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나빠요

노사관계에서 을(乙)로 살아간다는 것

by 흔한여신
코로나의 확산은 우리의 일상생활도 나라 전체의 경제상황도 뒤바꾸어 놓았다.


경제 성장세가 둔화된지 오래지만 마이너스 성장이 예견됐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 거리를 걷다보면 온통 "휴업"한다는 공지가 붙어있는 가게가 부쩍 많아졌다.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때문에 이동인구 감소로 소비는 침체되었고 자유로운 영업활동에도 제한이 걸린 탓이다. 지난 2-3월 쯤부터 예정된 일정이 취소되고 사업계획이 백지화되면서 매출이 급감했고 이를 버티다 못한 일부 사업장은 점차 폐업수순을 밟고 있다. 물론 정부에선 경기회복을 위해 지원금 지급계획을 발표하며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지만 당장 생활고를 겪는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효과가 있을지 미지수다.




한편 휴업하게 된 사업장들은 강제적 조치에 의해 발생한 손실을 보상받기 위해 정부에서 운영중인 지원제도로 눈을 돌렸다. 흔히 휴업/휴직 지원금으로 불리는 '고용유지지원금'. 코로나 이전에도 법령에 의해 존재했으나 대부분의 사업장이 일반적으로는 신청하는 일이 없는 지원금이었다. 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됨에 따라 강제로 영업이 금지되고 사람들 간 집합이 제한되면서 유례없이 많은 신청이 몰렸다.


이 지원금은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근로기준법상 지급하여야 하는 휴업급여의 일부를 보전하기 위해 주어진다. 통상적으로 휴업 중에는 영업이익이 발생하지 않으므로 사업장 입장에서는 인건비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지원금은 노사관계에서 상대적 약자의 입장에 놓인 '을'들이 경영난으로 인해 해고되는 것을 방지하고 휴업/휴직 중에도 고용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즉 사업장의 영업손실을 보전하기 위함이 아니라 '을'들의 생존을 돕기 위한 지원금인 것이다.


<근로기준법>
제46조(휴업수당) ① 사용자의 귀책사유로 휴업하는 경우에 사용자는 휴업기간 동안 그 근로자에게 평균임금의 100분의 70 이상의 수당을 지급하여야 한다. 다만, 평균임금의 100분의 70에 해당하는 금액이 통상임금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통상임금을 휴업수당으로 지급할 수 있다.
② 제1항에도 불구하고 부득이한 사유로 사업을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노동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경우에는 제1항의 기준에 못 미치는 휴업수당을 지급할 수 있다.

<고용보험법 시행령>
제19조(고용유지지원금의 지급 대상) ① 고용노동부장관은 법 제21조제1항에 따라 고용조정이 불가피하게 된 사업주가 그 사업에서 고용하여 피보험자격 취득 후 90일이 지난 피보험자(일용근로자, 「근로기준법」 제26조에 따라 해고가 예고된 자와 경영상 이유에 따른 사업주의 권고에 따라 퇴직이 예정된 자는 제외한다. 이하 이 장에서 같다)에게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조치(이하 "고용유지조치"라 한다)를 취하여 그 고용유지조치 기간과 이후 1개월 동안 고용조정으로 피보험자를 이직시키지 않은 경우에 지원금(이하 "고용유지지원금"이라 한다)을 지급한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사업주가 자신의 사업장이 경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휴업/휴직 시에도 근로자에게 급여를 지급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 증명해야 한다. 특히 주관적으로 느끼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게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으로 매출액이 감소하거나 재고량이 증가하는 등 객관적으로 타당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노사 간의 합의를 통해 근로기준법상 지급 최저기준 이상의 급여를 지급하여야 한다. 따라서 지원금을 신청하고 지급받는 주체는 '사업주'이며 사업주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게 휴업급여를 지급하여야 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경제상황이 어려워진 만큼 무급휴직 중이거나 권고사직 당하는 등 사업주의 일방적인 통보에 어쩌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근로자가 상당수 존재한다. 사업주 입장에서는 경영난 극복을 위해 지출을 최소화해야 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직원 수를 줄이는 일이기 때문에 근로자는 부당함에 침묵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대부분의 사업장이 하락세를 걷고 있어 재취업도 쉽지 않은 실정이라 많은 근로자들이 무급으로 쉬는 한이 있더라도 잘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꽤나 안타까운 실정이다.




고용센터로 쏟아져 들어온 고용유지지원금 신청 건들의 경우, 물론 부정수급의 사례도 많지만, 적어도 그들의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겐 행운이 따른 것이다. 잔뜩 어두운 표정과 벌개진 눈 그리고 답답한 마음으로 고용센터를 찾아 온 이들 대다수는 사업주였다. 아직도 아수라장이었던 센터의 풍경이 생생히 기억난다. 자신의 생계도 곤란한 처지에 놓였지만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게 월급을 못 줄 상황에 놓이자 어떻게 도움받을 길이 없을까 싶었던 그들은 생경한 행정용어를 머리에 눌러 담았다. 더듬거리는 말투로 이것저것을 물어보던 사업주는 아직 자신의 직원과 이별할 수 없다고 했다. 사정이 나아질 수도 있으니 이걸로 버텨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자신들의 사정일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지만
하루아침에 억장이 무너진 심정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출처: https://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23



그래서 좋은 담당자가 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나는 어린아이에게 글자를 처음 가르치는 심정으로 최대한 쉽게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려고 애썼다. 때때로 설명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애써 담당자랑 소통하려는 사업주들의 모습이 나는 안타까웠다. 그런데 그들의 사정이 더 짠했다. 서류 검토 중에 그들이 휴업 중에 지급했다는 급여와 그들 사업장의 매출액 자료를 보면 쓴웃음이 지어졌다. 차마 보기 민망할 정도로 매출은 급감했는데 여전히 인건비 등 지출은 발생하고 있었다. 지원금 신청 전에 지급해야하는 급여마저 줄 돈이 없어 근로복지공단에서 고용유지지원금 관련 대부를 받은 사업장도 꽤 있었다. 그런 사업장들의 경우 내가 지원금을 지급한들 사업장에 바로 전달되지 못하고 대부금을 갚는데 먼저 쓰이게 된다.


때문에 나 또한 밤낮없이 서류에 파묻혀 살아왔다. 초창기 업무를 막 시작했을 때엔 산처럼 쌓여 있다가 밀려드는 신청 건들과 하루에 몇 십통씩 걸려오는 전화에 얼이 쏙빠졌다. 하루 자리를 비우면 부재중이 60통 넘게 찍혀있곤 했다. 하지만 처음에 1건 처리에 반나절이 걸렸던 것에 반해 시간이 흐른 지금은 하루에 많게는 20건 가까이 처리할 수 있게 됐다. 그 동안 많은 사업장들에 지원금을 지급했고 일부는 여름 무렵 다시 매출액을 회복해 고용센터와 멀어졌지만 다시 또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고용센터를 찾는 이가 더 늘어나게 됐다.


출처: https://goodjob.donga.com/3/all/62/1642592/1


그런 어느 날, 중년의 여성 두 명이 고용센터를 방문했다.


역시나 좋지 않은 안색으로 방문해 다른 담당자에게 이것저것을 묻더니 신청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조금 있다가 한 명이 자리를 떴다. 남은 한 명이 마저 자리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 보는데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해 보여 다가갔다. 신청서류 작성을 차근차근 안내하고 있었는데 손 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서류 작성하는 일이 처음이라는 걸 눈치채고 더 부드러운 태도로 말을 건넸는데 사정을 알고 보니 그녀는 사업장의 근로자였다. 함께 왔다가 이내 가버린 다른 여자는 바로 그녀의 사장님이었다.


그녀는 몇 달째 돈 한 푼 못 받고 집에서 쉬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남들한테 듣고 보니 쉬는 동안에도 월급이 나오는 방법이 있는 것 같아 알아보게 되었고 사장님을 설득해서 방문하게 된 거라 설명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내내 심드렁한 태도였다고 했다. 자신을 찾아와 설득하는 게 귀찮고 고용센터에 방문하는 일이 귀찮아 안 하려고 했는데 간곡한 부탁에 겨우 마음이 움직인 거라고 했다.


하지만 지원금은 원칙적으로 사장님이 서류를 준비해서 신청해야 한다. 일부 과정에서 근로자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어쨌든 근로자 명의로 신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근로자는 1월에 예정된 휴업계획 서류를 작성하는 데 계획이 이대로 될지 혹시 근무할 일이 생길지 불분명한 게 걱정이라고 했다. 이에 나는 계획을 변경할 수 있지만 변경신고를 사장님 동의없이 독자적으로 제출하실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보통 직원이 대신 신청하는 경우 관리자 측이거나 권한을 위임한 대리인의 신분인 경우다. 위임장 아니면 적어도 사업주가 직접 사인한 서류나 도장이라도 들고 온다. 하지만 그녀는 사업주의 관심 밖에 놓인 철저한 을(乙)로서 사업주와의 협의 자체가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이쯤되니 과연 사업주가 추후에 제대로 지급신청 서류를 구비해 줄지 의심스러워졌다. 급여를 지급해야 함은 물론이고 갖가지 서류에 관리자로서 서명해 줄지 의문이 들었다. 그녀의 딱한 사정이 이해는 됐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원칙을 되풀이해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래도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출처: https://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746



회사에 을로서 살아가며 때론 많은 부조리함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드라마 같은 데서는 을들의 반란이 성공하는 짜릿함을 그리고 있지만 현실에서 많은 을(乙)들은 주어진 사명에 따라 희생하며 살아가고 있다. 뭉치면 제법 큰 목소리를 낼 법도 하지만 을들이 처한 저마다의 사정이 다르기에 연대하기 힘들다.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대로 이리 눕고 저리 눕는 갈대처럼 살아갈 뿐이다.


아무런 힘 없는 공노비에 불과한 나도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때론 사업장에서 바라는 것처럼 많은 것들을 뜯어고쳐서 보다 현실에 맞는 결과물들을 내보이고 싶지만 나랏님의 뜻과 의지가 내 기대와 같을쏘냐. 꿈은 반드시 좌절되기 마련이다. 그저 내 분수에 맞게 하란 대로 성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언젠간 당당한 갑(甲)이 될 그 날을 꿈꾸며, 세상 모든 을들이여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