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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Sep 24. 2020

"선생님"이라 불리는 이들에게, "존경"을 묻는다.

공공기관의 민원실에서 민원인들을 부를 때의 호칭이 애매하다.


홍길동 씨, 김철 님, 최미영 민원인... 그냥 이름을 부르기도 그렇고. 상대방의 이름을 모르는 상황도 많아서 호명을 위해서 이름을 물어보는 것도 주객전도다.


어색함에 자주 사용하는 "저기요"는 자칫하면 "적"을 만들 수도 있어서 상당히 조심스럽다. 실제로 "저기요, 여기요"란 호칭을 사용하다 별천지 원수를 만난 것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상황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여사님, 사장님"을 남발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듣는 이의 주관적 사정이 어떻든 간에 그 호칭은 기분만큼은 좋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잘 들어보면 영혼 없는 미사여구에 불과할 수 있어서 부르는 이도 듣는 이도 부담스러운 호칭이다.


"우리 주제에 무슨 여사님에 사장님까지~~ "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분들도 있다.


그렇다고 민원신청 순서에 따라 "몇 번 민원인"이라 호칭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가뜩이나 각박한 세상에 몇 번이란 숫자로 호명되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다. 인간의 사물화 혹은 정물화 되어가는 느낌이 썩 바람직하거나 인간적이지는 않아서이다.


그래서 가장 많이 불리어지는 호칭 중 하나 "선생님"


선생님의 사전적 의미는 "선생을 높여 부르는 말 혹은 나이가 든 사람을 대접하여 이르는 말" 정도이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선생님의 현실적인 의미는 조금 다르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의 현실적 의미는 여기에 상대방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가미되어 있다. 그 감정의 실체는 존경심이다. 진정한 선생님으로 불려지는 이들은 적어도 존경 한 스푼 정도는 그냥 먹고 들어간다. "존경"은 하나의 직업이 갖는 여러 의미 중 최고 수준의 만족도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에게나 존경심을 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 불리어지는 선생님의 호칭 말고 진정 선생님이라는 단어 속에는 존경이 담겨 있다. 그 존경심에는 상대방이 하는 사회적 역할의 중요성과 헌신이 들어있다. 그 헌신에는 소수의 이들에게만 요구되는 특별한 희생이나 사명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금전을 대가로 물건이나 서비스를 주고받는 동등한 반대급부의 관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필요치 않다. 반면 소위 선생님들이 받는 존경은 사회적 연대나 존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능에 대해서만 부여되는 일반인들의 존중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가 생명부지의 이들에게 "선생님"이라 불렀을 때 우리의 태도는 결정된다. 이들이 우리 사회의 존속과 인류의 생존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오마주(hommage)가 "선생님"이라는 호칭이다. 어린 시절부터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에서도 선생님, 교수님에게 우리는 그들의 헌신에 대해 최대한의 존경을 표현해왔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키워주고 바람직한 인간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에 고마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전문가 집단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일정한 지적 소양과 공적인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고서는 그 직역에 들어갈 수 없는 높은 진입장벽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공적인 역할 없이 그야말로 사적인 이익 추구를 위해 존재하는 직업군도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고 그들의 직업과 이름을 같이 부른다.


선생님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들이 여러 분야에 있지만, 오랜 옛날부터 그 직업에 생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두 집단이 있다. 교육분야 종사자, 의료분야 종사자들이다. 이들에게는 개인의 사적인 이익과 더불어 공익에의 봉사자라는 필연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교육과 의료 두 분야는 한 사회의 존속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종결된 의사들의 파업사태와 더불어 궁금한 점이 있다.


왜, 그들은 스스로의 사회적 역할과 기여를 폄하하는 것인지.
왜, 그들은 자신들이 인류사회에 해온 긍정적인 헌신을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쉽게 맞바꾸는 것인지.
왜, 그들은 코로나-19라는 역사적인 혼란 상황에서 최악의 카드를 빼드는 것인지.


우리 주변의 의사들 중에는 선생님이라 불리며 진정한 존경을 받는 분들도 많다. 그분들은 다양한 연구활동을 통해 특별한 의학적 업적이나 획기적인 성과를 보여주거나, 개인적인 이해보다는 소외계층에의 의료활동을 통해 자신의 역할을 극대화한다. 자신들의 진정한 존재가치를 아는 분들이다.


최근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민감한 정치적 어젠다에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 살아가는 문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며, 특정한 직업군에 대해서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공평함을 벗어나서 그 직분이 주는 사회적 책임감은 그들이 받는 존경의 무게만큼이나 중하게 생각했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서 오는 의사들의 의무감에 대한 것은 아니다.


어떤 직업이든 간에 사회나 구성원에 대한 의무는 존재한다. 다른 이들이 먹고 마시고 입는 양질의 재화를 생산해서 적정 가격에 팔아야 의무. 고객이 원하고 만족할 정도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 고객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져야 할 의무 등. 모든 직업은 이러한 의무를 기초로 존재한다. 그것도 등가교환의 법칙 하에서...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직업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민원인이나 고객을 대할 때의 "선생님"  정도의 무게만 느낄 수 있는 직업이라면 그들의 파업행위를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생명을 책임지는 이들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사명감의 무게는 남다른 것이다. 그들은 단지 물건을 사고팔거나 소소한 재능으로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다. 그들의 직업은 인간의 생명이라는 가장 고귀한 부분을 다루기에 어렵고도 긴 공부 여정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들 스스로 말하듯 아무나 할 수 없는 능력 조건을 갖춰야 하는 것도 그 이유다. 평범하지 않은 인내와 지적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에게 비범한 능력을 발휘할 기회와 사명감을 등가교환 이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이점이 부당한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볼 필요가 있다.


선생님이라 불리는 이들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품격>을 져버릴 때 우리는 묻고 싶다.


"지금까지 혹은 앞으로 자신들이 가져야 할 존경의 몫이 무엇이었냐고"

"전교 1등이 누려온 사회적인 혜택과 특권은 무엇으로부터 왔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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