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로운 일상을 깨운 전화 한 통
일상이 쳇바퀴처럼 굴러가고 있는 게 벌써 몇 개월째다. 다양한 업무를 해 볼 수 있었던 전과는 달리 지금은 한 가지 사업에만 매달려 있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 답하고 답해도 끊임없는 질문세례에 어느 순간 숨이 턱 막혀버렸다. 반복해서 똑같은 내용을 답변하는 일을 몇 달 째 이어오다보니 최근들어 업무에 임하는 태도가 부쩍 해이해진 게 사실이었다. 여러번 내용을 읊어줘도 사업장에선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고 요청하는 내용과 다른 서류를 제출했다. 때문에 반복되는 업무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코로나는 여전히 제 위용을 과시하고 있고 사업장의 어려움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덩달아 내 역할도 끝나지 않았다.
한편 내가 지겹다고 투덜댈 때 누군가의 일상은 멈춰버렸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일터에서 쫓기듯 나와 집 안에 갇혀 버렸고 정부는 각종 지원금을 쏟아부어 경기부양에 나서고 있다. 원래의 꿈과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시련에 좌절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위기상황을 극복해보고자 동원된 인력으로서 예상치 못한 한 해를 보냈다. 일감이 어마무시하게 쏟아졌지만 그 또한 내 사명이라 받아들였다.
모든 사업장에 같은 내용을 앵무새처럼 반복해 이야기하는데도 어떤 사업장은 뚝딱 서류를 준비해오는가 하면 어떤 사업장은 세심한 엄마의 손길을 요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사업장은 요청하는 사항에 적극 응답하기도 했고 다른 사업장은 요구사항에 대해 되려 따져 묻기도 했다. 평소엔 최대한 친절함을 발휘하려고 노력하지만 체력이 방전되는 날엔 신경질적이 되기도 했다. 왜 몇 번을 말해도 나아지지 않는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해결되지 않는 답답함이 머리 끝까지 가득 차올랐다.
그런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예의 문의전화였다.
"저, 제가 지원금을 타 먹은 적이 있는데, 그 이름이 뭐였더라? 하여튼 타 먹는다고 타 먹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직원 하나가 퇴사하려고 해서요. 근데 지원금 받은 게 무슨 문제가 된다고 들은거 같은데, 맞나요?"
"지원금 받으신 게 몇 월 쯤인지 기억하시나요?"
"타 먹긴 한 거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나요."
간단하게 사업장 정보를 확인한 후에 지급내역을 조회했다. 3개월 전에 지원금을 받았던 사업장이다. 때문에 현 시점에서 퇴사자가 발생하더라도 이전 지급받은 내역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향후 지원을 받는데 있어서도 문제가 없는 사업장이었다.
"선생님. 확인 해 봤는데 문제가 없을것 같아요. 그런데 앞으로도 지원금 신청할 계획이 있으신가요?"
평소의 나라면 굳이 잘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묻고 싶었다.
"아.. 저 그게.."
"앞으로 신청하시는 데도 전혀 문제가 없으니깐 계획 있으시다면 올해든 내년이든 다시 신청하셔도 됩니다."
"저, 사실 고민이 많아요.."
예상치 못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사장님은 말을 이었다.
"저희가 나아질 줄 알고 계속 믿고 있었는데, 그게 상황이 잘.. 안 되더라구요.
근데 계속 타 먹기도 미안하고 그래서 그냥 신청을 안 했어요.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구요.
그래서 직원 하나가 나가게 됐어요. 오래 같이 일한 사람인데, 내보내야 하는데, 지원금 탈 때 사람 자르면 안 된다고 들은거 같아서요. 확인해봐야겠어서.. 아유.. 너무 어렵네요 참."
"아, 어쩔 수 없으셨구나. 그래도 남은 직원 분 계시죠? 그 분 지금 일하고 계신거 아니고 앞으로도 일 안 하실거면 지원금 또 신청하실 수 있어요. 지금 신청하실 거 아니라면 내년에라도 꼭 신청하세요.
서류 준비할 때 모르는 게 있으면 전화 주시고요, 정 모르시겠으면 방문하셔도 됩니다."
"네. 하이구 참.. 감사합니다."
매번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권태로움에 잠식되어 미처 살피지 못했던, 수화기 건너편 상대의 사정을 듣고 나니 쓴웃음이 났다. 잊고 있었다. 상대방은 절실함에 수화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가슴이 저려왔다. 차갑게 식어가던 가슴에 옅은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렇게 슬럼프에서 조금 벗어났다.
*메인 이미지 출처: https://www.mobiinside.co.kr/2019/07/31/pathfindernet-pathfinder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