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하루를 담다,
2월, 이사를 했다.
1월 중순 쯤. 갑자기 이사를 해야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난 5월 전세 계약만료로 인한 퇴거 이후 두 번째 이사였다. 그 때에도 이사는 갑작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이었다. 10년 가까이 벽지와 장판 그 밖의 모든 것들이 방치된 채로 있었던 공간에서 LED등 교체, 벽지 교체, 주방 교체 등 새롭게 단장한 공간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예상치도 못했던 행운에 얼마나 설레고 행복했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갖게 된 넓은 공간에서 나는 바닥을 치던 자존감을 회복했고 슬픔으로 가득하던 현재를 이겨내며 더 나은 미래를 꿈 꿨다.
그렇게 애정으로 가꾼 공간을 떠난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이사해야 할 원룸 컨디션이 썩 좋지 않다는 게 걱정이었다. 원룸에 살던 이는 별로 살 만한 공간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열심히 쓸고 닦으며 정 붙였던 공간을 떠나는 것도 아쉬웠지만 '완전 별로'라는 곳으로 이전하는 걸 원치 않았으며 1년도 채 안 되서 다시 이사 준비를 해야하는 것도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기우였다. 더 최악이지 않을까 했던 걱정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방의 주인이던 이는 집안을 전혀 관리하지 않았고 바퀴벌레 그리고 거미와 동거를 하며 지냈다. 방 상태를 둘러보니 벌레를 탓할 게 아니었다.
그래서 전쟁 같은 시간을 보냈다. 인사이동과 이사가 맞물린 달이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맞이하고 소폭 바뀐 업무에 적응하는 것도 일이었지만 일과 후 매일같이 이사갈 집에 들러 청소를 했다. 가스 연결을 끊어놓은 상태라 얼음장 같은 바닥에 하수구 냄새가 심해 창문을 열어놓아야 해 냉골같은 집이었지만 매일 조금씩 쓸고 닦았다. 오랜 먼지가 쌓여 있던 창틀부터 기름 때로 얼룩진 현관문까지. 해야할 일은 많았고 체력과 시간은 부족했다. 약 1주일간 부지런히 이사 준비를 하면서 차라리 입주 청소를 부를걸 그랬다고 후회를 많이 했다. 그래도 애쓴 보람이 있게 낡고 먼지가 가득한 곳에서 아늑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체리색 몰딩도 자꾸 보다보니 정이 든다.
많은 게 변했고 나 역시 변했다.
지난 해 말. 나는 또 다시 사람들과 부대껴 지내다 상처가 가득해진 상태였다. 솔직하지도 않았고 이타적이지도 않았으며 공감대 형성도 어려워 거리감이 느껴지던 이들과 지냈던 때였다. 하지만 다행히 인사이동 이후 불편했던 사람들은 떠났고 좀 더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새로 왔다. 어딘가 한 구석 불편했던 마음도 편안해졌다. 꽉 막힌 듯한 상태가 풀리고 문득 지난 시간을 돌아봤는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참 많이 성장했다는 걸 느꼈다. 모든 걸 혼자서 알아서 해결해야하는 상황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지만 그 모든 걸 해낼 집념과 용기가 내게 있었다.
혼자만의 삶을 그럭저럭 꾸려나간다는 건 간단한 듯 보였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공부와 일에 파묻혀 살 때는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바깥 세상에만 두었던 관심이 집 안으로 향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살림에 관심이 생겼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세상은 겨우 반쪽짜리였단 걸 깨달았다. 지금은 분위기 좋은 카페를 가는 것보다 집 안에서 혼자 조용히 커피 한 잔 하는 게 더 좋다. 집순이가 될 줄은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는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성공에 대한 집착은 사라졌고 '좋은 삶'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나의 취향에 대해서도 더 확실히 알게 된 시간이었다.
또 다시 봄이 온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른다. 내가 머물러 있든 변했든 상관없이 늘 흐르고 있다. 큰 기대도 큰 실망도 없이 하루를 살아내려고 노력한다. 어떤 일이든 일희일비하지 않고, 좀더 차분히 변화를 관망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서. 다가올 봄이 얼마나 따뜻하고 다정할지 기대가 된다. 부디 무탈한 하루가 시작되고 끝나기를 바라본다. 꼭 더 나은 미래는 아닐지라도 지금과 견주어 크게 다를바 없는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