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공시생 (6/7)

series: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by 흔한여신

아직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가을, 명패도 걸려 있지 않고 집기들도 부족한 작은 임시 사무실에서 9명의 동료들과 짧은 항해를 시작했다. 지금도 별다른 혜택없이 명예만 주어질 뿐인 선정이라 의미 있는 사업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신청하는 기업 수가 많아야 선정하는 게 의미가 있으므로 사업장을 설득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래서 매일 홍보 차 몇 십통의 전화를 여기저기에 돌려야 했다. 나는 사업장에 신청해달라며 읍소 아닌 읍소를 했다. 하지만 사업장에선 경제적 지원이 있느냐는 질문에 애매한 답변을 늘어놓자마자 대번 스팸전화 취급을 하고 매몰차게 끊기 일쑤였다. 방해된다 여기는 그 심정을 이해못하는 게 아니었지만, 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


결국 정부 부처의 이름을 팔아 전화를 거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나의 소속기관이 아니었으나 고용노동부라는 이름을 대면 적어도 한번에 전화를 끊어버리진 않았다. 정부기관의 위력을 확인했던 셈이다. 그 때문에 지금은 오히려 언급할 일이 별로 없지만 처음 입사하고 난 뒤에도 자랑스럽게 여겼던게 바로 내 소속부처명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보실적은 지지부진했고 신청률은 예상대로 저조해서 한 동안 신청률을 끌어 올리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사실 제출된 신청서를 전산에 입력하고 관리하는 게 주된 업무였고, 사업장에 연락해 부족한 서류를 보완받고 다음 일정을 안내하는 것 또한 주어진 일의 일부였다. 그런데 그 때는 그런 사소한 일에도 알 수 없는 책임감이 샘솟아 열심히 했다. 지금은 예의 친절함이 몸에 배어나오지 않으니 새삼 격세지감을 느낀다.


다행히 생각보다 많은 기업에서 신청을 했다. 나중에 몇몇 우수업체를 선정해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 물어보니 직원들에게 자랑스러울 만한 표창이 될 거라 생각한 기업도 있었고 정부의 평가나 인증이 기업 이미지 제고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 기업도 있었다. 선정된 기업들은 장래가 유망했을 뿐만 아니라 저마다 우수하다고 볼 만한 장점들이 적어도 하나 이상 있었다. 또한 생각지도 못한 복지혜택과 직원 편의를 고려한 각종 제도들에 감탄하며 생존경쟁만 살벌하게 펼쳐지는 게 아니라 인간미가 넘치는 공간이란 점에도 눈길이 갔다.


exit or not, photo by. Rojoy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한편 그 과정에서 나는 함께 뽑힌 사람들과 협업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첫 날부터 당연한듯 지각을 했던 직원 한 명이 일하는 내내 독단적인 행동으로 말썽이었다. 내가 관리감독의 지위에 있는게 아닌만큼 그 제멋대로인 행동을 방임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그렇게도 스트레스였다. 그녀는 말투가 사나웠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행동이 이기적이었다. 모두가 평등한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앙회에서 진행한 다른 사업에 참여했던 경험을 들먹이며 리더 역할을 자임했다.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은 누구도 부여하지 않았지만 본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사업장이든 직장동료에게든 고압적인 말투는 시와 때를 가리지 않았고 기분 나쁜 전화를 받으면 수화기를 냅다 집어 던졌다. 사정없이 내던져진 수화기가 책상에 부딪혀 나는 둔탁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녀의 행동을 불편하게 여겼지만 누구도 제지하거나 나서서 나무라지 않았다. 나이가 지긋한 분들조차 모른체하기 바빴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나는 불의를 보고도 모른체하는 그들의 행동도 이기적이라는 생각에 분노를 금치 못했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저 ‘또라이 질량보존의 법칙’이 맞는구나 하며 답답한 마음을 홀로 삭이곤 했다. 또한 그녀는 이 사업의 중앙회 담당자와도 크게 불협화음이 있었다. 그녀에게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대화와 타협 그리고 양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글자인냥 막무가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크게 문책을 당하거나 잘리고도 남았을 행동이었다.


보잘것 없는 위치에 큰 의미없는 일과 내 역량을 뽐낼 수 기회가 없는 상황이 답답했지만 견뎌냈다. 다만 사업 마무리 단계에서 책자 발간을 위해 인터뷰를 다녔는데 그 때가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비록 명함도 없이 다니느라 내 소개를 할 때마다 식은땀이 나긴 했지만, 감사하게도 방문한 업체들은 대체로 환대해주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은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사무실에 따분하게 앉아있기보다 돌아다니는게 더 적성에 맞기도 했다. 하지만 출퇴근이란 작은 기쁨은 사무실에서 행패를 부리는 자에 의해 종종 끝없는 우울함으로 뒤바뀌곤 했고, 내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을 보지도 못한 채 계약기간이 만료되었다.



여의도엔 놀러를 다닌다, photo by. Jund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