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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여신 Dec 08. 2022

코로나 막차를 탔다

바이러스와의 사투기

드디어 코로나 어택이다.


  12월이 되자마자 격리가 시작되었다. 작년 12월에 3차 백신을 맞은 뒤, 꼬박 1년 만에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가 되었다. 11월 마지막 날 저녁, 그러니까 지난 수요일에 몸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자가키트로 진단을 했다. 근 2년 간 주변인들의 감염 문제로 수차례 코를 찔렀지만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두 줄이 그제야 나왔다. 가까운 지인들 모두가 코로나에 감염되었을 때 혼자만 멀쩡했기에 스스로 슈퍼항체 보유자라고 생각했었는데 결국엔 보균자가 되었다.


  몸이 이상하다 느낀 건 월요일부터였다. 사실 나는 별도의 잠복기 없이 비교적 증상이 빠르게 발현한 편이다. 추정컨대 일요일에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월요일부터 체력이 급격히 저하됐다. 퇴근 후 가볍게 홈트레이닝을 하려고 했는데 웬걸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한 주의 첫 시작부터 무리해서 일을 했나보다 하고 가볍게 넘겼다. 그런데 다음날이 되자 슬슬 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평소에 감기에 잘 걸리는 체질이 아니었기에 이상하다 싶어 혼자 코를 찔러 보았다. 음성이었다.


  그렇게 넘어가나 싶었는데 수요일부터 본격적으로 바이러스와의 사투가 시작됐다. 전날 저녁에 한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지만 마음 속엔 코로나일 수 있다는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잔병치레로 앓곤 했던 감기와 멀어진 지 벌써 몇 년이었다. 하지만 수요일에도 열은 나지 않았다. 이비인후과를 갔지만 열이 안나고 자가키트 진단이 음성이 나왔다는 이유로 별도의 검사는 거치지 않았다. 목감기 증상인 것 같다고 의사에게 말하자 아직 확신할 순 없으니 경과를 지켜보자며 우선 감기에 대한 처방을 내렸다.


  금방 나아지리라는 기대와 달리 오후가 되면서 몸 상태는 시시각각 나빠지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열이 오르는 데다가 목이 점점 아파오는 게 심상치 않았다. 기운이 점점 없어져갔다. 하지만 처방받은 약이 있으니 좀 버티자 싶어서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그런데 증세가 좀더 심해지니 절로 깨닫게 되었다. 키트로 검사를 해보지 않더라도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코로나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수요일 저녁 코로나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다음 날 병원에 가서 확진 판정을 받았다. 확진 판정을 받던 날엔 이미 증세가 너무 심해져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https://www.unum.co.uk/article/sickness-absence-management


끙끙 앓는데 혼자인 게 참 서러웠다.


  다행히 일찌감치 몸의 이상을 감지해서 약을 먹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코로나의 기세는 맹렬했다. 지금껏 살아온 동안 겪은 병치레 중에 탑5 안에 들 정도로 아팠다. 확진 판단을 위해 병원에 나서던 아침, 자전거로 고작 10분 남짓 걸리는 거리가 어찌나 멀게 느껴지던지. 하필 그 날은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아주 추운 날이었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조차도 힘겹던 날, 나는 밤새도록 끙끙 앓았고 목이 너무 아파 음식을 삼키기 힘들어 밥도 몇 술 뜨지 못했다. 겨우겨우 회사에 연락을 취한 뒤로 내내 잠에 취해 있었다.


  잠시 밥을 먹거나 약을 먹거나 물을 마시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잤다. 신생아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움직일 기력이 아예 없었다. 이미 걸렸던 지인들 말로 많이 아팠더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감기를 넘어선 그 이상의 고통이 존재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다. 큰 수술을 치른 것도 아닌데 몸은 힘이 없이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오한에 덜덜 떨었고, 목은 김치조차 먹을 수 없을만큼 아팠다. 뿐만 아니라 당장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엔 가래만 수시로 끓었다.


  하필 부모님과 떨어진 곳에서 격리를 하게 된 바람에 처음엔 혼자서 병마와 싸워야 했다. 알아서 밥을 챙겨먹고 주변을 정리하고 약을 챙겨먹는 게 어렵진 않았지만 꽤 서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내 몸 속 아군을 지원해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가습기도 빵빵하게 틀었고 뜨거운 물도 수시로 마셨고 먹을 것도 잘 챙겨먹었으며 약도 빼먹지 않았다. 다행히 삼일쯤 지나자 몸 안의 전투에서 아군이 승기를 잡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조금씩 증세가 약해졌고 덕분에 깨어있는 시간이 늘었다.


  그리고 이 무렵 서울의 부모님댁으로 거처를 옮겼다. 멀리 떨어져 있는 딸이 혼자 앓는 게 안쓰러웠는지 아버지가 데리러 내려왔다. 사실 코로나 어택을 당한 건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가족 전부였다. 다만 부모님은 증세가 없거나 미미했다. 아버지는 지난 3월 확진된 뒤로 항체가 생긴건지 엄마와 내가 동시에 확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증상이 없었다. 정신이 멍한 가운데 골골대는 몸으로 아버지 차에 탔고 따뜻한 밥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그 때만큼 울컥한 때가 없었다. 떨어져 지내는 것도 꽤 익숙해졌다고, 되레 너무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파보니 그리운 게 엄마의 밥이었고 가족의 품이었다.


엄마는 목이 아픈 딸을 위해 김치를 물에 씻고 잘게 잘라서 내왔다. 그리고 잘 삼켜야한다며 죽과 부드러운 국물 요리를 내내 만들었다. 비교적 증세가 심하진 않았지만 같은 코로나 확진자였던 엄마는 더 아픈 딸을 챙기느라 바빴다. 먹고 자며 편히 쉴 수 있도록 엄마는 최선을 다했다. 그 노력 끝에 내 몸은 회복했다.


Hero images, Getty images


격리 해제 1일차, 아직도 코로나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오늘 오랜만에 출근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코는 막혔고 가래가 끓었다. 전보다 증세가 많이 좋아졌지만 조금만 앉아 있어도 금방 지쳤다. 오랜만에 얼굴을 본 동료들은 그 몸으로 어떻게 나왔냐고 했다. 그래, 내가 봐도 다크서클이 너무 진했고 살이 좀 빠져 몰골이 꽤 불쌍해보이긴 했다. 며칠을 앓은 탓에 퀭한 얼굴은 마스크로도 채 감춰지지 않았다. 결국 내일 다시 병가를 쓰고 쉬기로 했다. 몸은 대체 언제쯤 좋아지는 건지 코로나와의 사투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물론 처음 코로나 증상이 발현되었을 때는 이 정도면 고작 1주일 쉬는 걸로 되겠느냐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5일차로 접어들면서 증세가 급격히 좋아졌고 내 몸의 면역세포도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우세한 지위를 차지한듯 보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미한 증상들이 남아있다. 예컨대 나는 여전히 멍하다. 전에 맡을 수 없었던 된장 냄새가 이제 다시 나긴 하지만 여전히 시공간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다. 바이러스와의 전쟁 과정에서 뇌세포마저 많이 사멸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기분의 등락이 꽤 있었던 전과 비교해 지금은 기분에 큰 변화가 없다.


  다들 후유증이 꽤 길다는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나는 감염자가 아니라 슈퍼항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수한 증언들을 간과했었다. 아프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런 허세도 함부로 부리는 게 아니라른 것을. 그래도 사람들이 이르길, 한 달쯤 뒤면 비로소 정상의 몸으로 돌아간다던데 과연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여전히 내 몸은 전투중이다. 이 생경한 싸움을 부디 잘 마무리지었으면 좋겠다.


https://www.staywelloh.co.uk/sickness-absence-what-are-my-responsibilities-as-an-emplo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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