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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Jan 31. 2022

마지막 인사 (2/2)

외할머니와의 작별 pt.2

텅빈 공간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흘렀다.


  급히 택시를 타고 도착한 장례식장.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 코로나로 인해 모이기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로 사는 게 바빠 안부도 잘 주고받지 못했던 사이. 뒤늦게 잘 지내고 있었느냐는 질문이 오갔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메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럼에도 무색하게 한둘씩 가족들이 도착할 때마다 울음이 터졌다. 애써 등을 돌려봐도 터지는 눈물을 참기는 어려웠다.


슬픔이란 게 이렇게 전염이 강한 거였구나.


  오후엔 입관식이 진행됐다.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은 오전에 병원 예약이 있어 서울에서 달려오는 길이었고 때문에 나는 우리 가족 대표로 참여하게 됐다. 이전에 다른 어르신들을 떠나 보낼 때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 입관식까지 참관한 적이 없어 이번이 첫 참관이었다. 제대로 장례절차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거다.


  누군가 이르길, 망자의 얼굴은 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본 외할머니의 마지막 얼굴은 편안하기보다 삶의 애환이 서려있는 듯했다. 주름진 얼굴 때문일까, 여전히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어머니 대신 나는 할머니의 팔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마음 속 말을 건넸다. '할머니, 엄마는 지금 오고 있대요. 엄마도 나이가 드셔서 그런지 여기저기 불편한 데가 있어요. 그래서 병원을 갔다온다고 조금 늦나봐요. 대신에 제가 일찍 왔어요. 그러니까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그리고 다음 생에 우리 엄마를 만나는 일이 있거든, 좀 더 많이 사랑해주세요.



  밖으로 꺼내는 대신 목구멍으로 삼킨 말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또 다시 눈물을 쏟았다. 미운정이든 고운정이든 오고 간 정이 있는 관계는 이토록 이별이 아쉽고 아픈거구나. 그래도 미운정은 많이 남기지 말아야 여한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화장터로 향하는 날 아침도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빈소에서 마지막 제사를 지내고 화장터로 떠나는 길. 영정사진과 유골함을 들 사람이 필요했다. 내 몫의 일이 아닌 줄 알았으나 장정들이 모두 관을 드는 인원으로 빠지고 나니 할 사람이 없었다. 얼떨결에 그 자리에서 제일 나이 많은 손주(녀)로서 내가 영정을 들게 됐다. TV에서 봤던 것처럼, 나는 엄마와 꼭 닮은 할머니 사진을 안고 행렬의 제일 앞에 섰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외할머니 사진을 품에 안고 땅에 묻히기까지의 여정을 함께 했다. 마지막 배웅에 큰 책임을 잠시 맡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런 책임을 질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끝내 얼굴을 비추지 못했던 못난 손녀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햇살은 눈부셨고 구름도 많지 않은 새파란 하늘.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겨울. 채 구정이 되기도 전에, 생신이 다가오기도 전에 세상을 하직하신 할머니. 영정사진을 들고 있으니 왠지 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영정사진을 들고 앞장 선 나는 온갖 슬픔을 뒤로 하고 앞을 향해 걸었다. 할머니가 저승으로 향하는 길이 너무 무겁지 않기를 바라고, 더 좋은 곳으로 힘차게 걸어가시기를 바라며.



화장터에 도착한 관이 화장에 들어가기까지, 한 과정 한 과정이 모두 슬픈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만남이 있고 이별이 있는 것이라 하지만, 만날 때와 달리 헤어짐은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한 법이다. 머릿 속에 자리한 여러 기억들과 아쉬움들에 너무 매달려 있지 않도록, 슬픔에 너무 빠져들지 않도록 말이다. 좋았던 기억, 나빴던 기억이 뒤엉켜 잔뜩 가라앉은 공기 사이에서 나는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쉽게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들이 떠올랐다. 나의 지난 삶, 그리고 지금의 삶과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내가 어땠는지, 앞으로의 나는 어때야 할지.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급급했던 내게 브레이크가 걸린 기분이었다.


 사실 아무런 생각이 없이 슬픔에만 잠겨 있기엔 내게 생각지도 못한 위로의 말들이 많이 쏟아졌다. 이제 막 다른 환경으로 옮겨 가게되면서 이미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은 상태였다. 그 동안 미안함과 고마움이 있어도 다 표현하지 못했던 터였다. 뜻하지 않게 전해진 많은 위로와 격려 속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감정에 북받혔다. 아무에게도 빚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언젠가 남들에게 빚을 지고 또 그걸
돌려주는 과정이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곧 봄이 다가온다. 잠들어 있던 땅에도 생명의 기운이 다시 스밀 것이다. 내게 찾아온 겨울도 꽤 춥고 길었다. 그 시간 속에서 여러 고통만큼이나 깨달음도 함께 있었다. 하지만 다가올 봄엔 나와 내 주변에 한층 더 밝고 즐거운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떠나갈 겨울 바람에 걱정과 슬픔을 함께 날려 보내고, 그 빈 자리엔 기쁨과 행복이 채워지기를 바라며, 할머니와의 작별 이야기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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