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흔한여신 Feb 27. 2022

생애 첫 독립

반쪽짜리 독립에 대한 감상평

아, 회사 못 다니겠다.


  1년 전부터 그런 말을 달고 살았다. 일도 사람도 다 지겨워진 탓이다. 처음엔 의욕이 넘쳤던 것들에 이제 큰 노력을 기울이고 싶지 않아졌다. 욕심을 부려 남보다 먼저 오르고 싶었던 자리에도 미련이 없어졌다. 언제까지 '하고 싶은대로'가 아니라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막막해졌다. 불의의 사고가 없는 이상 내게 살아갈 날은 많이 남았을 것이고, 지금 답답하게 여기는 것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그 크기를 키울 것이다. 그런 걱정들을 하다보면 침울해지곤 했다.


내 삶엔 더 이상 나아질 희망도,
놀랄 만한 변화도 없겠구나.


  그런 생각에 갉아먹히고 있었다.


  지금도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현실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지낸다. 서른이 된 후부터 간절히 염원했던 독립을 이룬 덕분이다. 집을 나가는 순간 고생길 시작이라고 믿으며 버텨온 세월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만의 조용하고 아늑한 시간이 필요해졌다. 단순히 '내 방'이 있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타인의 방해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내 방으로 한정된다는 게 문제였다. 사소하게는 식사할 때 원하는 TV 프로그램을 보지 못한다는 것, 부모님의 잔소리를 피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집밖을 드나드는 시간에 있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서는 오롯이 혼자되기가 쉽지 않았다.


출처: 게티 이미지뱅크


43km


  부모님댁에서 회사까지의 거리. 조금 더 최단코스도 있긴 하지만 대략 40km 내외인 거리다. 전에 20km 거리에서 더 멀어졌다. 처음엔 원망스러운 게 컸다. 아무래도 회사생활하기 숨 막히는데, 더 먼 곳으로 아주 유배를 보내는구나. 그런 생각에 부아가 치밀었다. 거처를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나도 미련없이 막 살아 볼 테다 하는 심술이 일었다. 하지만 다행히 관사를 들어가게 됐고 회사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옆옆동네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다. 단독으로 쓰는 공간은 아니고 함께 사는 룸메이트가 있으며 부모님 품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지만 반 정도 독립에 성공했다. 바라고 바라던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얼떨결에 독립을 하면서 제대로 살림을 차려놓을 건 아니었지만 나만의 공간이 새로 생긴다는 게 참 좋았다. 겨우 1평대의 작은 방을 쓰는 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설레고 긴장되던지. 부모님은 제집도 아닌데 뭐 이것저것 살 생각을 하느냐고 핀잔이었지만 내 마음은 온통 들떴다. 그 동안 아예 포기하고 살았던 인테리어를 다시 해 볼 기회였다. 엉성한 도배와 덕지덕지 발라진 페인트칠에도 나는 그 작고 하얀 방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 방에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내 바람은 이루어졌다.


  더 아름답게 그리고 아늑하게 꾸며진 좋은 방들에 비해 그닥 눈길이 가는 방은 아니지만 텅 빈 공간을 내 손으로 채워나가며 얼마나 뿌듯함을 느꼈는지 모른다. 저렴하면서도 질 좋은 제품을 사보겠다고 온갖 사이트를 뒤지고 너비에 따라 딱 맞는 배치를 해보겠다고 각양각색의 물품들을 구경했다. 맘에 드는 물건을 찾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고 수차례 고민 끝에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주문했다. 서른이 넘어서야 해 본 경험. 그래도 다행히 인터넷을 뒤지니 좋은 정보들도 많았고 괜찮은 물건들도 많았다.


그렇게 처음으로 오롯이 내 손으로 꾸민 방이 탄생했다.


출처: 매거진 한경


큰 피로감이 사라졌다.


  생각보다 관사 주변은 조용했고 동거하는 룸메이트도 조용한 성격이었다. 부모님의 잔소리를 들을 일도 없었고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시간도 생겼다. 평일에는 물론 회사에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정신이 없는 편이지만 주말에 홀로 집안에 남아 있으면 허전함보다는 안락함이 느껴진다. 엄마의 정성이 들어간 집밥 같은 건 없지만 식탁에 앉아 좋아하는 유투브 영상을 보면서 멍 때릴 수 있는 시간이 좋다. 그냥 누워만 있어도 편안하고 뭘 하지 않아도 걱정이 자리할 새가 없다. 부모님댁에서 지내던 때에는 모든 게 다 걱정거리였다. 어떻게 삶의 시련들을 헤쳐나가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서 걱정거리를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부모님댁에서는 유독 주말에  뜨기 힘들어하곤 했는데 새로운 집에서는 제법 눈이  떠진다. 몸이 찌뿌둥한 것도  하다. 기분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쟁여두기만 했던 캔들을 켜놓고 있는 것도  멋대로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도 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즐거움이다. 남들보다 뒤쳐질까  염려하느라 밤잠을 설치는 일도 없다. 그냥 오늘 하루  지났다 생각하고 잠들 . 별다른 생각이 머릿 속에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러는 동안 신체건강도 많이 회복됐다. 불안함이 잠재워진 덕분인지 피곤함이 전에 비해 덜하다. 짜증 또한 그렇다.


  뜻하지 않았던 변화는 내게 놀라운 삶의 변곡점을 선물해주었다. 그렇게 변화의 굴레 속에서 나는 새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멋진 경치나 화려한 인테리어 같은 것은 없지만, 소박하고 따뜻한 공간에서 나는 새로운 추억을 쌓고 있다.


관사 내방 모습
매거진의 이전글 마지막 인사 (2/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