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공시생 (2/7)

series: 노량진 생활 입문기

by 흔한여신
멋모르고 공시 열풍에 뛰어든 초보 수험생


본격적으로 현장강의를 듣기 시작했던 2015년 가을무렵. 나는 외무영사직 직렬의 선택과목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학원에서 본격적으로 공시생 생활을 시작했다. 휴학까지 하고 수험생활을 시작한 이상 내년에는 어떻게든 목표를 달성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수험생활 초반 나는 아직 몸과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학교에 드나들지 않았을 뿐 대학생 시절의 생활 패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깐 수험생으로서 다부진 각오같은 게 별로 없이 설렁설렁 공부를 시작했다. 사실 그 때는 아직 이 길이 맞는건가 싶은 마음에 살짝 방황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진지하게 장기전에 대비할 태세가 없이 계속 공부를 할까말까를 고민하느라 쓸데없이 시간이 흘렀다. 결국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은 생각에 노량진행을 선택하게 됐다.


일반행정 직렬 시험과 달리 외무영사직의 경우 ‘국제법, 국제정치학’ 같은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과목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다른 시험과 공부하는 과목이 겹치지 않아 오로지 1년에 단 한 번의 응시기회가 주어졌다. 이에 반해 일반적으로 행정직렬에 응시하는 공시생들은 지방직, 국가직, 교육행정직 등 시험마다 중첩되는 과목이 있어 1년에 여러 차례 시험에 응시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기회가 많지 않아도 응시자 수는 갈수록 늘었고 해마다 선발 인원을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경쟁률이 떨어지진 않았다. 그리고 그 수치 데이터는 사실 크게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뉴스에 가장 공시 열풍을 나타내는 지표로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좋은 기삿거리가 됐다.


꿈을 향한 여정의 시작, photo by. 흔한여신


처음 노량진 학원가에 왔을 때 느꼈던 그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는 잊히지가 않는다. 숨이 막힐 듯한 알 수 없는 우울한 분위기가 내 어깨를 짓눌렀다. 찬찬히 둘러보는데 회색빛이 감도는 풍경이었달까. 하나같이 트레이닝복 차림에 대충 동여맨 머리 혹은 푹 눌러 쓴 모자. 거기에 살짝 어두운 표정으로 바삐 제갈길을 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또 지금은 학생 수가 줄어든 여파로 매출이 전과 같지 않아졌을테지만 예전엔 노량진 학원가 골목마다 컵밥집이 즐비했다. 그 앞에 늘어선 줄 때문에 정상적인 통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뉴스로 폐업 소식을 접하긴 했지만 '고구려'를 비롯해 고시식당이 다양하게 많았다. 수험서에 드는 비용도 만만찮은데 밥값이라도 줄여보려면 싼 걸 찾을 수밖에 없었고 그 중에서도 고시식당은 반찬 가짓 수가 많아 가성비가 좋은 선택지였다. 저렴한 가격에 식사가 제공되는 고시식당 특성상 대개 시설이 좋지는 않았지만 음식이 제공되는 게 만족스러워 자주 갔었다. 특히 더운 여름날 에어컨 하나 없이 대형 선풍기 몇 대에 의지해 밥을 먹었던 게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몇날 며칠을 혼밥하면서 겉으로는 담담한 척 지냈지만 하루종일 말 한마디 없이 책과 씨름하는 일이 사실 쉽지 않았다.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공시 공부에 뛰어든 사람들은 서로의 기쁨과 슬픔에 관심을 가질 여력도 없이 온종일 책에 고개를 파묻는 게 일상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낮부터 술판을 벌이거나 근처 PC방에서 열심히 농땡이를 피우는 사람들도 있었고, 혼자인 사람들 틈에 손을 꼭 붙잡고 다니는 커플들도 많았다. 한창 혈기왕성한 청춘이 대부분인데다가 노량진의 자취생들은 대개 지방에서 상경한 경우라 외로움도 싸워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지독한 외로움과 결핍은 학습에 대한 집중력도 흐트러뜨린다. 하지만 그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수험생활을 버텨낼 수가 없다.


노량진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도 처음엔 거북했지만 낯선 풍경이 한둘이 아니었다. 지금은 인강이 대세가 된지 오래지만 노량진이 한 때 수험생들로 발 디딜 틈 없었던 시절, 나는 '노트줄'이라는 게 있는지 처음 알았다. 현강을 듣기 위해 수업 전부터 사람들이 강의실 앞에 줄을 서기 시작하는데 아무래도 공부하랴 바쁘다보니 제자리에서 장시간 대기하긴 어려웠다. 특히 강의실에 몇 백 명이 들어가는 수업의 경우 선착순으로 줄을 서다보면 수업 몇 시간 전부터 줄이 서 있는데 사람이 직접 서 있는게 비효율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노트에 자신이 온 순서대로 번호를 쓰고 그걸 차곡차곡 던져두고 갔다. 노트가 사람을 대신한 줄을 잇고 있었다.


또 '회독'이란 단어도 처음 접했다. 선배 수험생들이 끊임없이 강조했던 '회독'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수험서를 훑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부터 모든 개념을 다 숙지하고 가기엔 한계가 있다보니 여러 번 반복해 공부를 하면서 전 회독 때는 모르고 지나갔거나 외우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한번 보고 익히는 것이다. 공시생 수가 늘고 수험생들의 수준도 높아지다보니 점점 더 문제 출제범위에 지엽적인 내용이 들어가게 되면서 공부 범위 또한 넓어진 만큼 '회독'을 이용한 공부방법은 필수였다. 회독 수가 많아질수록 수험서는 점점 손때 묻어갔고 나는 이것을 내 작은 성과로 뿌듯하게 여기곤 했다.


6641_1990_2517.jpg 일러스트 최효정 기자(인하프레스)


문득 내 처지가 고달프다 느껴져 서러운 날이 있었다.


나는 집에서 학원까지 통학을 했는데 처음에는 학원에 짐을 보관할 곳이 없어 가방 안은 늘 책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현장에서 강의를 직접 듣는 게 더 나을것 같아 선택한 일인데 수험서로 가득한 가방이 워낙 무거워 겨울에는 뒤뚱거리다가 정말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무거운 짐가방을 안고 서러웠던 아침도 있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나는 책으로 가득 찬 가방을 품에 안고 아침시간 학원에 가기 위해 버스에 탔고 겨우 앉은 자리에서 바로 곯아떨어졌다.


그런데 하필 노약자 좌석에 앉아 있었고 중간쯤 갔을까 누군가 자는 나를 툭툭 치는 게 느껴졌다. 감기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리니 잔뜩 성난 얼굴의 할아버지 한 분이 서 있었다. 자리 주인이 왔으니 어서 일어나라는 것이었다. 그는 지팡이를 무기처럼 사용하며 팔꿈치를 치다가 잠에서 쉽게 깨지 못하는 내게 대뜸 소리를 질렀다.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피곤에 절어 있었던 탓에 몸이 휘청거렸다. 이미 자리에서 비켜났건만 그 노인은 분을 쉽게 삭이지 못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노약자 좌석을 차지하고 앉는 게 말이 되냐며 그는 연신 화를 냈다.


덕분에 아침부터 내 꼬라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남루한 행색으로 버스에 올라타 꾀죄죄한 듯 보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저보다 약한 입장에 놓인 학생이라고 얕잡아 봤기에 함부로 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감히 노인을 상대로 화를 쏟아낼 수도 없어 가만히 참고 있었지만 차오르는 설움을 어쩌지 못했다. 다만 어서 수험생 신분을 벗어나야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의 끝을 좇는 시선, photo by. Jund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