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하루를 담다,
식물 이파리가 더욱 짙은 색으로 물드는 계절이 왔다.
전에는 뭐든 금방 죽였다. 오죽하면 구피 몇 마리도 얼마 못 가 싸그리 죽어 연쇄살어마라는 칭호마저 얻었다. 하지만 이젠 제법 혼자 잘 해내는 것들이 많아졌다. 실패를 통해 얻은 깨달음 덕분이다. 과거의 나는 항상 지식은 부족했지만 의욕은 넘쳤다. 그래서 쓸데없이 영양을 과다하게 주거나 물을 과다하게 주는 등 필요치 않은 일들을 벌였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늘 좋지 못했다. 식물이든 물고기든 급격히 변해버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금방 죽어버렸다. 뭐든 너무 잘하려고 애쓴 결과가 보람없이 끝나는 게 아쉬웠지만 이제는 과욕은 금물이라는 걸 안다. 생각이 앞서 과한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식물을 키우는 일이든 내 삶을 이끌어나가는 일이든 전보다 욕심을 내려 놓고 지낸다.
지금 키우는 화분은 총 5개다. 그저 흙이 메마르지 않게 물을 주고 햇볕을 쐬어 줄 뿐인데 부쩍 뜨거워진 태양을 반기기라도 하는지 무럭무럭 잘 크고 있다. 북향이라 햇살이 좀 부족하지 않을까 한 걱정과 달리 화분 사이즈에 비해서도 큰 이파리를 내는 바람에 화분갈이를 벌써 해야하나 고민이 된다. 자그마한 원룸 안에 살아 숨쉬는 게 나뿐이었다면 더 쓸쓸했을텐데 그나마 한 켠에 푸른 빛을 내는 아이들이 있어 위안이 된다. 그런데 식물만으로는 외로움이 다 해갈되지 않는 것 같아 물고기를 다시 키워볼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고 있다. 물론 계절마다 수온 맞추랴, 깔끔하게 물갈이 해주랴 온갖 뒤치다꺼리 할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와 참고 있긴 하다.
나 혼자서도 거뜬할 거라 생각했는데 틀린 생각이었다.
좀 더 어릴때만 해도 혼자 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로망이었다. 나 혼자 요리하고 청소하고 원하는 채널을 돌려가며 TV를 보고 그런 것들이 희망사항이었다. 작년까지 룸메이트와 동거를 했으니 혼자 살고 싶다는 욕망은 더 컸다. 룸메이트와 함께 살던 시절 왠지 내가 저 아이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짜증도 많이 났었다. 스스로도 몰랐지만 나는 철저한 계획형의 깔끔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고 적어도 주에 3번은 전체적인 집안 청소를 해야 한다. 청소에 들이는 에너지가 많아 로봇 청소기까지 살 정도였다. 물론 그 때에 비해 지금 사는 방이 훨씬 좁지만 옮기고 나서도 청소기부터 다시 샀을 만큼 나에겐 청소와 청결이 중요하다.
하지만 함께 살았던 룸메이트는 청소와는 거리가 먼 친구였다. 그래서 그 아이의 머리카락도 내가 주웠고 먹다 흘린 과자 부스러기를 치우는 것도 내 몫이었다. 꽉 찬 쓰레기통을 비우는 것도 그걸 내다버리는 것도 거의 혼자 다 했다. 물론 내가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 큰 불만은 없었다. 다만 타인과 생활 공간을 공유하게 되면 서로 다른 생활 방식도 공유해야 한다는 불편함이 생기기에 꼭 누구랑 같이 살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정작 혼자 살아보니 외로움이 견디지 못할 만큼 커졌다. 상대와 꼭 들어맞지 않기에 생기는 불만과 긴장감은 한편으로 마음 저 편의 외로움을 내쫓을 좋은 구실이었다. 그 땐 남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게 썩 내지키 않았지만 지금은 혼자서의 삶 역시 썩 즐겁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찬란했던 과거의 순간들이 그립고 또 그립다.
항상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나아질 거라 기대하고 욕심을 부렸던 과거의 나는 몰랐을 거다. 미래의 내가 이토록 무기력한 모습이 될 줄은. 온갖 생각이 뒤엉키지만 그걸 표현할 적당한 말과 글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게 힘에 부친다는 생각이 들 때면 사진첩을 꺼내본다. 계절의 싱그러움이 담긴 사진들, 그 안에 활짝 웃고 있는 내 얼굴. 지금은 만난 지도 꽤 시간이 흐른 지인들의 모습들. 유쾌했던 찰나의 순간을 기록한 모습들을 소중히 들여다 본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과거의 순간들은 사진과 영상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오늘도 과거의 어느 한 때 내 모습을 들여다 보며 지금 내 손에 잡히지 않는 행복을 추억한다. 빛바랜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행복을 잠시 꺼내본다.
다가올 미래에 다시 그 행복을
기쁘게 마주할 순간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