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초는 어떻게 애견 라사압소를 닮았을까?

by 지성파파
연말연초가 되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아니, 다른 마음가짐으로 달리 보기 시작한다라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나는 올 한 해(또는 지난 한 해)를 왜 이렇게 살아왔을까? 좀 더 현명하게 잘 살 수는 없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자책을 하며.


그동안 보지 못했던 시간의 흐름이나 자신의 행동이 보이기 시작하는 때도 12월과 1월이다. 새해가 되어 1월부터 12월까지 동일하게 존재했던 세상이지만 왜 이때만 달라 보일까..... 일 년 동안 부재했던 삶의 철학이 느닷없이 생겨난 것은 아닐 것이고. 그동안 무언가가 우리의 마음과 육체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만히 되돌아보며 지난 일 년을 생각해본다.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일 년 내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무언가가 12월에만 사라진 것은 아닐까. 세상을 제대로 못 보게 하거나 잘못 보게 할 수 있는 장애요소가 1월에는 제거되어 이제는 똑바로 보이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이다.


연초에 세웠던 대부분의 참신한 계획이나 처절한 다짐은 사흘을 넘기기 힘들다. 나머지도 이른 봄빛에 녹거나 여름 소낙비에 깔끔하게 씻겨나간다. 그나마 가느다랗게 유지되던 한두 가지 계획마저도 가을이 되면 추풍낙엽이 되어 사라진다. 황망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보면 달력은 마지막 한 장뿐인 경우가 우리의 일 년살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계획이나 다짐도 하루살이 같은 운명일 수도 있겠다.


연말연초에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고 해서 주위의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거나 존재하지도 않은 플랜 B, C가 실행된 것도 아니다. 단지 "어쩌다 마는 마음가짐"이 잠시 달라진 것뿐일 것이다. 얼마 뒤 계획 수립이나 마음가짐이 그 이전으로 원상 복귀되는 힘이 강한 갈대 같은 마음. 우리의 회복탄력성은 발휘 안되어도 될 영역에서 더 강하게 반응한다. 그것도 본능인 걸까.


주위를 돌아보면 개(애견)들의 전성시대다.


많은 애견주들은 자신들의 애견을 사랑하는 자식들 보듯이 한다. 개를 키우는 집에서 아빠들의 서열은 적어도 개 아래에 있다. 그야말로 개팔자가 상팔자다. 잘 키운 강아지 한 마리 열 아이들 안 부럽다는 얘기도 나올 기세다.


개의 품종은 우리의 성씨(귀화자를 제외하면 약 330개 정도) 보다 더 많은 것 같다(국제 개연맹에 따르면 344종 정도). 집에서 키울 수 있는 품종이 제한되어 있긴 하지만, 산책로나 공원길에서 보이는 애견은 애견주만큼이나 다양함을 볼 수 있다. 그 수많은 개중에서 털 길이나 독특한 외모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품종이 있다.


그 개의 품종은 라사압소(Lhasa Apso).

라사압소는 티베트에서도 기후가 혹독하고 고도가 높은 지역에서 길러온 품종이다. 몸 전체를 길고 거친 털이 덮고 있어 유난히 추운 티베트 고원의 겨울철에 체온을 보존해주고 바람과 먼지 등으로터 눈을 보호한다. 라마교에서는 열반하지 못한 딜라이라마의 환생으로 여겨져 매우 신성시되었다고 한다. 성격은 보기와는 달리 명랑 쾌활하지만, 존귀한 품종으로 대접받아서인지 냉정하고 새침뜨기처럼 경계심이 많다. 보기보다는 움직임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


라사압소의 근본적인 문제는 앞머리털이 긴 관계로 늘 눈을 덮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집에서 이를 키우는 애견주들은 라사압소의 앞머리를 어떤 식으로든 묶는 치장을 한다. 그저 예쁘게 보이기보다는 애견의 시야를 넓혀주려는 의도이리라. 가끔씩 이쁜 머리핀이나 색색의 머리끈을 하고 있는 라사압소가 눈에 띈다.


지극히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눈을 덮는 머리털로 인해 라사압소가 바라보는 세상의 크기는 작아 보일 수밖에 없다. 라사압소의 앞발은 인간의 손 같은 기능을 할 수 없어 스스로 앞머리털을 묶거나 올릴 수는 없다. 자라난 지역이나 품종의 특성상 타고난 성격과는 달리 라사압소가 보는 세상은 좁아 보일 것이며, 그 때문에 행동이 제약되어 제한된 범위 내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보는 라사압소의 움직임이 조심스럽고 조용해 보이는 까닭이다.(견주들에 의하면 이 품종은 영리한 반면 고집이 세서 훈련받거나 간섭받기를 싫어한다고 한다.) 반면 앞머리털을 들어 올려 두 눈이 크게 보이는 라사압소의 움직임은 다른 애견과 마찬가지로 경쾌하고 활발하다.

머리털을 묶은 라사압소의 눈은 크고 또렷하다.

우리도 자신의 세상에 대한 시선을 가리는 편견과 장애요소를 가지고 있다. 어떠한 개인도 이것이 없을 수는 없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편견은 개인이 이를 객관화하거나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생각의 눈을 가리는 장애물을 스스로 제거할 수 없는 것은 스스로 앞머리털을 묶어 시야를 넓힐 수 없는 라사압소의 입장과 같다. 때문에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의 크기도 작거나 왜곡되어 보일 것이며,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 또한 거기에 제약받을 것이다.


라사압소의 머리털을 묶어 올려서 개가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듯이 우리도 마음의 눈을 가리는 각종 장애물을 머리핀으로 가볍게 묶어서 잘 보이게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싶다. 이때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들을 묶는 머리핀이나 머리끈은 다양한 독서나 좋은 경험이나 현자들과의 대화가 될 수 있겠다.(사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지만) 이러한 긍정적 변수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서 접근성이나 지속성이 달라진다는 한계는 분명하다.


12월의 반성과 후회로 인한 깨달음이 새해에 좀 더 나은 태도로의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문제는 그 변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가 관건이겠지만. 잘 알고 있는 "작심삼일"이 달리 나온 말은 아니다. 연말연초의 반성이 새해에 행동의 변화로 바뀌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좋은 습관을 갖기 힘든 것도 일종의 불필요한 고집이 아닐까? 우리의 DNA 속에 깊히 뿌리 박힌 불치병 같은....


그렇더라도 12월이나 1월에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판단과 시선을 가려왔던 장애요인을 관찰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나마 일 년에 한 번 정도라도 과오를 반성하고 삶의 무게를 반추할 수 있는 계기가 있다는 것을 반겨야 할 것이다. 그것마저도 없는 삶은 늘 시선을 가리는 장막에 막혀 좁은 생각과 시선을 가진 "동굴 속의 인간"으로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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