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하루의 끝을 걷다

어느 겨울 해질녘의 단상

by 흔한여신

‘또각. 또각’ 잔뜩 몸을 웅크린 채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아직은 퇴근하기에 이른 시간. 한산한 거리 위를 홀로 걷고 있다. 발 아래 그려진 화살표를 따라 종종걸음이 이어진다. 이따금씩 골목 안을 속도 높여 질주하는 차를 만나면 주차된 차량 뒤에 잠시 멈춰 섰다가도 이내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낮 동안 잠시 데워진 공기가 지면을 따라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에 미처 주변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다가 문득 길어진 그림자를 보았다. 땅 아래로 향한 시선이 발길을 붙들자 비로소 잠시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전깃줄이 얼기설기 선을 수놓은 하늘 끄트머리에 해가 걸렸다. 저 사라지는 광명이 내뿜는 붉은 기운을 누군가 그려 놓은 것처럼 하늘은 아름다웠다. 참고 있던 숨이 터져나온다. 아직 밤이 오지도 않았건만 이미 긴 하루였다.


어릴 때부터 태양이 좋았다. 모든 물체를 빛나게 해주는 그 존재를 동경했다. 태양같이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해가 없는 밤은 싫었다. 온갖 난해한 문제들이 가슴 속에서 아우성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엔 셀로판지를 덧대어 태양을 올려다봤다. 어른이 되어서는 힘든 순간마다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하지만 도시의 하늘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전깃줄 사이 또는 건물 사이로 하늘이 빼꼼히 보였다. 그럼에도 태양은 어디에서든 그 존재감이 뚜렷했다. 나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혼자의 힘으로 만물을 비추기엔 역부족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태양처럼 환하고 따사롭기엔 내게 주어진 책임이 내 어깨를 짓눌렀고 한숨이 푹푹 쉬어졌다. 시간이 늘 부족해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질 틈이 없었다. 바깥 세상이 얼마나 환한지 혹은 눈이 내리고 있는지를 옆에서 누군가 이야기를 해줘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날씨는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는 것인데 나는 늘 어플리케이션에서 오늘과 내일의 날씨를 체크했다. 그래서 태양을 올려다 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하늘을 보니 괜시리 눈물이 났다. 가을이면 좀 센치해져도 괜찮을듯 한데 시린 바람이 부는 겨울에 코끝이 찡하니 볼썽사나워 보인다.


그래도 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며 추억에 잠겼다. 그 추억 속에 나는 이십대 초반이었다. 어린 나이, 한창 나만의 멋진 미래를 꿈꾸던 시절. 타향에서 나는 흐르는 강가에 앉에 지는 해를 바라보곤 했다.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될까 걱정반 설렘반으로 미래를 상상해보았고 지는 해 구경에 푹 빠져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정해진 게 없어 두려웠지만 한편으론 나아갈 미래가 있어 행복했었다. 그저 지는 해를 벗 삼아 풍경 안에 앉아 있을 수 있어 즐거운 때였다. 그때의 난 언젠가 성공해서 다시 이국의 땅을 밟을 수 있기를 소망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어두운 지금의 나를 미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의 내가 너무나도 그리워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어졌지만 한적한 길거리라도 사람들이 아예 없진 않아서 그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려는 눈물 방울을 애써 가리며 천천히 길을 걸었다. 어느 새 태양은 저 편으로 자취를 감추고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인생의 사계절 중 지금이 겨울이리라, 생각하며 가로등 불빛 아래 길을 걸었다.


태양만큼 밝지 않지만 눈 앞을 비추는 불빛과 저 멀리 빛나는 별빛이 있어 외롭지 않은 밤 길을 어제도 오늘도 걷는다.




written date: 2019. 12월

**사진을 보고 상상해서 쓴 자전적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