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서니 보이는 풍경

지독했던 달리기를 멈췄다

by 흔한여신
줄곧 달리기를 해 왔다.


다리 근육이 탄탄하다거나 폐활량이 좋지도 않으면서,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온몸이 후들거리는 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늘 달려야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남들은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에서 저만큼 앞서 나가는 것 같은데 나는 늘 뒤처진 사람인것 같아서 그게 그렇게 겁이 나서 달렸다. 그렇게 달리다 때로는 길을 잃었고 때로는 넘어졌다. 길을 잃어 시간이 지체되거나 넘어져 다치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게 전부 내 탓인 것만 같아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같은 트랙을 달리더라도 남들보다 선두에 서고 싶었고 나에겐 그럴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나는 지금 이것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남들을 미워했고 내 자신을 채찍질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면서도 그 방식이 옳다고 믿었다.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는 일에 대한 책임감이나 애정 때문이 아니었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그리고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더 먼저 가고 싶다는 목표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순간에 그런 목표가 사라졌다.


출처: 케미컬 뉴스


그 뒤로 모든 게 허무해졌다.


쓸데없이 애써왔다는 그 깨달음이 얼마나 큰 상처로 돌아왔는지 모른다. '중간만 가면 된다'라는 생각보다 주머니 안의 송곳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그토록 나를 숨가쁘게 만들었는데, 결국엔 의미가 없었던 일이었다. 어느 순간 남들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고 나에 대해 높아진 기대치는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기대와 관심에 부응할 수가 없었다. 한 순간에 목표가 사라지고 허탈함에 빠져 바닥을 기고 있던 내게 사람들은 무서우리만큼 싸늘했다.


마음 속에 생긴 구멍은 어떤 노력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그 구멍을 메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달리다 보면 또 이 무력감이나 우울감도 해결되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생각을 했다. 홀로 다른 지향점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 외롭고 쓸쓸하단 생각을 수 없이 했지만 그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지금 막다른 길에 들어서 물러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며. 어떻게 해서든 나아가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괴롭다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었던 것 같다.


FE week


지금 내 삶은 멈추어 있다.


요즘의 고민은 꽤나 하찮은 것들이다. 오늘 저녁엔 뭘 먹고 내일 점심엔 뭘 먹지. 빨래를 언제쯤 할까, 방 청소는 언제쯤 할까와 같은 것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삶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해답을 늘 궁금해 했었는데, 여전히 답은 찾지 못한 채 시답지 않은 고민거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머릿 속에 억지로 집어 넣었던 경제학 이론과 경영학 사례와 같은 공부는 제껴둔지 오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삶의 방향을 바꿀 지식들이라고 생각해 제법 열심히 파고들었던 것들인데 어느 순간부터 책 대신 요리 유투브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래도 될까' 하는 생각이 가득한 한편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 갈팡질팡하다가 시간이 흘렀고 여전히 달려야 할지 지금처럼 멈춰서 있는 게 괜찮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은 공부와는 한 뼘 멀어졌지만 주변 사람들과는 더 가까워졌고 전보단 집안일이 많이 능숙해졌다. 어색하기만 했던 자전거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어딜 가든 함께 하고 있고, 힘들었던 기억은 잘 버텼다고 위로해준 사람들 덕분에 욕하면서 떠들 수 있는 과거의 한 조각이 되었다.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광명을 찾았다.



숨 쉬는 법을 잊은 물고기 같았다.


바쁘게 달려오던 때엔 미처 알지 못했다. 하루 해가 생각보다 꽤 길다는 사실을. 시끄러운 사람들 틈에 섞여 있을 땐 몰랐다. 이토록 고요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평안함을 넘어 고요한 시간을 보내면서 비로소 나는 가쁘게 몰아쉬던 숨을 편안히 내쉬게 되었다. 달릴 때의 두근거림도 없고 속도가 주는 쾌감도 없지만 잠시 주변을 둘러보니 멈춰선 풍경 또한 나쁠 게 없었다. 이 순간을 맞기 위해 그 동안 숨 가쁘게 달려왔던 걸까. 아니면 또 다른 최악을 만나기 전숨을 고르는 타이밍일까. 걱정과 여유가 동시에 존재한다.


한 때는 달려야만 균형을 제대로 잡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멈춰서 버리면 그대로 도태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불안해했다. 그런데 유명한 베스트셀러의 제목처럼 '멈춰서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참 많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삶도 안정적일 수 있다면 그 나름대로 소소한 즐거움이 있더라. 그런 지금은 긴장으로 얼룩진 삶이 아니라 여유가 흘러넘치는 하루를 보낸다.


이 시간이 내 곁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곁에 머무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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