화기 너머 벼려진 듯 날카로운 상대의 말투가 비로소 누그러졌다. 긴 설명이 이어졌고 결국엔 통화를 잘 마무리했다. 그래, 그에게도 분명 '힘들다'는 것 이상의 사정이 있었겠지. 내가 다 헤아릴 수 없겠지만 적어도 같이 감정이 널뛰진 말자 했던 다짐을 오늘도 지켰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뿌듯함 같은 건 없다. 그저 사고 치는 일 없이 조용히 한 건을 끝냈구나 하는 안도감이 밀려올 뿐. 그의 분노에 휘말리지 않고 잘 대처했다.


그렇게 오늘도 밥값은 했다.



공무원 시험엔 없는 과목: 진상


  나의 일터를 방문하는 민원인들은 대체로 친절한 응대를 바란다. 자신들의 행동거지가 어떻든 그들을 대하는 나는 상냥하고 반듯한 이미지여야 한다. 다행히 하루종일 미소를 짓고 있어야 하는 번거로움은 없다. 적당히 공손한 태도로 응대하면 큰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1주일에 한 두 차례 이상 꼭 진상을 상대하게 된다. 깜박이 없이 차로에 끼어든 차처럼 그들은 예고 없이 내 하루에 들이닥친다. 처음엔 웃음으로 시작했던 하루도 진상을 만나는 날이면 한숨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진상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는 정말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했던 것 같다. 어쩜 저렇게 뻔뻔한 태도로 사람의 자존심을 짓뭉갤 수 있을까. 그토록 무례한 경험은 살면서 처음이라 울분을 참기 힘들었다. 그 전까지 좌절감은 주로 수험생 때 진하게 겪었던 감정이었다. 남들보다 내가 못하다는 생각이라든가 언제쯤 떳떳한 사회인이 될까 하는 걱정같은 것에 짓눌려 있을 때였다. 하지만 실전에서 마주친 진상은 그런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빽 소리를 지르는 것은 기본이요, 손가락질부터 욕지거리까지. 그들은 무모했고 그래서 용감했다. 남들의 이목 같은 건 신경 쓸 이유가 없는 자들이었다.


  원하는 걸 얻어낼 때까지 그들은 참지 않았다. 그 원하는 것이란 결국 '날 좀 도와달라'는 것이다. 금전적으로든 비금전적인 것이든 그들은 정부 지원이 필요했고 그걸 쟁취하려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아무리 법과 지침 상 안된다, 예외를 둘 수 없다 못을 박아도 막무가내였다. 때론 자신만 차별받는 게 아니냐며 오해를 하기도 했다.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숙이지만 그럴수록 그들은 상식 밖의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자신이 '사회적 약자 혹은 열외가 될 수 없다'는 강한 신념에서 비롯된 고압적인 태도.


  물론 억울한 경우들도 여럿 있었기에 머리로는 그런 사정이 딱하다 생각이 들 때도 많았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악다구니로 인해 누군가는 마음 속 깊이 상처를 받았고, 어떤 이는 지금도 병원 약 없이는 온전한 정신으로 깨어 있지 못한다. 나 역시 오늘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른 채로 멍하게 퇴근길에 오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누군가의 하루 더 나아가 삶을 송두리째로 흔들어 놓기도 하는 그 무서운 존재. 그게 바로 '진상 민원인'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오래도록 근무해 닳고 닳았다 하는 이들은 얼굴에 생기 하나 없이 하루종일을 버티는 경우가 많다. 웃음이 터지는 순간은 각자의 일상생활에 대한 이야기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 같은 걸 할 때 정도 뿐이다. 한창 패기 넘치는 신입 시절 나는 웬만해서 잘 웃지 않는 그들이 왠지 무섭게 느껴졌고 친절하지 못하다며 나쁘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내 자신을 지키는 게 최우선이 되어버린 뒤로 크게 웃을 일이 사라졌다.


오히려 사람과의 관계에서
적당히 선을 긋는 법을 배웠다.


출처 The guardian




  정말 제대로 된 진상이 왔다. 눈빛부터 서슬퍼런 게 상대하기 퍽 힘들어 보였다. 본능적으로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애써 진정하고 그와 마주앉았다. 가뜩이나 곤란한 상황이 생겼을 때 도와줄 팀원들도 몇 없는 날, 괜히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여기요. 이거 설명 좀 해줘봐요. 뭐가 이렇게 귀찮게 자꾸 날아오나 몰라."
"네. 어떤 것 때문에 오신건가요?"
"아니 여기저기서 자꾸 찾아온다구요. 나더러 지원금 받을 수 있으니까 신청해보래. 근데 이게 무슨 말이에요? 진짜 돈 주는 거 맞아요?"
"그러니까 정확히 어떤 게 궁금하신거죠? 설명해드릴게요."
"혹시 그 저한테 찾아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는 거 있어요?"


  대뜸 그가 꺼낸 말은 '브로커'에 대한 것이었다. 공무원 입장에서는 브로커에 관한 이야기 듣는 게 결코 달갑지 않다. 여기서 꺼낼 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는 당당하게 나는 브로커들이 찾아온 거 때문에 한 번 와봤다는 사실을 어필했다. 예상대로 골치 아픈 상대였다.


  각종 정부 보조금들이 다양해지다보니 이미 몇 년 전부터 지원금을 받게 해주겠다는 중개 업체들이  중구난방으로 생겼다. 그나마 양심적인 업체들은 실제로 법과 지침에 적합한 업장들을 타깃으로 하지만 비양심적인 업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류를 모두 그럴싸하게 꾸며낸다. 자세히 들여다 보더라도 알 수 없게끔 완벽한 수준이다. 직접 발로 뛰며 일일이 조사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위선을 알아채기 쉽지 않다.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일 한다고 내 월급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대부분의 경우 적당히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


거대한 악당 조직과 맞서 싸우기엔
나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고,
사람들의 관심은 지원금 처리 건수 같은 것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https://nickwignall.com/other-peoples-anger/


"저희는 브로커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 참. 그럼 뭐 하러 여기 왔어요? 설명 해준다면서요. 돈 준다고 해서 왔는데 어떻게 하면 돈 주는 건지 설명해 보세요."


  속에는 이미 천불이 났지만 애써 화를 가라앉힌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마스크 안에 잔뜩 구겨진 표정을 숨긴다. 불쑥 찾아온 이 진상 남자는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한 채 한 쪽 다리를 꼬고 허리를 뒤로 젖히기까지 했다. 어느 편의점 점주라는 이 작자는 오늘 내 하루를 망치러 온 악당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기에 휘둘려 나머지 하루를 망칠 수 없다. 곧 있으면 퇴근이니깐 조금만 참자 하고 스스로를 달랬다. 불편한 심기를 솔직하게 내비치는 남자 앞에서 친절하게 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 정도 시련 쯤은 넘겨야 이 조직에서 버틸 수가 있다.


감정적으로 휘둘리는 순간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지옥 같았던 30분이 지나고 남자는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돌아갔다. 그는 설명을 듣는 내내 삐딱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나도 지지 않고 그에 맞서 또박또박 대답했다. 내 불안한 심정이나 불쾌한 감정을 그에게 들킨다면 이후의 일을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되뇌며, 나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에 바짝 힘을 주었다. 우습게도 불과 하루 전 날 나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친절한 민원인을 응대하며 '살 만하다, 모처럼 일에 의욕이 생긴다' 했던 참이었다. 그래, 삶이 롤러코스터 같다는 걸 잠시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출처 getty images


  어제도 그랬듯이 오늘도 쳇바퀴 같은 하루가 흘러간다. 불현듯 행운이 찾아오길 바라는 기대는 없어진지 오래다. 그저 '진상'이란 이름의 그를 또 다시 마주치지 않길 바라고 있다. 작년쯤부터 일에 어떤 의욕도 느껴지지 않는 건 결코 나 개인의 문제라 할 수 없다. 나의 하루에 오가는 여러 존재들이 나의 고유한 생각들을 마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세상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보다 없는 것들이 넘쳐난다. 


남들 눈엔 무너질 위험이 없는 이 안전지대엔 내가 보고 싶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은 척 또 하루를 살아간다. 자꾸 '괜찮다' 하다 보면 또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를 살아가기 마련이니까. 또 친절한 내 모습을 기대할 낯선 당신에게 결코 실망을 끼쳐드릴 수 없는 일이기에. 공손한 태도와 꽤 상냥한 어조로 나는 오늘도 모르는 이들을 수없이 만난다. 오늘도 진상에 대한 경험치가 쌓였다. 아마 다른 건 몰라도 분명 나는 실력이 늘고 있다. 바로 진상을 적당히 대처하는 법 말이다. 다만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삶의 유의미한 경험으로 남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간다.


http://www.marketexpress.in/20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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