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es: 희망을 잠식한 절망
바깥세상에 완연한 봄기운이 가득할 때도
노량진은 왠지 한기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수험 준비기간은 계절의 이치와 유사한 점이 있다. 공무원 수험생들은 시험 일정이 없는 겨울 동안 시험준비에 최선을 다한다. 봄이 시작되는 3월부터 법원직, 경찰행정직 등 시험일정이 시작되었고 가을에 있는 지방직 7급 시험까지 한 해의 시험일정이 모두 마무리되고 나면 노량진을 떠나는 이도, 절망한 채 더 남아있는 이도 있었다. 길지 않은 인생에서 그토록 고독하게 하루하루를 보낸 건 수험생활이 유일했다. 매일을 불안에 떨며 요동을 치는 감정 곡선을 애써 외면해야 했기에 더욱 고달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겉보기와 달리 안으론 쓰라린 속내를 감추며 하루를 버텨냈다. 애써 담담하게 인생의 작은 반환점을 도는 것이다 생각하며 묵묵히 공부를 파고들었던 시절, 내게 세상은 온통 회색빛 같아보였다.
수험생활 동안 겨울은 기다림과 준비의 시간이었는데, 그 계절이 되면 마음도 헛헛해지는데다가 해를 보는 시간도 짧아 설움이 더해지곤 했다. 어느 겨울 동안에는 해가 뜨기도 전인 6시에 집에서 나와 해가 이미 다 지고 난 9시 넘어서 학원을 떠나 집으로 향하는 그런 생활을 지속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밥 먹는 시간도 아끼려고 도시락을 들고 다녀 더욱 외부세상과 단절된 채로 지냈다. 그 땐 하루종일 창문도 별로 없는 건물 안에 박혀 있다보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오늘 날씨가 어떠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의 경우 다행히 집에서 오가며 수험생활을 뒷받침해 주는 부모님의 덕을 봤지만, 어떤 이는 생활비가 부족했던 탓인지 하루종일 쥬시쿨과 편의점 빵 한조각에 의지해 버티는 것도 봤다.
15년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수험생으로 본분을 다하기 시작했던 나는 16년도 국가직 7급 시험까지 들인 노력이 조금 부족했던 탓에 합격권에서 아주 먼 점수를 받았다. 이미 15년도부터 휴학중인 4학년생이었는데 1년을 휴학하고 추가로 더 시간이 필요해져 16년도 상반기까지 추가로 휴학기간을 연장했다. 하지만 학칙상 그 이상 연장할 순 없어서 마지막 한 학기를 이수해야 했다. 즉 16년도 하반기엔 학교생활과 수험생활을 병행해야 했다. 공부에 온전히 집중하기에도 버거운데 학점 이수까지 신경써야하는 게 달갑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험생이 된 후 듣게 된 막학기 수업 동안 새삼 내가 대학생이라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유종의 미를 거둘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당장 취업이 급선무다보니 수업 시간에도 수험서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졸업 요건을 충족하려면 졸업논문을 써야했는데 그 동안 전공과목 관련해 연구한 게 없으니 떠오르는 아이디어도 없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학점을 포기할 순 없어서 꾸역꾸역 수업에 참석했다.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잠시 노량진 생활을 접고 집과 학교를 오가며 수험생활을 이어나갔다. 학교엔 어여쁜 그리고 저들만의 설렘과 기대에 부푼 캠퍼스 생활을 하고 있는 청춘들이 빛나고 있었지만, 나는 도둑강의를 듣는 학생인 마냥 제 존재감을 감추고 다녔다. 대학생활의 낭만을 만끽하거나 그곳에서의 마지막을 추억할 그런 여유는 전혀 없었다.
내년엔 반드시 시험에 붙으리라 다짐했다.
처음 수험생활을 시작했을 땐 멋모르고 뛰어들어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이미 몇 번의 시험을 거치고 나니 어느 정도 기본기가 잡혀 있었다. 마지막 학기 수업이 끝나자마 나는 다시 노량진으로 돌아갔다. 수험생 입장에서 오히려 대학생활에 더욱 이질감을 느꼈다.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절실함이 더욱 컸고 그렇게 나는 17년 8월에 있을 시험을 위해 ‘독학반’ 수강권을 끊었다. 소위 ‘자물쇠반’ 같은 규칙이 있는 곳이라 스스로를 더욱 규칙적인 생활에 종속시키고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독학반은 인강과 함께 하루종일 공부할 공간이 제공됐는데 위치는 노량진 학원가에서 좀 떨어진 노들역 근처에 있었다. 때문에 사육신 공원이나 한강공원이 적당히 걸을 만한 위치에 있었고 수험생들의 왕래가 없어 조용한 분위기였다.
오래된 건물이라 웃풍이 들이쳤던 건물은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진 않았다. 특히 시험을 앞두고 잔뜩 예민해진 수험생들이 대부분이라 조금만 큰 소리에도 불평불만이 쏟아졌다. 볼펜 똑딱이 소리, 가방 지펴 여닫는 소리, 철제 필통의 요란한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채점하거나 필기할 때 유난히 거슬리는 소리 등등. 조교랍시고 관리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온종일 쏟아지는 내부 민원과 사람들 통제에 아마 꽤나 고생했지 싶다.
제 아무리 포스트잍을 문앞에 붙여 공동생활인만큼 주의해줄 것을 요구해도 개인의 생활 버릇이란 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또한 담배를 피우는 경우엔 쉬는시간 동안 그 냄새가 다 빠지지 않아 옆사람에게까지 담배향이 진동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잘 씻지 않아 냄새가 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사무실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반면 그 시절 나는 그런 사소한 불편함에 격하게 반응하곤 했다.
집 근처 독서실을 선택하기보다 노량진 통학을 고집했던 이유는 홀로 마음이 해이해지는 걸 방지하고자 한 목적이 컸다. 비슷한 처지의 수험생들이 공부하는 걸 지켜보면서 나 역시 의지를 강하게 다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을 이어갔다. 매일같이 쪽지시험을 보고 등수대로 줄이 세워졌고 팔이 아프도록 필기를 했고 머리에 쥐나도록 외워지지 않는 개념을 암기했다. 마음이 답답할 때에는 한강변으로 걸어나가 잠시 숨을 고르기도 했고, 도시락을 먹을 때엔 드라마 ‘도깨비’를 보며 칙칙하고 어두운 마음을 달랬다. 그렇게 지겨운 수험생활에도 끝이 보이는듯 했다.
하지만 시험 결과는 또다시 불합격이었다.
끝내 나는 원하던 진로로 나아가기 위한 허들을 넘지 못했다. 17년도엔 이전 해와 비교해서고 스스로 준비를 많이 했고 노력을 정말 많이 기울였기 때문에 기대한 만큼 속상함도 컸다. 지금 돌이켜보면 분명 부족했던 부분이 있었기에 고배를 마신 것이지만 그 때는 수험생활을 지속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결국 나는 노량진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백수가 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전부 직접 쓰거나 타이핑한 필기노트/o,x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