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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Sep 06. 2022

가장 가깝지만 가장 먼 사이

때로는 풀기 어려운, 너무 다른 사랑의 방정식

좀 알아서 해.


  나는 부모님에게 그다지 착한 딸이 아니다. 뭘 좀 물어보면 굉장히 귀찮아하는 투로 건성건성 대답하는 편이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냥 선뜻 대답해주기 싫었달까. 좀더 상냥한 어투에 적극적인 태도였다면 욕 먹을 일도 없었을텐데 나는 대충 얼버무리듯 대답하거나 귀찮게 자꾸 묻지 말라며 굳이 짜증을 내곤 했다. 무언가를 좀 해달라는 부탁을 들을 때면 '귀찮게 묻지 말고, 그런 건 좀 알아서 하면 안 돼?' 하는 말이 먼저 나왔다. 싸우지 않을래도 불씨가 너무 쉽게 당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내가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 나는 '착한 딸'이 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려왔다.


  부모님이 어쩌다 도움을 요청하는 게 나는 왜 이렇게 부담스럽고 싫을까. 사실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인데 왜 선뜻 하겠다는 말이 안 나올까.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게 왜 꺼려지는 걸까. 겉으로는 무정했으면서도 속으론 끝없이 자책을 했다. 예의 '엄친아' 그리고 '엄친딸'들은 인물들이 하나같이 잘나서는 머리도 좋고 부모님 속 썩이는 일도 없다고 하는데, 나는 왜 자꾸 청개구리가 되려고 할까. 자주 퉁명스럽고 그닥 살갑지 않았으면서도 한편으론 부모님의 기대에 맞는 좋은 딸이 되지 못한 것 같아 항상 마음이 무거웠다.



https://neurosciencenews.com/sensation-depression-20431/


나와 똑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또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유투브 알고리즘의 인도로 '금쪽같은 내새끼'의 클립영상을 보게 됐다. 친정 어머니가 황혼육아를 하면서 딸과 갈등을 겪는 에피소드였는데 언뜻 보기에 딸인 출연자가 못된 것처럼 보였다. 관찰 영상 속 모녀가 거칠게 싸우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혀를 끌끌 찼다. 어쩜 저렇게 못되게 말을 할까, 정말 별로다. 엄마에게 모진 말을 쏟아내는 딸보다 육아로 지친 엄마의 상황에 먼저 공감이 갔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오은영 박사님이 사뭇 다른 이야기를 했다.


자세하게 전후 상황을 다 안보시면 이 금쪽이 엄마 욕을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좀 다르게 보여요. 이 금쪽이 엄마는 굉장히 뿌리깊은 서운함이 있어요.


  예상치 못했던 오은영 박사의 말이 나를 단숨에 붙들었다. 그저 싸우고 소리지르는 진부한 영상이라는 생각에 보고 넘기려고 했는데 머리를 무언가로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영상을 보며 나의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감정적 수용'의 경험. 영상 속 출연자인 딸에게도 부족한 것이지만 나에게도 부족한 것이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왜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편함을 느꼈는지. 좋지 않은 일을 쉽게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이유가 뭐였는지. 때로는 좋은 일조차 함께 나누는 걸 꺼리게 된 게 무엇 때문이었는지.


나는 늘 부모의 관심과 사랑에
목 말라 있는 아이였다.


https://www.islam21c.com/spirituality/15-cures-for-sadness/


달라도 너무 다른 사이


  사실 어느 날 갑자기 안 것은 아니고 나이가 들며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이토록 정확하게 문제의 원인을 짚은 건 처음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의 부모님은 다정하기보다 매정하기를 택한 분들이었고, 어르고 달래기보다 따끔한 말들로 나를 키우면서 향후 인생에서 어떤 비바람이 몰아치더라도 잘 버텨내길 바란 분들이었다. 그 가르침 속에서 나는 본래의 다정하고 명랑한 모습을 감추는 법을 배웠고,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더 키워나갔다. 남들 앞에서는 울기보다 억지로라도 웃어야한다는 게 부모님의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한 동안 필사적이었다. 내가 한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 미래에 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발버둥을 쳐 왔다. 하지만 사실 버티기 너무 힘든 순간이 많았다.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를 냈을 땐 뿌듯함이 있었지만 좋지 않은 결과를 받게 되었을 땐 그 어느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낙담한 마음을 다독여주는 이가 없었기에 홀로 견뎌야 했던 시간들이 상처로 남은 것이다. 힘들다는 이야기에 내 부모님을 더 버텨야한다는 조언을 했지만 그건 한창 불안했던 내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용기가 부족했던 시절 나는 끊임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아이였다. 그리고 그건 성인이 되서도 마찬가지였다.



https://www.eleorahan.com/blog/2019/12/2/grief-sorrow-joy-and-soul


서운한 건 서운한거고, 감사한 건 감사한 거예요.


  서운하단 이야기는 지난 과거 그리고 아직도 진행중인 현재의 일이기도 하다. 좀 더 내 마음을 헤아려줬으면 하는 바람. 하지만 그런 방식이 전혀 익숙지 않은 부모님께 강요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우연히 '금쪽같은 내새끼' 클립 영상에 붙들려 출연자들과 함께 눈물을 쏟으며 사실 큰 위안을 받았다. 나와 비슷한 환경이었을 그가 받았던 설움에 크게 공감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은영 박사님은 과거의 상처에만 집중하면 안 된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의 어려움을 함께 책임져 주고 있는 부모에게 감사함을 느껴야 하고 그걸 표현해야 한다는 것.


  뒤이어 방영된 어머님의 속마음 영상에는 딸이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 진심어린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쏟는 딸의 모습에 나도 함께 눈물을 쏟았다. 부모 역시 나름의 방식대로 다가가고 잘 해주려고 노력하지만 그 방식이 무조건 자식에게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을 온전히 주고받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하지만 결국 잘 됐으면,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하는 말 속에서 어머님만의 사랑의 방식이 느껴졌다. 내 편이라지만 내 편 같지 않았던 엄마가 들려준 그 마음의 무게는 생각 이상으로 무거운 것이었다. 비록 서로의 소통 방식이 달라서 다 전달된 것이 아니었지만 분명 사랑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네가 잘 되기를 바랐지만, 내 방식이 틀렸던 것 같다.



WATV


  출연한 영상 속 모녀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물론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마음 속 깊은 응어리들은 조금씩 녹아 없어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도 저렇게 화해할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힘들다는 내 투정에 '어쩌라고' 하는 대답이 돌아와 몇 마디 못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오늘도 한겹 쌓인다. 하지만 애써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분명 깊은 속 어딘 가에는 나를 향해 미처 표현하지 못한 애정이 듬뿍 숨어 있을 거라 믿으며.


그러니까 이건 스스로 외는 주문 같은거다.
 '괜찮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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