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역에서 출발해서 오금역까지 운행하는 지하철 3호선은 서울 강북과 강남을 관통하는 긴 노선이다. 환승역이 무려 10군데가 넘어서 서울시내에 개통된 대부분의 노선이 환승된다. 덕분에 다양한 사람들이 타고 내리며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한다.
마두역에서 집으로 가는 퇴근길, 적당히 붐비는 지하철 안.
1시간 30분 동안을 지하철에서 앉아있으면 책과 사람과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한쪽 구석에서 책(황현산 님의 '사소한 부탁')을 읽고 있던 중, 어느 역에선가 모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옆자리에 앉았다. 바로 옆자리라 그들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서로 스마트폰에 열중하다가 갑자기 대화를 시작했다. 엄마로 생각되는 40대 여성이 딸로 여겨지는 10대 여성에게 말길을 텄다. 상당히 큰소리로 대화를 시작해서인지 앞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모녀의 얼굴이 영화 속 화면처럼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신기한 능력이.
“내일은 학원가는 거지?”(야, 너 진짜 학원 꼭 가야 돼)
“봉사활동 한 시간 때문에 못가?”(나 학원 안가)
“왜 못 가는데, 세 시간 짜린데...”(학원에 들인 돈이 얼만데, 왜 안 가냐고)
“봉사 활동해야 된다고, 안된다니까...”(나 학원 안가)
“아니 봉사활동을 몇 시간 하는데, 학원을 못 가냐고..”(#@&, 너 진짜 학원 안 갈래?)
“봉사활동 시간을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그래서 못가..”(진짜로, 나 학원 안가)
“그럼 봉사활동 오전에 하고, 오후에는 학원에 가면 되겠네..”(제발, 내일은 꼭 가자)
“몰라, 봉사 활동해야 하니까. 학원에는 안가. 내 맘대로 할래”(응, 나 학원 안가)
“아니, 왜 학원을 안 가냐고?”(너 정말 학원 안 갈래?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아무튼, 내 맘대로 할래?”(그래도, 나 학원 안가. 후회도 안 할 거야)
이들의 대화는 여기에서 중단됐다. 다시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신세계로 빠져들었고, 잠시 후 고요가 찾아왔다. 주위의 다른 승객들은 적막강산이 부유하는 객실 안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겸연쩍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대화를 잠시 엿들었을 뿐인데, 왜 내 마음이 불편한 걸까? 우리 집 얘기도 아닌데, 무슨 이유로 내 얼굴이 붉어졌을까? 어찌 되었건, 소란을 제공한 그들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는 없었다. 좀 조용히 해달라는 '사소한 부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무슨 욕을 들으려고.
그들이 나눈 대화 하나하나로 그들의 감정과 얼굴 표정이 보였다. 이들 모녀는 우리 주위에 살아가는 여느 모녀와 같을 것이다.(살갑고 사이좋은 모녀 관계인 분들에게는 죄송하다.) 지하철이라는 공적인 공간에서도 이러하니 그들의 사적인 공간에서 나누는 얘기들이 어떠할지 진정 궁금하다. 앞자리에 있는 이들의 얼굴에도 만감이 교차해 지나간다. 우리 집이랑 별반 다를 게 없네 하는 표정들. 하차할 역은 아직 한참 남아서 불편해하던 그 얼굴들.
아이들의 교육이나 대학 진학에 목을 매는 엄마와 물가에 끌려가는 소 같은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 이러할 것이다. 우리 집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단지 학원 얘기를 안 한다는 거 빼놓고는. 타인의 처지나 내 사정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 묘한 기시감이 든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대화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좋은 대화는 동일한 시공간에서 동일한 차원에서 상대를 배려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서로의 눈높이'란 차원의 문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배려의 문제가 대화 과정에 녹아들 때 진정한 대화가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는 바람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을 가졌을까? 그럴만한 태도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때로는 부모라는 기준을 버리고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대화를 시도했을까? 낯선 모녀의 대화를 들으며 스스로를 반성할 수밖에.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부부 사이는 물론 부모와 아이들의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의 갈등을 드러내는 대화가 주종을 이루게 됐다. 동일한 공간에서 이루어지지만 동일한 차원의 얘기도 아니고 상대방은 안드로메다만큼 멀리 있는 대화. 그러니 서로의 날 선 주장만 있고 진정한 대화의 목적은 실종되어버렸다. 혹여나 대화의 원래 목적이 갈등 조장이나 감정 드러내기였을까?
서로가 얘기하는 바를 들으려 하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고 내 얘기만 하고 그것만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진심 어린 대화의 실종사건이다. 아무도 부재를 신고하지 않지만, 모두가 그 부재를 마음 아파하는.
실종된 대화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그것을 알고 나면 오금이 저리지 않을까.
다시금 대화가 왜 필요한지,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일이다. 애들만 타박할 일은 아닌 것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