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ver.
사뭇 다른 온기와 분위기
올해를 돌이켜 보면 가장 큰 변화는 외로움에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처음엔 혼자 있는 게 몸서리칠 만큼 싫었다. 비어있는 공간을 그리고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할지 몰랐던 나는 뭘 해야할지 몰라 두려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적정한 방향을 찾았다. 외로움과 고독함을 완전히 이겨내는 방법 따윈 없었다. 그냥 익숙해지면서 '그런가보다'하는 생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겪었을 뿐. 하지만 별탈 없이 흘러갔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내년에는 또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어떤 새로운 시련이 닥칠지 알 수 없지만 지금과 같은 평화로운 시간은 근 몇 년만에 내게 찾아온 선물임에 틀림없다.
특별한 목표가 없는 한해였다. 어영부영 흘러간 시간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꽤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작년에 이루려던 목표는 실패로 끝났고 그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해 한 동안 괴로워했다. 불같았던 도전정신은 어딘가 진창에 처박힌 것 같았다. 자신의 노력으로 작은 변화 내지는 큰 도전에 성공한 이들을 바라볼 때며 스스로가 위축되는 걸 느꼈다. 나는 쓸모 없는 존재가 아닐까 하며 자존감이 와르르 무너져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궁창이 되어버린 마음을 알아줄 이가 없어서 외로웠다.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존재들은 너무나도 쉽게 내 곁을 떠나갔고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죄다 어렵고 불편한 사람들이었다. 슬픔에 대해 타인에게 내색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괜찮은 척 웃어보이는 건 더욱 괴로운 일이었다.
속상함을 털어놓을 존재가 없어 병원에라도 가야하나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다. 아주 화창한 봄날이었다.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결국 몸이 탈나서 출근하지 못했던 어느 날, 밥 한 숟갈도 넘기지 못했던 나는 고민 끝에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치료나 상담 같은 게 필요하다고 얘기를 했다. 하지만 내 전화를 받았던 간호사는 혹시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부터 해결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꺼냈다. 마침 쓸데없이 가입한 보험을 모두 해약한 상태였다. 문득 현실적인 조언에 다른 두려움이 커진 나는 결국 병원에 방문하거나 상담센터를 가지 않았다. 잠을 얼마 못자고 출근해서 피곤하고 일의 능률이 떨어졌지만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살다 보니 살아졌다는 어른들 말씀이 맞았다. 슬픔도 억지로 삼키다보면 삼켜지긴 했다.
기쁨은 가끔 슬픔은 자주.
그렇게 어영부영 세월이 흘렀다.
한 동안 사진찍는 취미에 빠져 지냈다
아주 단조롭고 차분히 흘러가던 삶에 새로움이 끼어든 건 갑작스러운 충동 때문이었다. 답답한 현실에 지쳐 푸른 바다를 보러 떠났던 7월. 아주 오랜만에 해방감을 느꼈던 나는 내내 외로움 타기 보다 거울 속 자신이 얼마나 변했는가를 깨달았다. 웃으니 칙칙해 보이기만 했던 얼굴에 화사한 빛이 감도는 듯 했다. 그 뒤로 신경도 쓰지 않던 외모와 몸매에 관심을 얼마나 쏟았는지 모른다. 물론 잘난 인플루언서들만큼 대단한 노력을 들인 것은 아니지만 자주 스트레칭과 운동을 했고 좋은 것을 먹으려 노력했다. 엄청난 관리는 아니었지만 꾸준한 노력은 그 만한 보상을 돌려줬다. 피부가 전보다 훨씬 좋아졌고 몸이 탈나는 일이 줄어들었다. 운동량을 조금 늘리자마자 몸이 미처 적응하지 못해 체력이 훅 떨어졌지만 지금은 제법 튼튼한 체력을 갖게 됐다.
외모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올해는 유독 스냅 사진에 돈을 많이 들였다. 사진을 유독 좋아하는 편이라 항상 추억 남기는 걸 좋아했지만 최근엔 그럴 기회가 많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무언갈 하기 보다 '혼자'하는 게 많아지면서 어쩔 수 없이 나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엄마가 찍어준 사진엔 애를 쓴 흔적만 있을 뿐 애정이 묻어나지 않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행히 팔다리가 잘리진 않았지만 짜리몽땅해보이는 전신샷부터 청량한 미소 대신 미간이 잔뜩 구겨진 채로 웃는 사진 따위가 만족스러울리 없었다. 결국 작가님을 모시고 스냅사진을 찍었고 예쁜 스튜디오가 있으면 대관해서 혼자라도 셀프스냅을 찍었다. 남이 해준 화장이 얼마나 예쁜지 처음 알고 나서는 메이크업샵도 빈번하게 드나들었다. 결과적으로 두둑했던 통장이 탈탈 털렸지만 감탄스러울 만큼 예쁜 모습을 많이 담았다. 잘 한 짓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아주 비싼 취미생활이었음에 분명하다.
사실 2021~2022년간의 사진첩을 보다보니 유독 내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기록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너무 마음이 불편해지는 까닭에 그냥 싹 다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게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 찍은 사진들을 보며 어두웠던 시절의 나를 지워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사진을 여러 차례 찍긴 했는데 이제는 그 중독의 늪에서 빠져 나왔다. 자금이 고갈되어서라는 이유도 있겠으나 더 아름다운 게 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쁜 모습의 나도 좋지만 한편 내 삶을 지탱해 나가는 건 약간은 지친듯한 표정으로 열중하는 내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치장하지 않은 수수한 모습으로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저런 얼굴이 훨씬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지나쳐왔던 거울 속의 나는 평범하고 지루한 매일을 버텨내고 있는 소중한 존재였다.
화려함 없이도 멀리서도 반짝이는
빛나는 존재가 되어야지 생각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가장 편하고 행복하다
올해 초만 해도 사람들 틈에 어떻게든 섞여 있고 싶어 했는데 이제는 어떻게든 혼자 있고 싶어한다.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꺼리게 됐다. 자연스럽게 내 안의 밝고 통통 튀던 자아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해맑은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불편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적당히 자신만의 무게를 가진 사람들이-비록 가까워지기 전까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지라도-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가볍고 시시콜콜한 대화를 여전히 즐기지만 묵직한 이야기가 오갈 수 있는 관계를 더 지향하게 됐다. '그냥 한 번 친해져 보지 뭐' 하는 생각으로 단순하게 생각했던 때와는 다르다. 하나하나에 무척 신중해졌다. 그런데도 고르기가 어렵다면 과감히 선택을 하지 않기로 했다. 뭐라도 골라야 한다고 믿었던 과거와는 다르다.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진 않았지만 스스로를 가장 많이 돌아봤던 해가 아니었나 싶다. 가족도 친구도 별로 신경쓰지 않고 살았다. 온 마음을 다 해 붙들고 노력한다고 해서 관계라는 게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관심을 끄고 지냈다. 부모님께 효도를 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괴롭다가도 내가 할 수 있는 이상의 부탁이라 생각하면 과감히 거절했다. 내 말과 행동이 상대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서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통제하기보다 내 기분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상대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고 상대 역시 나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길 원했다. 물론 완전히 내 뜻대로 된 것은 아니었고 어느 지점에서 타협을 본 게 더 많았지만.
그렇게 타인과 가까워지고 싶어했던 마음 대신에 혼자 있는 순간을 온전히 즐기는 법을 더 배웠다. 내면의 평화는 남이 찾아주는 게 아니었다. 역경과 고난을 딛고 마침내 맞이한 이 평화로운 순간을 나는 더 없이 즐기고 있다. 비록 아무 계획없이 하루가 흘러가고 아무런 목표없이 새로운 해를 맞이하고 있지만 이 힐링의 시간들이 앞으로의 나에게 큰 힘이 되어줄 날이 올 거라 생각한다. 남들 하는 거 다 하지 못하고 지나친 날들이 많지만 전혀 후회스럽지가 않다. 이미 혼자서라도 좋은 걸 많이 눈에 담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지내서 괜찮았다. 평범한 순간들이 무탈하게 흐른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아마 정신 못차릴 만큼 바빠지는 때가 온다면 지금의 안온함을 무척 그리워할테지.
고요해서 소중한 이 시간이
아주 더디게 흘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