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다칠까 봐 학교생활을 잘 못할까 봐 불안하고, 공부를 못하거나 친구관계가 원만치 못할까 봐 또 불안해한다. 부모 자신도 아이가 어릴 적부터 잘 키우고 있는 것인지, 더 무엇인가를 해줘야 하는데 못하고 있는지, 혹은 자제해야 함에도 넘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마음에 불안해한다. 부모는 이래저래 불안과 걱정의 포로가 된다. 아이가 하나일 때는 물론이거니와 둘 이상의 경우에도 걱정의 경험이 쌓여 불안이 줄어야 하는데, 막상 현실은 아이들 머리수만큼 불안의 개수마저 늘어나 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면서 부모의 불안은 더 구체적이고 섬세해진다. 이는 대학 진학이라는 거대한 벽이 버티고 있어서 아이의 학교생활과 공부하는 과정이 아이의 장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부모들만큼 사회경제적인 여유를 누리고 살아가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한다. 더욱이 우리 사회는 초경쟁시대,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 학벌이 곧 신분이 되는 사회라고 불리다 보니 부모의 걱정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널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살벌한 사회에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낙오라도 되는 날이면. 아이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생각하다 보면, 부모의 걱정과 불안은 끝이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자. 부모들은 무엇을 걱정하는 걸까?(사회구조적인 문제는 빼고 생각하자)
1) 아이의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는 걸까?
2) 아이의 불안한 내일을 걱정하는 부모 자신을 걱정하는 걸까?
물론 두 개의 질문이 혼재되어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굳이 두 개의 걱정으로 나누어 보면 부모의 선택이나 역할이 더 분명해진다. 부모의 근심이 전자에 그친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후자라면 걱정 투성이 부모일 수도 있겠다. 전자의 경우에는 아이의 문제일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부모 자신의 문제일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부모가 그 불안으로부터 거리두기나 객관화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부모 자신의 문제이다 보니 거리두기도 쉽지 않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는 모든 부모들이 갖는 걱정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소수의 부모만 갖는 걱정이다.
특히 부모가 후자의 입장인 경우에는 부모 자신의 문제로 인한 불안까지 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경우 부모의 걱정은 일상화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아이에 대한 불안과 부모 자신의 불안이 다시 아이의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부모의 불안이 자칫하면 아이의 영혼(미래)을 잠식할 수도 있다는 거다. 그것도 서서히 보이지 않게. 결과는 한참 뒤에야 나타나게 되는.
#2.
그래서, 부모들은 선의의 거짓말을 하며 살아간다.
"우리 아이들은 다들 자기 알아서 해. 부모들이야 믿고 있으면 돼지"
"다 자기들 인생이지. 우리가 걱정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부모가 아이들 문제에 대해 걱정을 안 하고 불안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아이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말하는 것도 조금은 과장된 진술이다. 부모가 된 이상 본능적으로 자녀에 대한 여러 걱정거리로 불안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게 부모라는 역할이 주는 현실이다. 다만 그 불안을 최소화한다든지, 불안으로부터 부모 자신을 객관화한다든지 하는 선택의 문제만 남아있을 뿐이다. 부모가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이 불안에 흔들려버리면 이때부터 부모의 불안은 문제 있는 불안이 된다. 이 불안은 자녀에게까지 전염되어 가정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나 자신은 무엇을 불안해하는 걸까?
우리 부부는 네 명의 아이들을 사교육을 최소화하며 공부를 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아무리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공부를 하게 한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학업성취를 얻지 못하면 아이들의 미래는 당연한 걱정거리가 된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일찌감치 자신의 꿈을 구체화하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길 바라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네 명의 아이들 모두 공부에 대한 관심이나 자신의 미래문제에 대한 고민의 정도도 다 다르다. 아이들이 아무런 생각이 없어도 괜찮은 때를 지나서도 그런 성장 욕망이 없을 때 부모의 걱정은 현실화된다. 지금 이 순간도 그렇다.
부모들은 우리 사회의 사회경제적인 현실을 직시하다 보니 청년실업이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이 남의 일이 아니다. 아무리 아이의 공부 성적이나 대학 진학이 부모의 성적이 아니라고 말하더라도 부모의 마음이 편치는 않다. 결국 아이의 미래는 물론 현재까지도 부모의 근심 가시권에 들어있는 것이다.
아무리 걱정을 해도 아이의 미래는 잘 바뀌지 않는다. 인생은 개별적이고 부모라 해서 아이들의 삶까지 살아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부모의 기준은 부모의 삶의 기준일뿐이다. 아이에게 어른의 기준을 들이대면, 그것은 재앙에 가깝다. 부모가 제시한 삶의 모습은 실수도 실패도 허용되지 않는 이미 완성된 인생의 단면이다. 아이들의 인생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때문에 아이들은 서투르게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해보며, 다양한 시행착오와 다시 도전할 용기가 필요하다. 그들의 인생에 대하여.
#3.
미국 존스홉킨스 어린이센터의 연구에 의하면,
부모가 사회적 불안장애를 갖고 있으면 그 자녀들도 불안장애를 갖게 되기 쉽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부모가 불안하면 아이들에게 애정과 따뜻함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연구에 의하면 불안이 있는 부모는 아이들을 더 쉽게 자주 꾸짖으며, 아이들의 행위에 대해 부정적인 의문을 품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부모는 불안 때문에 자녀를 자신의 틀이나 기준 안에 가두려고 하며, 자녀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다. 아이의 개별성을 부정하며 부모의 예측 가능한 가시권 내에 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 부모가 안심이 되고 걱정이 덜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아이들을 사교육 시장으로 보내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위치에 있으며 열심히 살아가는 부모일수록 더 많이 불안해하고 아이에게 무언가 더 해주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 이유는 지금의 그들이 가진 사회적인 신분이 주는 혜택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부모들일수록 아이들이 원하는 것에 쉽게 동조하며, 사교육에 아이들을 맡길 가능성이 크다.(여기에서 교육제도를 통한 신분세습은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부모의 불안을 어떻게 해야 할까?
현실적으로 부모의 이러한 불안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능한 방법 중 하나는 부모의 불안 자체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원래 우리네 인생의 본질이 불명확하고 불확실하며 예측할 수도 맘대로 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니던가. 이 간명한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우리 속의 불안은 괴물이 될 수도 있다.
그 괴물의 실체는 아이들을 부모의 불안이 낳은 테두리에 가두는 것이다. 아이들을 공부라는 확률게임에 무분별하게 뛰어들게 만들거나 아이의 능력이나 의지에 상관없이 부모의 생각대로 성장하길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부모의 마음대로 아이들은 커나가지도 않을 것인데도.
아이의 내일은 불안하더라도 오늘은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1) 아이의 미래를 속단하지 말 것(아이의 미래는 알 수도 없고, 스스로의 선택에 맡기자. 어차피 부모 마음대로 안된다.)
2) 아이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 것(기회도 주지 않고 평가부터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중에 판단하자.)
3) 아이의 판단을 무시하지 말 것(아이 자신의 나이나 생각의 수준만큼 보인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부모만큼 보고 판단할 수 있다.)
4) 아이의 실수를 실패로 보지 말 것(실수는 여러 번 반복해도 실패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자. 부모들 먼저 시행착오를 도약의 기회로 삼자.)
5) 아이의 무분별한 욕구를 억제할 것(원한다고 다 해주지는 말자. 적당한 결핍이 주는 장점도 많다.)
6) 부모 자신의 인생을 아이의 삶에 대입하지 말 것(부모의 삶과 아이의 삶은 다르다. 서로 개별성을 존중해주자.)
이렇게 말하면서도... 막상 공부도 자기 할 일도 제대로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아이들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