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할 뻔한 취업 뽀개기
내 꿈은 외교관이었다. 하필 그 직업이 공무원이라 선택한 길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참 허황된 시각으로 취업준비를 시작한것 같다. 현직에 있는 사람들의 평가를 들어보지도 않고 나름대로의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 환상이 꽤 오래된 것이어서 쉽게 단념하지 못했던것 같다. 가만히 앉아 있는 일보다는 이리저리 움직이고 변화무쌍한 일을 좋아하는 성향상 외교관을 하면 그런 욕망을 채울 수 있을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졌다. 마치 한국을 대표하는 협상가라는 타이틀이 주는 환상에 사로잡혀 서류 업무와 민원 업무에 치이는 일상에 대해선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다만 내 부모님의 꿈이 공무원이었다. 부모님은 자신들의 딸 아이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길 원했다. 한국사회에서 여자가 육아까지 병행하면서 한 직장에서 오래 살아남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더 걱정스러워 하셨다. 물론 일가정양립과 저녁 있는 삶을 위해선 최선의 선택임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경직된 조직문화며 성과가 아닌 연공서열에 의해 좌우되는 포상체계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공무원이 되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스스로도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적절한 보상이 주어져야 더 좋은 성과를 내고 의욕적이 된다는 걸 잘 알았기에 꺼림직했던 거다. 실제로 공무원 조직은 대체로 평탄하고 무난한 걸 선호하는 분위기다. 그러한 선호는 남녀불문, 나이를 불문하고 공통적이다.
더욱이 공부하기도 싫었다. 고등학교 졸업이후 오지선다/사지선다의 객관식 문형과는 영원히 이별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다시 암기형 공부를 시작해야만 했다. 대학시절 온통 토론과 발표 수업에 치중했던 까닭에 원 없이 말하고 다니며 말하고 싶다는 소원을 맘껏 풀었는데, 고립된 수험생활이라니 처음엔 사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준비해볼까 싶은 생각에 무작정 합격생 설명회를 들으러 갔다.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한 무용담을 늘어놓는 합격생들을 보며 그와 비교되는 내 신세가 처량하다 느껴져 우울해했다. 하지만 다른 꿈에 도전해볼 생각은 들지 않아 결국 공시생이 되었다.
승자는 이미 떠났고 패자들의 불안감만이
가득한 노량진 생활로 그렇게 걸어들어갔다.
많은 신문기사에서 다루었듯 나 역시 고독하게 홀로 공부하는 수험생이었다. 하루종일 벽만 보고 책만 봤다. 집안의 경제적 지원으로 다행히 밥값은 충분했던 터라 남들처럼 배 곯거나 몇 푼 아쉬울 일은 없었지만 외로웠다.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직장이 있거나 아직 학생 신분인 사람들과 달리 나는 영원한 어둠 속에 잠식되어 있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깐의 휴식도 사치스럽다고 생각해 자신을 채찍질했고 결국 버텨내지 못한 날에는 자괴감에 울다가 쓰러져 자곤 했다. 특히 합격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내 생활과 비교하며 그들의 합격비법을 미신처럼 믿고 따라하려고 했던 게 가장 힘들었다.
바깥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주변 지인들이 저마다의 기쁜 소식을 들려주며 행복을 만끽하고 있을 때 나는 차디찬 공기 아래 숨죽이며 공부하는 공시생이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동안엔 내가 어디쯤 왔는지 알 수가 없어 내내 마음고생이 심했다. '루저'가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그 시도가 번번이 실패할 때마다 좌절감과 죄책감을 느꼈다. 효도는 못할망정 부모님의 등골브레이커였으니깐. 세상과는 담을 쌓았고 내 내면의 성장을 돌아볼 새도 없었다. 공부하는 동안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고 내 자신에 대한 것도 잊게 되며 내 삶의 방향에 대해서도 고민할 겨를이 없다. 한 마디로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그런 힘든 '번데기'시절을
거쳐 언젠가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제 세상을 누비게 된다.
그런 시기가 오기까지 수차례 바람에 휘청이고 불안함에 마음이 나약해지곤 했던 나의 빛나는 과거를 기록한다. 이 글이 어려움을 겪고 있고 용기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