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공시생 (1/7)

series: 취준생의 백수 탈출 도전기

by 흔한여신

2015년 겨울. 11학번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던 나는 어느덧 3학년이 되어 있었다.


곧 졸업생 신분이 될테니 취업준비를 해야할 시기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진로를 어떻게 정해야할지 막막했다. 또 뭘 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다보니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몰라 허둥지둥댔다. 일단 공인 영어 점수가 필요하니 토익 시험을 봤고 한국사 검정시험도 스펙으로 한 줄 넣을까 싶어서 응시했다. 인턴 경험이 필요할 것 같아서 여기저기 사이트를 둘러보며 내가 할 수 있을 법한 자리를 물색했다. 지금도 별반 다를게 없다 생각하지만 그 때는 '열정페이'가 대부분이라 무급이나 얼마 안 되는 보수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럴듯한' 자리에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허들을 넘어야 한다는 절실함 때문이다.


저 멀리에 탁트인 바다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 photo by. 흔한여신


처음엔 대학공부를 하다보면 갈 방향이 잡히겠지하고 어렴풋이 가벼운 결론을 내렸다. 현재의 내가 아닌 미래의 내가 해결할 문제라고 덮어둔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대책없이 시간이 흘렀다. 학창시절에는 그냥 주어진 걸 잘 하면 되는 게 전부였는데 이젠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 부모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고 이끌어주는 선배도 딱히 없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역량을 쏟아부어 밥벌이를 해야할 때가 왔는데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은 내 앞 길은 캄캄했다.


당시 내 스펙은 몇 가지 상을 탄 이력과 짧은 해외 연수경력 그리고 사무보조로 일한 것 그리고 학과 성적이 좋았다는 것 뿐이었다. 출신학교는 그 자체로 스펙이 되는 그런 대학이 아니었다. 나는 매일같이 합격수기와 채용공고를 쉴새없이 들여다보며 내가 어떤 자격사항을 갖추어야 할지 고민했고 내 스펙은 어느 정도 점수인지 남들과 비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현실이 암담하게 느껴졌다.


모두가 취업준비를 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초라하단 사실을 절실히 깨닫지 싶다.


흔히 '자기소개설'이라고 이야기하는 '자소서'는 어마머어마한 난관 중 하나다. 내 지난 삶을 기록하는 내용인데 부풀릴래도 당당히 자랑할 만한 건수가 많지 않았다. 겨우 어린 나이에 무슨 대단한 족적을 남길 수 있단 말인가.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시험해보지 못했는데 이미 남들에게 어필할 정도로 내 자신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니, 모순이었다. 하지만 남들은 이미 많은 걸 경험했고 제법 자신의 이야기를 잘 꾸며냈다. 대체 어디서 배워 온 글 솜씨인지 언제 했던 경험인지 감히 흉내내지 못할 만큼 멋드러진 내용이었다. 내가 모르는 새 벌써 몇 발짝이나 앞서 있는듯 했다.


그런 내가 공시생의 길로 들어선 건 결코 '공무원'이란 직업에 대한 환상이나 안정적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공무원에 관심 갖기 보단 어릴적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는 '외교관'이 꿈이었다. 2015년 초에 국회에서 짧은 인턴을 마치고 나는 잠시 꿈꿨던 기자의 꿈을 내려놓았다. 당시 아는 선배가 기자를 하고 있었는데 매번 경찰서에 접수되는 사건사고 중 뉴스거리를 찾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데다가 김영란법 제정 이전이라 기자들의 윤리의식도 좋지 못했던 시기였다. 소위 '기레기'로 불리우는 데에 대한 실망감과 체력소진이 생각 이상으로 과도하다는 점에서 나는 그에 대한 꿈을 접었다. 사실 돌이켜보면 기자를 꿈으로 삼을 만큼의 열정은 없었던것 같다.


처음엔 막연히 외무고시를 준비해볼까 생각했다. 내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여긴 때였다. 하지만 고3 수험생들이 고1때는 서울대를 가겠다는 목표를 세웠다가 점점 학년이 올라갈수록 기대보다 낮은 학업성적과 이상의 간극 때문에 그 목표치가 하향조정되는 현상처럼, 이상적인 첫 목표였다. 하지만 홀로 PSAT을 공부한지 3개월 만에 고시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오랜 수험생활을 버틸 자신이 금세 없어져 버린 탓에 바로 눈을 낮춰 7급 외무영사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영사직이라도 어디냐며 그렇게 수험생, 공시생으로서 첫 발을 뗐다.


수험생활 동안 나는 거친 눈보라 속에 있었다, photo by. Jundori


우선 1년 휴학을 신청했다. 치러야 할 시험과목 중에 제2 외국어가 있어 프랑스어 학원을 등록했다. 그렇게 어쩌다 공시생이 되었다. 이왕 공부를 시작했으니 시험을 보자 싶어서 15년도 7급 공채시험에 응시했다. 고사장 가득 감돌던 긴장감에 놀랐던 기억이 선명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합격생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게 느껴져 새삼 소름이 돋았다. 물론 그냥 어영부영 공부하다가 온 사람도 있을테지만 한껏 벼랑 끝에 내몰린 기분으로 도전하는 이도 있을 것이었다.


대학에 와서 객관식 문항과는 충분히 거리두기를 했다 싶어 만족스러웠는데 다시 뛰어든 수험생활은 온통 암기형 객관식 문제풀이였다. 한국사는 한국사 검정 능력시험 준비로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여겼는데, 출제되는 기출문제를 보니 정말 지엽적인 부분에서 당락이 결정됐다. 정규교육 과정을 착실히 들었던 사람으로서 국어공부가 어렵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온통 이해할 수 없는 문법이 도사리고 있었다.


처음 수험생활 시작할 무렵에는 아직 돈을 벌고 있는 상태였다. 학원 선생님으로 일함과 동시에 과외 수업도 하고 있었는데, 당장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일과 공부를 몇 달 간 병행했다. 집안에선 수험생이었지만 밖에선 알바에 열심히인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수험생활에 드는 비용은 사실 만만치 않다. 지금은 내가 공부하던 때보다 인강 수강 비용 등이 훨씬 올랐는데 책값이며 강의료며 드는 돈이 한 두푼이 아니었다. 처음엔 돈을 벌고 있던 터라 내 벌이로 생활비와 공부에 드는 비용을 감당했다. 하지만 온전히 공부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도저도 아닌 채로 나는 수험생활을 지속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