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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Nov 27. 2021

이불 밖으로의 산책

회복 중인 일상에 대하여

위드 코로나 시대


  어느 덧 단계적 일상회복을 선언하며 '위드 코로나'로 접어든지 한 달 여가 다 되어 간다. 걱정과 근심이 가득하던 이들의 일상에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찾아온 것처럼 나의 하루에도 작은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그 동안 미루어 왔던 단체 모임도 오랜만에 성사가 됐고 줄지 않을 것만 같던 일도 조금 잦아들었다. 골치 아팠던 문제들은 차츰 정리가 되었고 성난 파도처럼 일렁이던 마음에 오지 않을 것 같았던 평화가 조금씩 찾아왔다.


풀렸던 태엽이 다시 감기고 
미동없이 멈춰 있던 오르골이 
다시 청아한 소리를 낸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몸이 잔뜩 움츠러들까 이불 속으로 숨어들어 있었고 잔뜩 먹구름이  얼굴 표정이 누군가에게 들킬새라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몰래 숨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얼어 붙었던 마음에 작은 불씨가 지펴졌다. 처음에는 혹여나 작은 움직임에도  불씨가 꺼질까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았다.  불씨의 이름은 아마도 '희망' 것이다. 오늘의 내가 조금 별로라도 내일의 나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 스스로를 좀더 믿어야 한다는 주문. 그렇게 나는 조금씩 아늑한 이불 안을 박차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https://theeducationhub.org.nz/


이불 안에 갇혀 지냈던 시간


  작년 이맘 때쯤 나는 막 글쓰는 데 재미가 붙어 있었다. 공개한다면 곧 평가를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두려움이 앞서긴 했지만 그래도 설렘이 가득했던 나날이었다. 쓴다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아가던 스물아홉의 나는 일 하기 싫다고 노래를 부르는 대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나름의 희망을 그리고 있었다. 오늘보다 내일의 내가 해낸 성취가 기대가 되곤 했던 때다. 아직은 삶의 쓴맛보다는 단맛이 더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때만 해도 머릿 속을 떠도는 상념이 배출될 만한 구멍 같은 게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들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내 안에 갇혀 있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맴돌고 있다.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쳐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환경이 자기 확신을 만든다는 말처럼 내가 처한 환경은 내게 그닥 호의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넘지 못할 벽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런 환경을 극복한 영웅들이 존재하지만 한 없이 나약했던 나는 그 벽 앞에서 번번이 좌절감을 느꼈다. 나는 용감하지도 않고 대단할 게 하나 없는 평범한 존재였다. 어쩌면 한껏 빛나는 이들 옆에 배경처럼 자리하는 이름 모를 엑스트라에 불과했을 지도 모른다.


https://www.wired.com/story/ ILLUSTRATION: ELENA LACEY


마음이 온통 먼지로 덮여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좋은 글을 쓰고 싶었다. 우울함이   톨도 담기지 않은 따뜻함을, 나만의 시선으로 벼려낸 세상의 모습을 글에 오롯이 담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 달리  자를 쓰는 데에도 많은 호흡과 용기가 필요했다. 공장에서 물건을 완성하듯 찍어내던 나의 일상을, 스쳐지나간 상념을 기록하는  이토록 힘든 일이었던가. 하지만 한껏 신나는 음악을 들어도 슬픈 음악을 들어도 공허해진 마음은 달래지지가 않았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한 심정으로 낙엽이 물든 거리를 걷곤 했다.


   나은 내일이 있을 거라고 스스로 되뇌곤 했지만  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의심만 눈덩이처럼 불어날 뿐이었다. 이런 고민은 나만의 전유물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주변에 공유하기 쉽지 않기도 했다. 생각보다 입을 떼는   어려운 일이다. 모두  고민거리를 늘어놓기보다 자랑거리를 늘어놓기 바쁜 세상이라, 실패에 대한 경험담이라든가 실망스러운  따위를 꺼내기는 낯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자리가 필요했다. 낙담한 모습 그대로의 민낯을 보여줄  있는 그런 편안한 순간이 어서 찾아오길 바랐다.


그러려면 이불 밖으로 나올 용기가 필요했다.


https://www.artofendingstigma.com/what-is-mental-illness


  하지만 따뜻한 침대 안의 아늑한 공간을 박차고 나온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특히 찬바람이 쌩하게 부는 겨울철엔 말이다. 여기만한 낙원이 있을까 싶은 마음에 몸을 움직이기가 꽤 고되다. 하지만 그 나태함을 벗어 던져야 다음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너머엔 어쩌면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기쁨이 자리할지도 모른다. 삶은 대체로 슬프고 우울하지만 가끔 웃을 일이 생긴다. 하루 웃을 일이 생기면 그 다음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짜증나는 일이 생겼고 그런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했다. 기분의 등락을 겪는 게 힘든 나머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되었다. 조금씩 웃는 날이 더 많아졌다는 것을. 닥친 일이 어떤 것이든 그저 별다른 고민 없이 웃어 넘기면 될 뿐이라는 것을.  신은 견딜 수 있는 고통을 던져주며 깨달음을 얻도록 한다는 어느 명언의 말처럼 고달픈 데는 다 이유가 있는거라는, 진한 깨달음이 찾아왔던 한 달이었다. 이불을 박차고 나오기로 결심한 뒤에 찾아온 생각이었다.


https://theconversation.com/curious-kids-why-does-the-light-turn-on-124549


또 다시


어두운 저 길 헤매며 외톨이가 되어 울던 나.
믿고 나아갈거라고 결심한 그 때. 문이 열리고 그 너머의 빛이 나룰 비추었어.


  지금의 나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노래는 없을 것이다. 한창 가을 햇살이 짙어질 무렵부터 나는 이 노래를 즐겨 들었다. 피아노 선율 정도로만 접했던 노래를 들은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유투브 채널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접한 노래. 작년 가을 'Dynamite'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한 순간에 꽂힌 뒤로 하루에도 몇 십번을 반복해서 듣고 있다. 일어를 배운 적이 없어 가사의 내용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곡의 분위기에 배어 있는 따스함에 반했다. 홀로 느끼는 외로움이 사무칠 때면 자장가처럼 찾게 되는 노래다.


  아직도 내게 남은 인생이 많다는 것을 나는 종종 망각한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마치 전부였다는 착각에 종종 빠진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분명히 있지만 바꿀 수 있는 현재와 미래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점일 것이다. 과거의 내가 마치 미래의 나를 발목잡을 것처럼 생각하는 우를 범하는 것 말이다. 이불 밖의 세상이 비록 외투 없이는 험난하고 추운 곳임에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발을 내디디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만약 나의 내일이 조금이라도 달라지길 바란다면.


아프게 내디딘 걸음조차도 
미래라는 미지의 땅에 단단히  붙일  있는 그런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The New York Times/ Monika Aich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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